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슥 9:16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시 50:7
오늘 말씀은 모든 민족을 향한다. 인근 이방국에 대한 예언이다. 앞 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은혜와 약속을 살핀 후, 이제 그들을 증오했던 자들 곧 주변국들을 위한 심판을 보이신다. 아람은 이스라엘에 대해 악한 이웃이었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변론하게 되었다. 여호와의 말씀은 ‘하드락 땅에서’ 즉 수리아 땅에서의 경고이다. 그 왕국의 수도인 다메섹에 이 경고가 머물렀다. “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봄이니라(1).”
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에 임하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이는 경고다. 이는 아주 망하게 될 것을 가리키는 무서운 말씀이다. 하드락은 수리아를 가리킨다. 다메섹도 수리아에 속한다. 이 경고가 거기에 머무른다 함은, 수리아가 아주 망하기까지 그 경고의 내용이 실시될 것을 암시한다. 그때에 ‘세상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본다.’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세상은 두려워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회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 수리아와 이방나라들을 멸망시키게 된다. 세상 사람이란 모든 다른 나라를 가리키는데, 수리아와 같은 이스라엘의 적국들이 멸망하는 동시에 장차 복음이 전파되어 이방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올 것을 예언한다. 역사적으로 수리아의 멸망은 두로와 시돈과 불레셋과 함께 주전 332년 경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말미암아 실현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위에 그의 진노를 머물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 표적을 만드는 자들을 향해 날아갈 것이다.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표현을 “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13).” 하심으로 알리셨다. 이것은 그 전쟁의 힘이 여호와께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힘을 주어 골리앗을 이기게 한 것 같이, 미약한 자들에게 힘을 주어 승전하게 하신다. 가령 기드온 사사는 삼백 명을 통하여 미디아의 큰 군대를 이긴 것과 같다. 이렇듯 “그 접경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에도 임하리니 그들이 매우 지혜로움이니라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도다(2-3).” 죄를 쌓아 표적이 되는 세계를 겨누신다.
그 접경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은 넓은 지혜가 있으니, 그들에게도 임하리라는 것이다. 그런 중에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정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은즉 주께서 그를 쫓아내시며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실 것이고, 그가 불에 삼켜질 것이다. 하맛에 대한 멸망 경고다. 하맛도 멸망에 속한 지방으로 안디옥을 가리킨다. 두로와 시돈에 대한 멸망도 경고로 주었다. 두 도시는 베니게에 속한다. 두로는 비록 작은 섬이지만 높은 성으로 방위되어 있어서 앗수로의 살만에셀 왕이 5년 동안 아무 성공도 없이 포위하였던 일이 있다. 느부갓네살은 13년 동안 그것을 포위하였으나 정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후에 오늘 이 예언대로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였다. 두로가 보장을 건축하였다는 것은 요새를 건축하였다는 뜻이다. 두로는 해상 무역을 통해 많은 재물을 모았고 그만한 권세를 잡았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므로 필경은 멸망하고 말았다. 두로가 멸망할 때 6, 7천 명이 학살당했고, 2천명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3만 명이 노예로 팔려갔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재물과 지형을 믿었던 자들의 비참한 결말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성경의 예언을 이루어왔다. 그렇게 “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서 그들의 화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 남방 회오리바람을 타고 가실 것이라(14).”
이는 곧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위하여 친히 그 권능으로 전재하여주실 것을 비유한다. 하나님의 위엄을 묘사하기 위해 여기서 그의 동작이 ‘번개’, ‘회리바람’ 같은 현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나팔을 분다고 한 것은 그 원수들을 두렵게 한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대종말에 주님께서 재림하시며 원수를 남김없이 정복 하실 위세를 암시한다. 하나님의 행동은 부분적으로 나타난 것이든지 전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든지 그 성질과 이법은 동일하다. 그리하여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15).” 곧 원수들에게 대한 유대인의 승리를 진술하고 있다. 원수를 삼킨다. 물맷돌을 밟는 것은 원수들의 사격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전격하여 용이하게 승리를 거둘 것을 가리킨다. 피를 마심은 승리를 비유한다. 저들이 즐거이 부른다는 승리 표시는 방종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 사회의 방종과 야비한 속성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으로 고통스러웠고 슬픈 일을 두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조롱한다. 이를 기회로 상술로 삼아 장사한다. 그에 따른 이윤을 내서 뭘 더 얼마나 호의호식하며 사는지는 모르겠으나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백성들을 땅 위에서, 이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승리를 보이실 것이다. 우리의 영적 승리는 유복하다. 작은 표본으로 어떤 세상일에 있어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그건 경건하게 싸워 나가는 중에 하나님의 축복으로 되는 일이다. 이 승리에 대한 희열도 경건이 되어 하나님 앞에 행하여지는 의식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과 기도를 통해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증명된다.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사 17:7-8).” 하여 나는 오늘 주일에 우리의 믿음에 대해 말씀을 준비했다. 이 믿음은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어도 증명할 수 있다. 믿음에 대해 설명하기 어려우나 증거가 될 수 있다. 곧 ‘믿음으로’ 많은 믿음의 선친들이 ‘더 좋은 것’을 붙들었다(히 11장).
