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슥 5:4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시 46:5
힘들고 어려울 때 말씀으로 위로를 받는 것이 지혜이다. 다른 그 무엇으로도 해결될 수 없으나 믿음으로는 더 좋은 것을 바랄 수 있다. 그럴 때,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시 46:10).
주를 인정하는 것이 온 마음을 주관하기를. 오늘 본문과 같이 사뭇 모든 것이 다 심판에 이를 때에 “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본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있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십 규빗이니이다(슥 5:1-2).” 우리가 눈을 든 것은 하나님을 바랄 때이다. 말씀을 구할 때도 눈을 들어 하늘을 보듯 우리는 영적으로 우준하여 주의 지혜를 구하게 된다. 이는 경건의 노력으로 주님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아무나 그럴 것 같지만 그럴 수 없다. 주변을 먼저 보고 스스로 도울 힘을 찾기 일쑤다. 우리가 이처럼 말씀을 읽고 되새기는 것은 점점 더 주님과 교제하고 주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바라는 것을 이루려는 게 아니라 주의 뜻에 참여하고자 하는 일이다.
이에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본다. 이것은 빨리 두루 돌아다니는 저주다. 두루마리의 안팎에 쓰인 것이 있다.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겔 2:9-10).” 곧 나의 지나온 날들과 앞으로의 날들이 기록되었다고 할 때 두렵고 부끄러운 일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면 움츠러들어 주눅이 들 터인데, 그럼에도 주를 바랄 수 있는 게 권능이다.
여기서 ‘그 장이 이십 규빗 이요 광이 십 규빗’이라고 하는데, 이는 성소의 면적과도 같다.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출 26:1).” 그 면적이 이렇게 성소와 같은 이유는 거기 쓰인 저주를 받을 자들이 성소에 나타나는 하나님 백성에게서 끓어지겠기 때문이다. 또한 성소의 회개와 용서로 포용할 수도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자주 묵상하지만 예수의 사랑은 충만하여서 이를 건축자의 용어로 설명해도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능히 우리의 그 어떤 죄도 다 수용하고 남음이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계시를 우리에게 주시는 목적은, 당시 성전 재건에 있어 원수들의 방해로 낙심하였던 것을 이제 다시 착수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온 땅의 백성들의 죄악을 하나하나 다 벌하시리라는 것은 하나님 백성으로 하여금 주를 더 가까이 하게 하려는 것이다. 심판이 벌하여 응징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이를 보고 믿는 자들은 각성한다. 돌이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용기를 낸다. 지옥이 있는 것은 지옥에 갈 사람을 처벌하는 데 목적이 아니라 이를 두려워하는 자로 천국을 더욱 사모하게 하려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종교심이 있다. 저마다 무얼 빌고 바라고 원하여 그 안에 신을 둔다. 스스로 무교라고 하는 자도 자신보다 우월한, 인간 이상의 존재에게 빈다. 자연 앞에서나 촛불 앞에서도 소원을 빈다. 훗날 그 누구도 하나님을 몰랐다고 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그러므로 타종교인도 다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1-23).”
오늘 본문은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환상(1-4)과 ‘에바’의 이상(5-11)이 나온다. 스가랴에 의하면 지금까지는 깨어날 필요가 없었다.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4:1).” 그러나 그 때 깬 후에 그는 계속 깨어 있었다. 이제 그는 그 주위를 돌아보라는 부름을 들을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 그 자신에 의해 ‘돌아, 눈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듯 우리는 가끔 우리의 약함에 의해 일깨워진다. 어려움과 어떤 고난으로 더욱 주의하고 신중하게 된다.
그럼 오늘 스가랴가 보는 것은 ‘날아가는 두루마리’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던’ 것이다(겔 2:9-10). 율법이 확실히 기록되어 영속성을 갖는 것처럼 ‘저주’도 그 기록이 명시되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죄인들에 대한 통렬한 기록이다. ‘내가 기록할 것을 기록하였고, 기록된 것은 남는다.’ 천사는 스가랴의 주의를 모으고, 그것을 설명하려 한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고 묻는 것도 그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대해 설명한다.
구약과 신약의 경전들은 ‘두루마리들’로 구성되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복음과 율법의 크신 일들이 기록되었다. 그리스도는 이 두루마리들의 주인이다. 그들은 큰 두루마리들로, 그 안에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들은 ‘날아가는 두루마리들’이다. 공중에 날아가며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계 14:6).” 그렇듯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속히, 달린다.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시 147:15).
