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슥 3:1-5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시 44:20-21
사탄은 우리를 공격한다. 당시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에 따라 순종하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사탄이 고발한다. 본문에서 사탄이 여호수아를 고소하고 이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변호한다. 저는 우리의 대언자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렇게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다. 여호수아는 당시에 대제사장직을 담당하였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한다. ‘앞에 섰다’는 의미도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호와의 앞에서 제사장 직분, 곧 성도로 섬기며 사는 우리들 모두이기도 하다. 그렇게 ‘여호수아’가 사탄의 참소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섰다. 그의 정당성 여부를 판가름 받게 된다. 그의 제사장직이 공적이듯이 그는 개인적인 입장이라기보다 공적인 위치로 여호와 앞에 섰다. 그와 같이 우리는 더 이상 개인적인 자신으로 살지 않는다. 성도란 하나님으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것’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한편 ‘사탄’은 욥 1, 2장에서도 동일한 모습으로 욥의 신앙이 참 신앙이 아니라고 참소하며, 저가 지금의 적당한 조건의 환경이 바뀌면 그 신앙을 버릴 것이라며 고발하였던 것을 안다. 그렇듯 사탄은 모든 성도들을 대적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그렇듯 저의 일은 오늘도 내일도 우리를 참소하는 일이다. 저는 훗날 쫓겨나기까지 이 일을 계속할 것이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 12:10).”
우리 안의 양심이 혹은 어떤 가책이 우릴 충동한다. 예전의 일을 떠오르게 하고 오늘의 우리로 걸려 넘어지게 한다. 영적 침체는 우울한 영혼을 표적으로 찾아온다. 죄의식이란 그렇듯 우리 안에서 우리의 죄책을 묻는데 과거의 일에서부터 현재와 미래의 일까지도 걸고넘어진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하려는 것이다. 회개를 하고도 마음에 남은 죄책은 자신을 찌른다. 누가 알까, 두려운 마음도 든다. 우리로 부끄럽게 하고 수치심을 갖게 한다. 그것으로 공격하여 자신을 주눅 들게 하고 남들 눈치를 보게 하여, 의기소침해지고 우물쭈물하게 한다. 이를 오늘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소하며 죄와 허물을 질책한다.
이를 스가랴가 환상으로 본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1).” 이어서 하나님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오히려 사탄을 책망하신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2-3).” 곧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었다.’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고 주께서 물으셨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표로 하는 우리 성도들을 가리킨다. 곧 우리의 삶이다.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인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4:11).” 이는 여호와의 구원이 가진 성격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표현이다. ‘불’은 당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생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곧 우리가 오늘 얽매여 사는 여러 형태의 지긋지긋한 생활이다. 육체의 질병에서부터 가난이나 사람과의 관계나 더욱 크게 하려는 사업 등을 모두 포함한다. 저마다의 자기 계획이라 하겠다. 한 마디로 먹고 사는 모든 문제다.
이스라엘은 그 ‘불’로부터 ‘불타는 막대기’로 취급받았다. 이 상황은 애굽에서 건짐을 받은 때와도 같다. 그렇듯 안 믿는 이들과 같이 살던 우리를 구원하여 믿는 성도의 반열에 세우셨으나 여전히 사는 데 급급한 현실을 아울러 회고하게 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풀무불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여호와께서 너희로 말미암아 내게 진노하사 내게 요단을 건너지 못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신 4:20).”
장차 올 환난의 때에 있을 구속을 예상하게도 한다. “슬프다 그 날이여 그와 같이 엄청난 날이 없으리라 그 날은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 그러나 그가 환난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렘 30:7).” 스가랴 역시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8-9).”
곧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하는 오늘 말씀은 매우 그 뜻하는 바가 깊고 폭넓다. ‘더러운 옷’은 수치와 비난거리가 되는 것이다. 심각한 죄의 상태를 나타낸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이런 옷을 걸친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하는 행실로 산다. 나름은 정직하고 성실하기를 바라며 산다.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고 다하며 산다. 그러나 ‘그을린 막대기 같이 초라하다.’ 오늘 여호수아의 모습은 당시에 죄와 허물로 가득한 이스라엘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하루하루가 그대로 드러난다.
‘더러운’에 해당하는 가장 간악하고 혐오스러운 성격의 더러움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중에서도 강력한 표현이다. 사탄은 바로 이처럼 정결하지 못한 우리의 상태를 문제 삼는다. 우리 양심이 때론 이를 고발한다. 찌르고 아프게 하여 자책으로 신음하게 한다. 누가 전에 교회로 오길 꺼려하며 속단하기를 자신은 동성애자라고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러했다며 ‘나 같은 자를 교회에서 정죄한다’는 이유로 단호하게 거절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저에게 나 역시 이성애자로 죄인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문제는 ‘죄’이지 죄의식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바울의 표현이 이를 내포한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5, 17).”
