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하현. 2026. 5. 23. 05:37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슥 8:3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 49:20

 

 

소망의 기쁜 소식이 전해진다(1-8). 본래 아름다운 그 나라의 황폐함에 대하여 음울한 관망을 남겨두었었다. 이것은 그들의 선조들이 불순종한 결과였다. 그러나 절망으로 몰고 가려는 것이 아니라 회개로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 앞에 하나님의 섭리는 금식과 애통이 변하여 기쁨과 찬송이 되게 하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나타나실 것이며, 예루살렘의 상황을 지지하고 변호하실 것이다. 이를 위해 시온의 원수들을 보복하실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2).”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3).” 저는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밝힌다. 이 축복의 약속이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다는 의미에서 첫 구절부터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인 것을 확실하게 하고 시작한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1).” ‘만군의 여호와’라는 성호는 ‘별들의무리의 하나님’이라는 해석도 있고, ‘군대의 하나님’이라는 해석도 있다. 왕 되신 우리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어 이 일의 발단은 ‘질투’에서이다. 히브리 원어로 질투는 시기를 의미한다기보다 ‘사랑하는 자를 보호하기 위한 뜨거운 관심’을 가리킨다. 흔히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는 데 있어 이와 같은 관심과 감정이 일지 않으면 그것이 더 이상하다. 누가 좋을 때, 그를 사랑하면 할수록 ‘분노함으로 질투’하는 듯이 자신만이 그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곧 하나님도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적’에 대하여 분노하시고 질투하시는 것은 마땅하다. 사랑하는 백성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질투’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동시에 죄는 미워하시는 마음이다. 상대적으로 마귀의 질투는 죄를 사랑하면서 사람은 미워하는 것으로 악하다.

 

이에 ‘내가 시온을 위하여, 혹은 시온을 질투하였다.’ 곧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7:12).” 하여 이 보복을 원수들에게 돌리신다.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 크게 질투하며, 더 이상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하나님은 참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시온에 거하실 것을 천명하신다(3). 그렇게 ‘내가 시온에 돌아왔으니, 오랫동안 멀리 서 있는 듯한 후에 내가 다시 이전처럼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라.’ 하시는 것이다.

 

비록 신실한 성읍이 창기가 되었으나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사 1:21).” 다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신실한 성읍이 되게 하실 것이라 하신다. 이제 하나님에 의해 정화된 성산이 될 것이고 더는 멸망의 산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또 예루살렘 앞 멸망의 산 오른쪽에 세운 산당들을 왕이 더럽게 하였으니 이는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을 위하여 세웠던 것이며(왕하 23:13).”

 

그리하여 하나님의 성읍은 ‘진리의 성읍’이 되어야 마땅하다.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 되어야 한다.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경건과 정직의 예로 온 세상에 퍼져야 한다. 더는 전쟁이나 기근이 없고 역병에 의해 강제로 밀려나지 않을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4-5).” 곧 예전과 사뭇 다른 변화를 볼 것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어제는 아이와 에베소서를 같이 읽었다. 수요일, 금요일, 오전에 출근했다가 점심 때 퇴근하여 집에 들렀다가 오후 두시 반에 아이가 온다. 그러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아이는 순종하였다. 우리는 서둘지 않고 에베소서 2장 한 단락을 읽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1).” 하는 부분에서 서로가 크게 공감하고 아멘, 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2-3).” 더는 예전에 나는 없다. 오늘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것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8-9).” 이를 믿고 인정함으로, 느낄 수도 있고 확신하기도 한다. 남들이 보기에 그 처지는 약하고 하찮은 듯하나 그 누구보다 주 앞에 은혜를 입었다. 아이도 많이 변했고 나 역시 그런 아이로 기뻐한다. 얼추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 아이의 가장 큰 장점은 순종이었다. 더러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고 낮은 지능으로 저 역시 어려워할 때도 있지만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은 그리하여 주를 더욱 사랑하는 것이었다. 많이 변했으나 동시에 그 속의 기질은 늘 따라붙어서 이를 두고 아이는 씨름할 때도 있다.

 

이에 오늘 본문이 주는 희망으로, 비록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져서 모든 사람이 각기 손에 쟁기를 놓고 지팡이를 잡을 것이나, 야곱과 같이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 11:21).” 곧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하심을 몸소 체험하고 경배하게 된다. 기쁨을 가지고 일어나고 이어지는 세대를 볼 수 있다. ‘그 성읍 거리에 어린이들이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하신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심이 현실로 증명된다. 앞서 살았던 날들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불의와 벗 삼아 살았으나,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2:19-20).”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이가 어떠한지를 알 것이다. ‘이 일이 주변의 남은 백성의 눈에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이하겠느냐?’ 하고 물으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6).” 아이와 나는 둘이 같이 성경을 읽고 설명을 하는 동안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을 올렸다.

