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하현. 2026. 5. 22. 05:52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슥 7:13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 48:14

 

 

네 가지 병거의 환상을 보고 난 후 2년이 지났다. 다리오 왕 4년 9월, 스가랴는 학개 선지자가 다리오 왕 제 6년에 성전이 마칠 때까지 계속 예언했다고 명백히 했다.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학 1:1).” 그동안 기록으로 남는 어떤 설교도 남기지 않았다. 이 물음을 가진 자들이 사레셀과 레겜멜렉이니 유력한 지위와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슥 7:2-3).” 저들은 하나님의 집의 수종자들로 의무를 다하고 명령을 받는다.

 

다리오 왕 사년 구월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였다. 다리오는 바사 왕으로 고레스의 장인 다리오가 아니고,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다리오이다. 여기 ‘기슬래월’은 유대 력으로 9월이다. 그것은 양력 11월에 해당한다. 그 달 4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였다. 다시 하나님의 계시가 임한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이처럼 일자까지 자세히 기록하였다. 곧 하나님의 계시는 선지자에게 임할 때에 막연하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전달하는 선지자도 막연하게 말하지 않는다. 분명치 않은 사상으로 전달되는 내용이 아닌 것이다.

 

그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였다. 벧엘 사람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벧엘 사람인데, “벧엘과 아이 사람이 이백이십삼 명이요(에스라 2:28).”에서 ‘벧엘과 아이 사람이 223명이나 돌아왔다’고 한다. 여기 벧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으로 여기서 바벨론에 아직 머물러있는 유대인들,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 수종자을 유대 성전에 보내어 금식 문제를 물어본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사레셀’은 앗수르 식의 이름으로, 아마 그가 바벨론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받은 것 같다. 그리고 ‘레겜멜렉’은 팔레스타인에 속하는 이름으로 팔레스타인 출생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의 수종자들이 따랐다.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려 한다는 것은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슥 7:3).” 곧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금식 문제에 대한 여호와의 해답을 구함이다.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 되었던 동안에 선지자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시 74:9).

 

이러한 암흑기를 지나 바벨론에서 해방되는 때에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된 것은 가장 큰 위로의 은혜였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큰 은혜이다. 이와 같은 말씀으로 우리가 산다. 제 오월에 성전 훼파 사건을 기억하여 바벨론에서 애통하며 금식한 사실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이 이제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성전을 재건하는 중에 있으니, 아직 바벨론에 머물러 있는 자들로서 그 같은 금식을 앞으로도 계속 하여야 할지 문제였다.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해방의 은혜를 받아 순종하지 않고 즉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거기 머물러 앉아서 이런 ‘금식 문제’ 같은 것을 가지고 논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순종하는 것보다 규례를 숭상하고 치중하는 데 있어 더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었다. 이것을 보면 신앙을 ‘종교 생활’로 여겨 주일을 지키고 말씀을 읽거나 기도하는 일을 마치 수행해야 하는 의무처럼 여겨 형식적으로라도 이행하려는 것과 같다. 이에,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5-6).” 하고 주가 물으신다.

 

곧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하신다. 곧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이른바 금식 문제에 대해 유대 민족 전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려 하신다. 잘못된 생각은 외부적 의식 문제를 영적 생명이나 하나님의 도덕적 의지보다 중대시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사리의 경중을 구분할 줄 모르는 잘못이었다. 사리의 경중을 구분하지 않고 경미한 것을 취하느라 중대한 것을 희생 시키는 어리석은 일이었다.