이 두루마리들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자는 먼저 본 것을 말하고 스스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야 한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너는 어떻게 읽는가? 그것을 나에게 말하라. 그러면 너는 네가 읽는 것을 이해하게 되리라.’ 하심과 같다. 그것이 어떻게 설명되었는가?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3-4).”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하심으로 두려움이 든다. ‘두루마리의 저주’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을 모욕하고, 도적질하여 이웃의 소유에 침입하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의 선포다. ‘믿는 자들로 떨며 그의 나라에 대한 축복을 기뻐하도록 하라.’ 하심을 역설한다. 만일 그가 맹세하고, 도적질하고, 어떤 죄의 과정에 산다면 그는 눈으로 그들을 볼 것이나 그들의 위로는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에게 저주가 발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사악하다면’ 이 모든 것을 인해 ‘나에게 화가 된다.’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곧 이 저주의 정도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 즉 온 지면에 두루 행한다. 그러니 그들의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에 반하여 범죄한 자들은 비록 그들이 율법 책을 가지지 않았다 해도, 오직 그 율법에 의해 심판되리라는 것을 모든 인류는 알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몰랐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죄인들이 어디 있든 간에, 전 지면의 어느 곳이든지 ‘두루마리의 저주’가 그들을 찾아 붙잡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심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았다. 나음을 입었다. 이를 믿음으로 또한 이와 같은 두루마리의 저주도 두려워할 줄 안다! 점점 더 다양하게 죄로 가득 차는 세상에서 이와 같은 저주와 그에 따른 우리의 은혜로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도둑들은 매우 비난받던 죄였다. 이는 하나님의 것을 훔쳐가는 자들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말 3:8).” 헌물은 물론 자신의 시간과 건강과 마음과 모든 사랑의 마음까지도 주께 향해야 하는 것을 세상으로 돌린 것을 포괄적으로 내포한다.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느 13:10).”
이 신성 모독은 의심할 바 없이 도적질 중에 최악의 것이다. 지혜도 이르길 “부모의 물건을 도둑질하고서도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 받게 하는 자의 동류니라(잠 28:24).” 흔히 가족이란 이름으로 자식이 부모 것을 부모가 자식 것을 함부로 여겨 가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욱이 부모 된 자로 자식의 인격과 그의 판단을 흐려지게 하는 것은 모두 도둑질하는 것이다. 부모를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것 역시 도둑질이다. 이는 ‘멸망 받게 하는 자의 동류’다. 제 8계명에서도 ‘도둑질하지 말라’ 하심인데 거기에 부가된 형벌이 여기 ‘두루마리의 저주’다.
또한 ‘맹세자들’이 나오는데, 이 부류의 죄인은 경솔하고 속되게 맹세하는 자이다. 거짓 맹세하는 자도 같은 의미다. 거짓 맹세에 의한 저주는 그 자신에게서 기원하는 셈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원에 ‘아멘’이라 하시고 그것을 그 자신의 머리 위로 돌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의식적으로도 항상 진실에 따르는 하나님에게 자기의 거짓을 인정해 달라고 해야 한다. 알고 모르고 짓는 거짓이 너무 많다. 이 저주의 실효성과 그 공정함은 ‘내가 이것을 발하였다고 만군의 여호와가 말씀하셨다.’는 선언으로 이어졌다. 오늘 여기 명령을 내리셨고, 그것을 착수하도록 하셨다. 그는 힘 있게 그것을 발하시며, 그것이 행할 집행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다.
이 저주의 효력은 무섭다. ‘도적질하는 자는 끊어지리니’ 개혁되지 않고 멸망될 것이다.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진다. 하나님의 저주는 끊는 것이요, 죽이는 것이다. 그는 ‘이편에서’ 끊어질 것이며 저편에는 저주와 심판뿐이다. 도둑질하고, 맹세한 자는 이편으로부터 끊어진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서 끊어내신다. 거룩한 성읍이 거룩하지 않은 자들에게 보호처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날이 곧 이를 것이다. 또한 그의 가족 위에도 이어진다. ‘그것은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리라.’ 하심인데, 하나님의 저주는 문을 부수고, 경고와 함께 임하여 그 집, 일가를 모두 포함시킨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4).”
이는 그, 자신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다!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 28:17-19).” 곧 악인의 집에는 저주가 있다.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잠 3:33).” 그것은 그의 집을 엄습하거나 문 앞에 설 뿐만 아니라 ‘그 집에 머무를 것이며’ 그 악한 영향을 집안 모든 식구에게 퍼뜨릴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의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의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욥 18:15).” 하는 것이다. 회개하고 돌이켜 주 앞에 바로 서지 않으면 ‘그 집의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를 것이라’ 하심 같이 예외가 없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합 2:11).”
