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현. 2026. 5. 19. 05:54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 4:6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

시 45:17

 

 

사람이 자기감정을 제어하지 못할 때는 짐승과 같다. 이는 훈계를 싫어하는 것과 동일하여서,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잠 12:1).” 결국 우리의 지식 곧 올바른 판단의 기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하나님을 아는 것이란 그의 일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10).”

 

그러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 그렇게 말씀을 전하고 주의 일을 권할 때에 보면 안다. 이를 싫어하는 자를 감당하기란 밤길에 짐승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난감한 일이다. 오늘 본문에서 이를 읽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하심을 두고 말씀을 묵상한다.

 

먼저는 금 촛대의 환상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1-10). 때는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웠다.’ (1절). 스가랴는 천사가 말하고 있는 중에 잠에 빠졌다. 육신을 입고 사는 터라, 피곤은 어쩔 수 없다. 이와 같이 제자들도 변화된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곤하여 졸았다.’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눅 9:32).”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안타까운 일이다. 스가랴의 마음은 장차 보일 것과 들일 것을 주의하려 했다. 그러나 육신이 약하여 그리 되었다.

 

문제는 몸이 그런 게 아니라 마음이, 영혼이 잠이 들까봐 ‘늘 깨어 있으라.’ 하신 말씀에 주의한다. 어쩌면 스가랴는 환상의 달콤함이 그를 가라앉혀 잠들게까지 했을지 모른다. 다니엘도 ‘천사의 말소리를 들을 때에 깊이 잠들었다.’ “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단 10:9).” 이처럼 육신을 벗어나기까지는 우리의 육신은 영의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이 잠시 동안 우리를 이완시켜, 새 계시를 받기에 신선한 몸과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누가 어떤 불안과 우울로 힘들어할 때 너무 애써 그 원인과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하는 것을 잠시 두게 한다. 깊은 잠은 동시에 우리의 피로를 씻어낸다. 침울하고 불안에 힘들 때 무작정 벗어나려 허둥대기보다 그대로 맡겨, 하나님의 물결에 눕혀두는 것도 낫다. 하나님께 맡김이란 그런 것이다. 나 역시 종종 그런 마음으로 나를 두는데,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데서, ‘주가 맘대로 하시라.’ 하는 심정으로 그리한다. 자식을 대할 때도 내 맘 같지 않을 때, 누구의 일로 마음이 어려운데 저의 호응이 시원찮을 때도 나는 가만히, 내려놓는다.

 

그러다 때가 되면 주가 깨우신다. ‘그를 깨우니, 그는 놀라 마치 자는 사람이 깨어난 것 같았다.’ 하고 개운한 심령으로 주 앞에 설 수 있다.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슥 4:1).” 이처럼 우리로 하나님의 일을 알게 하고, 주목하게 해 줄 성령으로 함께 한다. 그렇게 ‘그는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신다.’ 하였던 이사야의 고백이 내 것 같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우리 안의 영은 우리를 깨워 스스로 떨쳐 일어나도록 해 주신다. 그러하기를 간구해야한다. 가령 나는 잠결에 시간을 몇 번 확인하고 도로 눈을 감고는 한다. 오늘도 서너 번은 그런 것 같다. 물론 그럴 때마다 두 마음은 싸운다. 더 자고 싶은 마음과 일어나야 한다는 마음이 말이다. 그런 날이 있고 저런 날이 있는데 때로는 억지로라도 나를 깨워 일으키는 것은 이와 같이 말씀 앞에 앉히기 위해서이다. 이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이 시간이 귀하기 때문이다. 하루 중 다른 그 어떤 시간보다 간절하게 지키려는 마음으로다. 이때마다 물으신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2-3).”

 

그렇게 물으실 때 나는 보는 것, 들은 것, 생각하는 것을 아뢴다. 내가 깨었을 때 주목하게 하시는 게 있다. 스가랴가 보는 것은 이전에 성전에 있던 것으로 ‘순금 등잔대’였다. 등잔대는 성소에 있던 것으로, 교회가 어두운 세상을 밝히게 하심 같이 하나님의 계시를 세상에 비추는 빛을 견지한다. 촛불은 하나님의 것이며, 교회는 촛대에 불과하나 순금으로 되어 있다. 순금은 교회의 큰 가치와 뛰어남을 뜻한다. 금 촛대는 그로부터 가지를 뻗어 ‘일곱 등잔’이 있었다. 많은 꽂이에 구멍이 있어 각각 빛나는 불빛이 있었다. 교회는 하나이다. 한 촛대에 속한 여러 개개의 등잔에서 빛을 낸다.

 

그리스도가 일치의 중심이고, 일곱 개의 교회들은 일곱 개의 등잔들로 표현되지 않고 ‘일곱 개의 금 촛대’로 세워졌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20).” 이 촛대는 한 주발, 또는 공동 수용기를 꼭대기에 지니고 있다. 그 안으로 기름이 끊임없이 떨어지고, 그로부터 보이지 않는 일곱 관, 혹은 통로에 의해 일곱 등잔에 보급된다. 이를 통하여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공급되는 기름으로 항상 깨끗이 빛을 낼 수 있다.

 

주발 역시 따로 사람의 보살핌이 필요 없이 기름을 공급 받았다. 왜냐하면 촛대의 양편에는 ‘두 감람나무’가 있었다. 그들은 살지고 풍성하여 스스로 끊임없이 주발 속에 기름을 부었고, 두 개의 큰 관, “다시 그에게 물어 이르되 금 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니(12)”에 의해 작은 관들 속으로 각각 등잔불이 타도록 기름을 공급했다. 곧 아무도 이 촛대를 보살피거나, 기름을 공급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사람을 기다리거나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의해 교회가 좌지우지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목사나 장로 어떤 권세 있는 자에 의해 교회의 성격이 정의되는 것은 옳은 게 아니다.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의해서이다. 즉 우리의 어떤 학설이나 이론, 기술과 노력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다. 오늘 스가랴는 이 일의 의미에 관해 물었다. 그리고 그의 미련함 때문에 주어진 꾸지람이 있다.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므로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4-5).” 이러한 대화의 의도는 하나다. 곧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심이다.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6).”