 

주께서 종교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화두를 던지시는 것이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구분하지 아니하고 행동하는 자들을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하심도 그런 맥락이다.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 23:24).” 즉 ‘오월과 칠월에 행한 금식’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성전 훼파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바벨론에 잡혀 간 유대인 포로들이 금식한 것이다. ‘칠월 금식’은 바벨론 군대로 말미암아 유대 총독 그달리야와 및 유대 땅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이 살해된 사건을 기억하느라고 금식한 것이다(왕하 25:25- 26, 렘 41:1).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면서 이런 금식일을 정하고 기억하려 했던 것은 그 나름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며 기도하기보다 다만 저들이 민족적으로 당하였던 일을 슬퍼하여 그 금식을 통해 비애를 표시하고 잊지 않기 위한 일일 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금식을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공로’와 같이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 종류의 금식은 실제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금식은 공로도 아니다. 그 누구의 비참한 처지를 애처롭게 여겨 동정하는 행위도 아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와 통회의 기도이다. 어디까지나 자기의 욕구를 억제하기까지 간절함을 표할 뿐이다. 금식 자체가 성스러운 게 아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이를 지적하신다. 그리고 물으시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한 것이냐?’ 두 번씩이나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라고 되물으시는 것은 금식 자체가 주님을 위하는 게 아닌 것을 확실하게 강조하시는 것이다. 곧 금식을 하는 자체는 주 앞에 스스로를 억지하고 어떤 욕구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으로 집중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도덕적 의지에 대한 순종이라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향한 어떤 공로도 의도 아니다. 진정한 종교 생활의 표시가 아니라 그 마음의 내용이라야 한다. 그런 그것을 공로로 내세운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 아니다.

 

헌금도 예배도 그 어떤 기도 형식도 모두가 같다. 마치 주일을 지키는 것으로 또는 어디에 얼마를 선교하고 후원하는 일을 자신의 의로 간주하면 그것은 이미 어긋난 섬김이다. 친구가 이번 여름은 아프리카 우간다로 선교를 간다고 하였다. 매년 그렇듯 후원하는 교회를 직접들 가서 둘러보고 돕고 오는데, 이번에도 좀 의아하게 들었다. 굳이 꼭 그래야 할까? 하는 생각은 각자의 항공료만 3백만 원으로 스무 시간을 넘게 가야한다. 또 무슨 국립공원 사파리를 하는데도 돈이 많이 들고, 이를 선교사가 가이드 하여 비포장 도로를 왕복 12시간을 달려서 다녀와야 한다.

 

그야말로 겸사겸사 그런 행사를 매년 하는 것인데 특히 이번에는 안수집사나 장로로 피택된 자들은 필히 참석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 취지는 알겠는데 ‘굳이 꼭 그럴 거까지 있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대놓고 뭐라 내 의견을 말할 수는 없었지만 차라리 그 돈을 모으면 수천만 원으로 되레 선교지에서 더 유용하게 쓰일 텐데, 하는 생각은 참 어리석었나? 저도 하는 말이 관광 겸 선교지 탐방 겸 현지에서 필요한 것을 도울 겸, 겸사겸사…. 모르겠다, 나는. 오늘 말씀이 중첩되는 까닭도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저들이 금식에 대해 물을 때 하나님의 질문도 그런 의미로 들린다(6).

 

‘금과 은’과 함께 파송되지 않았다! “사로잡힌 자 가운데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갔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받되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슥 6:10-11).” 그런 와중에도 의식과 예복을 갖춰 입었던 것처럼 우리는 너무 형식과 절차에 얽매이고 여기에 의미를 두어 연연하는 것이 옳기는 한 것일까? 오늘 저들은 하나님과 중재하여 주의 긍휼을 힘입으려고 왔다.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구하려고’ 또는 ‘희생 제물을 바치려고’ 왔다. 저들은 포로기간 중에도 성전을 향해 기도했다(단 6:10). 이제 그 성전이 재건되고 그들은 성전 안에서 기도할 대표를 보내었는데, 금식에 대해 물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요구를 진정할 때 그것이 그로부터의 교훈인지를 들으려는 의도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주일을 무시하고 예배를 자기들 마음대로 내키는 대로 드려서는 안 된다. 기도도 금식도 마찬지로 없애거나 안 해도 된다는 게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용납되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도 자신을 돌아보아 성결을 다짐해야 한다. 우리의 일생에서 모든 날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며, 주여! 나를 위해 도우소서, 하고 구해야 한다. 소망하는 게 나쁜 것이 아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하는 찬송과 기도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늘 본문에서 저들은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이 경우에 있어 그들과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하려고 했다. 하나님께서 다양한 은사를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모두가 그것을 유익하게 쓰도록 하셨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것을 이용해야 한다. 금식도 은사고 기도도 은사다. 말씀 이해와 이를 전하는 일도 은사다. 누구를 섬기는 것도 은사고 교회의 허드렛일을 하는 것도 은사다. 귀천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저마다의 더 좋은 것을 한다. 이는 서열을 나누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인식이 다르다. 금식이나 방언 등을 안 하면 성령을 못 받은 자로 취급한다. 말씀 전하는 자를 우선으로 높인다. 상대적으로 봉사하고 청소하는 일을 하찮게 본다. 과연 그러한가?