 

그리하여 베푸실 은혜가 어떠한지 오늘 본문도 제시한다(9-17).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해 그의 긍휼하심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갖게 하신다. 이전에 확신하지 못했던 일을 먼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게 하심을 알리신다. 신실하게 성전에 지원했던 자들의 마음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있었던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날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9).” 곧 우리의 손을 견고히 하실 것이다. 그 손은 하나님을 위한 일에 분주할 것이다. 선지자들의 입의 말, 곧 말씀을 듣게 하신다. 이전에 그들에게 보내졌던 것을 이루신다. ‘너희에게 이 위로의 말씀이 보내졌다.’ 하시는 것도 그것이다.

 

이제까지의 낙담들이 무엇인가? “이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원수로 말미암아 평안히 출입하지 못하였으나 내가 모든 사람을 서로 풀어 주게 하였느니라(10).” 곧 사람 구실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아서 서로의 짐이 되고 스스로는 자괴감으로 괴로웠던 가운데, 곧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던 것 같이 더러는 어디 가서 사람 대접도 못 받고 지냈던 서러움도 있다. 그렇게 ‘땅의 소산은 빈약했다.’ 남들이 버는 것에 비하면 아이의 월급이란 게 용돈도 못 될 정도이다. 그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한다. 이번 스승의 날을 전후해서 스승의 날 감사헌금을 드린 이는 아이뿐이다. 이번에 같이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자발적으로 감사헌금을 드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아이의 마음에 주가 갑절로 갚아주시기를.

 

그리하여 모든 선한 일들을 풍부하게 경험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옛날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곧 평강의 씨앗을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11-12).” 이렇게 주께 향해 ‘뿌려진 씨앗은 번식할 것이다.’ 큰 수확을 거둘 것이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는 마음의 기쁨이 될 것이다. ‘땅이 산물을 낼 것이다.’ 이는 마음을 강건하게 할 것이다. 필요를 위해, 기쁨을 위해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는 ‘하늘이 이슬을 내림 같을 것이다.’

 

다들 먹고 사는 게 일이라, 이는 본래 죄의 결과이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그러나 그 일이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아서 저주 받은 땅에서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18-19).” 죽을 때까지 사람의 숙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늘 넉넉하고 모자람이 없이 주가 채우시는 은총으로 사는 자들도 있다. 그 정도와 금액으로 사람들은 서로 평가하겠으나 지지고 볶고 사는 쪽은 우리가 아니다.

 

어떤 일로 집 주인이 감정이 상해서 우리는 내년 계약 기간까지 더는 건드리지 않고 살기로 했다. 저는 현재의 것 외에도 여러 채가 있는가, 스스로 떵떵거리며 자랑하였다. 그런 이가 복비 백 여 만원을 못 내겠다며 골을 부리고 있다. 스스로 감정이 상한 것이라, 중간에 어느 부동산에서 어떤 말을 듣고 감정이 어디서 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모두를 하대하고 함부로 구는 것을 들으며 안 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 ‘돈 많은 거지’가 내 주위에 여럿 있다. 남부러울 게 없을 것 같은데 돈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을 보면 하나도 부럽지가 않다. 이리저리 돌려쓰는 돈이 많아서 그런가, 어디에 투자하여 그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해서 그런가, 보면 늘 동분서주하고 바쁜데 그의 관심은 온통 돈돈거린다.

 

상대적으로 우리의 평안함이 크게 느껴졌다. 아이도 이를 들으며 감사하였다. 다들 사는 게 고역이라,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잠 28:3).” 보면 큰소리는 저가 치는데 늘 속 시끄러운 것도 그쪽이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그런 현상 가운데서 우리는 이상하게도 차고 넘친다. 즉 “그 때에는 이십 고르 곡식 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고르를 길으러 이른즉 이십 고르뿐이었었느니라(학 2:16).” 다들 손해가 극심한데,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19).” 우리만 누리는 복이 있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선을 행하시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곧 평강의 씨앗을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슥 8:12).” 정작 가진 게 없고 늘 부족하여 근심과 걱정으로 시름시름 앓는 게 일일 것 같은데, “이제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니라(15).” 이는 모든 위로가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이를 알면 오늘의 고통이 잠시뿐이라는 데서 안도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있었던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날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9).” 다들 현실을 운운하며 사는 데 급급하여 사느라 죽어라 하고 살아서 지옥 같다고들 하는데,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인 가운데에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가 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13).” 오히려 이러한 때에 손을 견고히 하게 하신다. 즉 ‘두려워 말지니,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하시는 것이다. 이에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이는 우리가 약하나 서로에게는 지체라.

 

우리가 서로 지체됨은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1:22-23).” 하여 오늘 본문은 끝으로 우리가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며 이를 준비하는 날을 산다고 강조한다(18-23). 오늘의 금식에 행복한 종말이 올 것이다. 더 이상 금식할 이유가 없고 감사의 날들로 전환될 것이다(19). 교회에 증가도 따를 것이다(20-23). 각 나라와 각 족속에서 나온 자들이 발견될 것이다.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10).”

 

모두가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러 올 것이다. “이 성읍 주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슥 8:21).” 이것이 거듭하여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22).” 그때가 이르리니,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 55:14, 42:41, 22:1).

 

하여 오늘도,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49:1-3).

 

그러므로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6-8).

 

스스로는 감당이 안 되는 것으로 다들 힘에 겨울 때,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12-13).

 

그때에,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15-16).

 

결국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