 

스가랴가 물었다.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그러자 천사가 되물었다.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이때 스가랴는 자신의 의견이나 상식으로 답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였다.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사실 이런 대화는 쉽지 않다. 대체로 다들 자기 생각을 덧붙이기 마련이다. 가령 서른여덟 해 동안에나 꼼짝 못하고 있던 병자에게 예수께서 물으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곳은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으로 물이 흔들릴 때 천사들이 목욕하러 내려온 것이라 하여 먼저 몸을 담그면 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병자들이 운집해 있던 곳이다. 하여 혼자서는 꼼짝 못하는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네 주님!’ 하면 될 것인데,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 5:6-7).”

 

우린 이처럼 쓸데없는 말들로 시간을 끈다. 요점만 말하기가 쉽지 않다. 뭘 하나 얘기하는 데 있어 그 주변 이야기부터 발단, 전개, 위기, 절정에 이르기까지 두루 거쳐 결론을 말하려 하니 군더더기 같은 말들이 시간만 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8-9).” 이럼 될 일을 뭐 그렇듯 누가 어떻고, 누구 때문에 하는 말들로 지체하는 시간이 길었다. 그렇듯 주 앞에 아뢰면 된다. 주님, 하고 우리가 부를 때 주는 벌써 다 알고 계신다. 오늘 스가랴는 알지 못하냐? 물으니 모릅니다. 하고 간단명료하게 답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자세를 함축하는 의미이다.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할 때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하는 것이 핵심이다. 말이 덧붙는 것은 미진하거나 스스로 자만하여서이다. 구구절절 그 속에 담고 사는 사연이야 제각각이겠으나, 사람의 이해를 구하려고 하는 말들은 상한 갈대에 의지하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주된 목적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모든 상황을 다 설명할 수 없더라도, 그 목적이 명백하다면 그것에 만족해야 한다. 주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하는 데는 우리의 이해보다 순종이 우선 돼야 한다. 생각이 많으면 여러 궁리들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의견을 구하게 되고 그럼 하나님의 뜻은 축소되거나 왜곡되기 십상이다.

 

잘 이해가 안 되더라도 순종하면, 도중에 모든 환난과 반대는 극복되고 제거될 것이다.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나 그리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7).” 여기서 ‘큰 산’은 도무지 불가능할 것 같은, 정복하기 어려워서 돌아가거나 피해야 할 것 같은 일들이 어느 순간 ‘평지가 되리라.’ 하심 같이 무난하였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곧이어 딸애의 결혼을 치러야 할 때 나는 극심한 불안과 우울로 자주 울었다. 평소보다 안정제도 몇 차례 더 먹기도 해야 했고, 어디론가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둘 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작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때도 새삼 느낀 것이지만 어? 하고 놀라울 정도로 견딜만했다.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우는 것이 어려워서 아들이 차를 몰로 늦은 밤과 이른 아침에 집으로 나를 실어 날랐다. 문제는 그 오가는 길조차도 평소 엄두도 못 내게 막히는 경인도속도로여서 나는 이래저래 심적인 부담이 먼저 커졌다. 그리고 한 주 후에 아이의 결혼은 더더욱 부담스러웠다. 수많은 하객을 상대하고 아이 손을 잡고 입장도 해야 하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 불안증환자에게는 최악이었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나는 주님, 하고 부르면서 그냥 임했다. 전날에 리허설도 당일에 화장부터 입장까지 모두 해야 할 것을 마다하지 않고 따랐다. 그러는 동안 내 속에는 ‘주님!’ 하고 부르는 외마디 외침이 끝도 없었다. 그때마다 신기할 정도로 무난하였다. 견딜 만 했고, 적당하였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덤덤하여 평지 같은 높은 산이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의미로 다가온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7).” 그리하고 오늘에도 이처럼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9).” 나는 나에게 허락하신 또 하루를 시작한다. 이 선한 역사를 시작한 같이 그것을 완수하시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으리라(7).’ 그리고 또한 ‘스룹바벨의 손이 이전의 지대를 놓았다(9).’ 하여 ‘그 손이 그것을 마치리라.’ 하신다. 고로 나의 하루도 같은 의미로 시작하고 끝내고, 다시 시작하며 이 자리를 지킬 때,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심으로 알 수 있다. 곧 내 이 믿음을 시작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리하여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내가 하는 게 아니고,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할 수도 없고… 나는 다만 이렇듯 나에게 맡기신 데서 주어진 일에 무던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이다. 이에 우리는 ‘은총, 은총’ 하며 소리칠 뿐이다. 이는 값없이 주시는 은총이다. 모든 영광을 시작과 끝이다. 은총은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향한 선하신 뜻이다. 그러므로 누가 감히 오늘을, 여기를, 이 일을,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겠는가?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슥 4:10).” 오늘도 말씀하신다.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14).” 주신 이가 이루실 것이다. 맡기심으로 맡으실 것이다. 그것이 설령 불안과 우울과 낙심과 실패의 연속이라 해도, 큰 산 같다 해도 평지가 되어 우리는 걸어갈 것이다. 이에,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

(시 45:1-2).

 

오늘도 이처럼 묵상을 글로 쓰면서,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4, 6).

 

그리하여,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왕의 아들들은 왕의 조상들을 계승할 것이라

왕이 그들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

(15-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