 

‘만유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높이고 그 앞에 영광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림’이나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으며(삼상 28:6)” 이것이 막힐 때, 사울은 두려워했다. 우리는 각각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서로를 질투하지 않았고, 그들 가운데 어떤 차이를 두지 않았다. 백성들은 그들 사이에 차이를 만들지 않았고, 그들 모두가 소유한 것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였다.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하고 손뼉을 치며 찬송하였다. 서로가 각자 그리하여야 했고 그러는 게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어야 했다.

 

그렇게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를 깨뜨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말 2:7-8).” 서로의 반목과 질투는 같은 결과를 낳는다.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슥 7:12).”

 

곧 형식적으로 또는 어떤 관습과 규례에 얽매여서 정작 그 의미는 훼손되고 형식만 남아서 그 자체로 또 다른 의미가 주어졌다. 이를 주님은 매우 악하게 보셨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16).” 어찌 그런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1-2)).” 하신데 대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

 

휴가철 여름에 어디 관광 가듯 선교지로 나가서, 현지 선교사는 또 그들의 후원을 얻기 위해서도 현지보고서는 물론 그렇듯 방문하는 이들에게 보이려고 애쓰며 심지어는 꽤 큰 비용을 부담하면서까지 사파리를 가야 한다니! 옳고 그름을 떠나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 그냥 듣기만 했다. 내 의견이 중요한 것은 아니겠으나, 주님의 말씀으로 대신하면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3-4).” 그걸 그렇게 후원하는 교회로서 당연히 그런 행사를 해야 한다는 게…….

 

결과적으로는 고의적인 불순종이 문제다(8-14). 오늘 본문은 이를 지적하는데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13).” 이보다 두려운 결과가 또 있을까? 부름에 대한 그들의 선조들의 불순종과 그 결과로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다시 또 이를 반복한다는 게 어이없다. 사람들의 해로움은 우리의 경고가 되어야 한다. 누구의 불행이 단순한 게 아니다. 하나님의 확성기고 시청각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충고가 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오늘도 이와 같은 말씀에서 금식이 문제가 아니라 그 행위가, 형식이 어떠하였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공평하게 정의(재판)를 집행해야 하고, 이웃들은 서로 온유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서로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하고 힘이 닿는 데까지 선한 직임을 행해야 한다. 우리 주변의 어떤 어려운 일을 겪는 사람을 볼 때, 혹은 자신이 그 일을 겪을 때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긍휼과 동정을 표시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환난을 이해하고 중보해야 한다.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강퍅함과 불순종을 멀리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떠한지?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시 58:4-5).

 

간혹 보면 사람들은 너무 야비하다. 모 제품 광고에서 상대의 아픔을 비하하며 조롱하여 이벤트 행사를 했다가 뭇매를 맞고 있다. 실은 우리 속에 저마다 그런 속성이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오늘도 주 앞에 엎으려 기도한다.

 

거기서 떨림이 그들을 사로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도다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로다 (셀라)

(시 48:6, 8).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9-10).

 

이에,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