그러므로 우리가 모두 죄인인 것을 인정하며 주 앞에 나아가는 것이 먼저다. 다음은 주가 알아서 하신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오늘 본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은혜로 말미암은 메사야적 사역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곧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4-5).” 우리의 ‘더러운 옷’ 즉 ‘불에 그슬린 나무’ 같은 죄를 씻으신다. 그리고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히신다. 그리스도의 의다. 심지어 우리 머리에 ‘정결한 관’을 씌우신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과를 제하여 버렸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셨다. 이는 우리의 의가 아니다. ‘더러운 옷을 벗긴다’는 것은 우리가 죄악으로 인해 성도의 직분을 박탈당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아니, 그럴 자격이 없다며 자신은 동성애자라 하고, 누구는 어떤 부끄러움과 수치를 들어 고백할 때 나는 자주 인용하는 말씀이 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여기서 바울은 건축에서 측량하는 표현으로 쓰고 있는데, 그만큼 우리 죄가 아무리 크고 넓고 길고 깊다 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를 모두 능가하는 것을 알게 한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우리가 죄로 인해 직분이 박탈되고, 죄책에 시달린다 해도 ‘여호와의 선언’은 우리의 죄과를 제하여 버린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호수아는 우리의 죄를 깨끗이 하겠다는 의지가 독생자 예수까지 내어주심으로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이다. 전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며 우리가 입은 의다.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그렇게 해서 우리의 옛 사람을 벗기고 새 사람을 입히셨다. 바울의 끊임없는 설교의 핵심도 그러하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그러므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4).” 그러할 때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 택하신 자들의 죄를 완전히 사하셨다.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 6:7).” 구원과 의로 옷으로 입히셨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61:10).”
그러므로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2).” 더는 우리가 탕자로 살지 않는다.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신분이 회복되고 본래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누린다. 그리하여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 하여 더는 자책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으로 주눅 들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이 안다 해도 상관없다. 모두가 죄인이나 누구는 여전히 그 죄에 눌려 살고 누구는 그 죄를 씻고 산다. 이런 일은 메시야의 대속의 죽음으로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그렇게 하여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슥 3:5).” 우리의 죄과는 없어지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성도들로 그에 합당한 지위를 제공받는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조치로 성도인 우리는 구체적으로 의로운 모습이 나타나며, 성결하고 구별된 삶을 살기를 늘 희구한다. 그러다 이르지 못하는 것에 애통해하며 주를 구한다. 이에 오늘 말씀은 “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증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6-7).”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설령 그것이 완전하지 않다 해도 완전하다 하시는 이가 계시다.
그렇게 우리로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곧 주의 교회에서 맡은 바 그 역할을 수행한다. “내 뜰을 지킬 것이며” 주의 전을 지킬 것이다. 또한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 성도의 교제는 아름다울 것이다. 비록 서러워 울다, 부끄러움을 드러내어 속상할 할 것 같은데 같이 또 주의 이름을 부르며 찬송한다. 그렇게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8).” 우리는 ‘예표의 사람들’이다. 모두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자들이다.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 제사장을 가리키는 것이나 오늘 우리 성도들의 모습이다.
그들의 직분이 예언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도 그 이유다. 곧 우리 이야기는 단순히 이제 한 개인의 사생활이 아니다. 저의 딱하고 안 된 사연이 아니다. 각자의 이야기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쓴다. 결국 구약의 제사장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가치는 메시야를 통해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가리키는 ‘종’이라는 표현과 같이 ‘싹’이란 표현도 그렇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
다윗의 계보에서 나올 ‘새로운 싹’,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시사한다.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슥 6:12).” 할 때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1-2).” 그러므로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42:1).” 그렇게 하여,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슥 3:9).”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하시고,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하신다. 이 돌은 일차적으로 성전 건축을 위해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으로 필요한 기초석이나 모퉁잇돌을 의미한다. 문맥상 메시야를 나타내고 있다. 이에 ‘일곱 눈의 모습’은 완전한 수로 여호와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지성과 전지성을 상징한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2).” 하여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3, 9-10).”
그렇게 오늘도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신다. 궁극적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것은 복이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요,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악의 요구를 단번에 만족시키셨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7).” 그러므로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10).” 그러므로 더는 부끄러워하거나 수치심으로 괴로워할 일이 아니다. 그 노여움으로 우리가 할 일은 찬송이다.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시 44:5-6).
우리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오늘도 생의 한복판에서 씨름하게 하신다. 그때에,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7-8).
그럼에도 여전히 죄책으로 힘에 겨워할 때,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13).
하나 이를 통하여 다시 주께 간절하여 구한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17).
할 때에 다시 주 앞에 구할 용기도 얻는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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