보면 아이의 어떤 문제가 부모와 상관없는 게 없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아이의 성품이나 기질이 고스란히 그 부모의 것에서 이어지는 것을 느낀다. 모두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대체로 그런 것은 앞서도 언급한 바, 그 부모가 자신들의 처지에서 자식의 것을 도둑질한 까닭이다. 그럼 자식들은 예외로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텐데, 대체로 그것을 부모나 자신보다 더 약한 자에게서 도둑질하여 충당한다. 학교 폭력의 경우 아이의 강퍅함이 대부분 가정의 결핍이나 부모의 폭력 또는 방관과 무관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나는 사실 이런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은 나로, 자녀들로 돌이켜 주의 은혜로 도우셨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의 에바의 이상(5-11)은 이전의 환상이 나름은 분명하고 쉬웠다면 이 환상 안에는 ‘어둡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에 따라 행해진 이것보다 더 큰 황폐를 보리라는 말이다. 즉 ‘도적과 맹세자들’의 집을 사르는 저주의 힘과 공포를 숙고하고, “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그가 이르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이니라 하시고 또 이르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6).” 앞서 온 세상 지면 위에 나는 ‘두루마리의 저주’에 이어, 곡식을 되는 도량 형기인 ‘에바’를 본다. 에바는 ‘10오멜’ 들이며(출 16:36), ‘호멜’의 10분의 1에 해당한다(겔 45:11). 이것은 상업에 사용되는 어떤 도량형기로 사용되었다(신 25:14). 그리고 이는 그들의 모양이니, 즉 유대가 흩어졌든지 어쩌든지 ‘온 세상에 퍼진 유대’를 담아 모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정한 죄악의 그릇을 채우고 있다. 그것이 가득할 때, 알곡의 에바처럼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 때문에 넘겨질 것이다. 알곡의 ‘에바’로 측량하듯 저들의 죄를 달아 멸망으로 측정할 것이다.
이는 온 땅을 통해 그들의 정해진 한계가 있고, 그들은 급히 그것을 채우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마 23:32).” 하심도 그런 맥락이다. 곧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살전 2:16).” 이를 각각의 정해진 에바가 차기까지 그럴 것인데, ‘에바 가운데 앉은 한 여인’이 있다. ‘저울로 산을 다시고, 천칭으로 작은 산을 재시는 분은 에바에서처럼 민족들과 교회들을 재신다.’ 그처럼 그는 그들을 재판하는데 있어 정확하시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당의 곡식’으로 비유된 것도 그 때문이다. “내가 짓밟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너희에게 전하였노라(사 21:10).”
천사는 ‘에바 가운데 있는 여인에 대해’ 말한다.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니 그 때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슥 5:7).” 이에 선지자들은 탄식하였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3).” 즉 ‘여인이 에바 속으로 던져지고, 무거운 납 조각이 그 아구리 위에 던져져 그것 때문에 그녀가 붙잡혀 에바 속에 꽉 갇혀졌다.’ 이는 ‘전혀 나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곧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이와 같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밖에 없다. 더는 가망이 없는 영혼들에 대하여 회개도 촉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오늘 날 우리 심령이 ‘에바 속의 여인처럼 저주 아래 닫혀져 있지는 않은지?’ 도무지 뭐라 말해도 듣지 않는 영혼에 대하여는,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눅 10:11).”
이는 동시에 두렵고 떨리는 일이기도 하다. 저들은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살전 2:15-16).” 이는 악이며, 이는 점점 더 세상으로 퍼져서 모두들 안이하고 나태하며 태평하다. 하늘은 악한 천사들을 내던졌고, 땅은 악한 가나안인들-유대민족을 내뱉었다.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하니 그가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것이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슥 5:10-11).” 즉 악에 고착되어 사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시날 땅으로 가서 집을 지으려 한다’는 것은 최종적 분산이다. 자신의 나라 밖으로 급히 쫓겨나, 바람이 날려 버리는 쭉정이 같이 바벨론에서 70년 간 체류하고도 ‘자기 에바’를 짓고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이에 두렵고 더 떨리는 마음으로 주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시 46:1-3).
이를 보면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7).
하는 것으로 안도한다. 주를 더욱 사모함은,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9).
그리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10-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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