①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창 4:3-5), ②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5:22-24), ③노아는 방주를 예비함으로(6:9, 22), ④아브라함은 순종과 함께 본향을 바라봄으로(22:1-14), ⑤이삭은 야곱에게 축복함으로, ⑥야곱은 요셉의 각 아들들을 축복함으로(48:15-21), ⑦요셉은 해골을 언약의 땅에 메고 가라고 명함으로(50:24-26), ⑧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함으로(출 2:11-15), ⑨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영접함으로(수 2:1-24), 그렇듯이 무명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생생한 신앙의 공적을 쌓았고(왕상 18:4, 13), 성도들은 약속을 받지 못했음에도 기다림으로(단 3:23-28), 다들 그런 와중에도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바랐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비록 세상에서 저들은 실패자요, 낙오자 같이 살았으나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하심도 그 때문이다(38). 나는 저들 가운데 실제 내 곁의 여러 선친을 안다. 느닷없는 나병으로 소록도로 끌려가 모진 고문과 같이 강제 수용되어 치료를 받아 음성 환자가 된 뒤, 양 장로님은 소경이 되어 여수 애양원 나환자촌으로 갇혀 지내듯 살았다. 그런 그는 그 과정에서 예수를 알았고 믿음으로 ‘더 좋은 것’을 붙들면서 애양원 병원을 매일 같이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환우들을 위로하고 벗이 되었다. 그러기까지 저는 여러 번 죽을 생각을 했고 그와 동시에 성경 66권을 암송하면서 남은 길을 걸어갔다. 그때 나는 열세 살 어린 나이로 병상에 누웠다가 그를 만났다. 내 생애 그를 만난 것은 복 중의 귀한 복이다. 이후 저는 일생을 중보하고 말씀보고 환우를 건사하다 하나님 나라로 갔다. 본인도 몸을 가누기 어려운 나환자로 살면서 말이다.
이런 자를 세상은 감당하지 못한다. 중학교 2학년 때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 얼굴에 공을 맞고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강영우는 이내 시력을 잃고 소경이 됐다. 몇 차례의 수술과 갖은 노력을 다하는 동안 2년의 시간이 흐르고 동기들은 모두 고등학교를 다닐 때 저는 그때서야 점자로 숫자와 글자를 익혀 맹아특수학교로 진학을 하여 중학교 과정을 다시 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동급생들은 대학을 갔고 저는 6년 이상을 뒤쳐져서 간신히 생을 따라가고 있었다. 연대 특수교육학과를 수석으로 들어가고 첫 국비장학생으로 하버드대에 편입을 한 후 귀국하여 교수가 되길 꿈꾸다가 길이 막혀서 UN에 취직했다. 후에 저는 미국의 부시정권 당시 미국대통령의 자문위원으로 백악관을 출입했다. 나는 저의 살아생전에 이와 같은 간증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성경의 여러 인물은 물론 찬송가의 가사를 지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안다. 가령 찬송가의 주역들을 보면 일가족을 한 날 한 시에 모두 잃고도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하고 찬송하였던 호레이쇼 스패포드(새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가 있다. 또는 일생을 정신질환을 앓으며 심한 우울과 자살 충동으로 시달리면서도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하고 찬송하였던 윌리엄 쿠퍼(258장)과 노예무역선 선장이었던 존 뉴턴은 회개하고 돌이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하며 찬송하였다(305장). 이렇듯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 실체들이 존재함을 알게 하고 확신을 갖게 한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도 느끼지만 온전히 하나님을 믿을 때와 겸하여 다른 우상을 섬길 때에 유다는 달랐다. 아울러 하나님을 외면하고 다른 신으로 그들의 척도를 살았던 이방의 나라들이 그 결국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한다. 하나님은 만유의 심판자 시며, 모두가 그에게 자기를 밝혀야 한다. 바울이 다마섹에서 회심하고 거기서 복음을 전파하고 유대인들과 논쟁했을 때,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행 9:22).” 그들의 눈이 여호와를 향하기 시작했다. 곧 우리가 살아서 우리의 믿음의 증거가 돼야 한다. 믿음이란 설명할 수 없으나 증명할 수 있다.
다메섹 북쪽에 있던 하맛은 수리아에 속하며, 다마섹에 머무르는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를 함께 당하였다. 유대인들에게는 ‘악인에게 화가 있을 때, 그 이웃에게도 화가 있을지어다.’ 하는 격언이 있다. 곧 그 이웃도 그의 죄와 그의 재앙에 참여할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롯이 있다. 베드로는 이를 이렇게 설교하였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6-8).”
여기서 우선은 오늘 본문과 동일한 의미를 발견한다. 먼저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다는 것이다. 다음은 그런 가운데 곁에 같이 살았던 롯의 경우를 들어,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다고 한다. 곧 오늘을 살면서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은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우리도 저들로 인해 심령이 상한다. 때로는 부러움으로 부당하게 여겨지는 자신의 처지를 놓고, 또는 악인이 잘 되는 것으로 그것으로 보편적인 상식이 되는 세상을 살다보면…. 그리하여 시인은 ‘미끄러져 넘어질 뻔하였다고 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1-3).
이는 아주 자주 드는 의문점이기도 하다. 이것으로 결국 교회를 등지거나 우선하여 세상을 추구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성도들도 여럿 보았다. 이에 오늘 본문은 ‘하드락 땅에 화있으리라.’ 한다. 그리고 ‘그 접경된 하맛에 화있으리라.’ 이 예언에 있어서 ‘두로와 시돈’은 여기서 그 다음으로 설명된다. 두로는 번창하고, 스스로 매우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심판을 멀리 둘 뿐 아니라, 그에 대해 반항하려 했다. 왜냐하면, 두로는 매우 넓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반어적인 표현이다.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지 않았다.
말씀을 거역할 지혜와 계획은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내가 아는 선생은 그렇듯 자신의 지혜에 빠졌다. 저를 만났을 때는 갓 임용고사를 패스하고 영어교사가 된 때였다. 모 교회 청년으로 누구보다 열심으로 영어성경공부를 주도하고 우리들 몇몇도 데리고 가서 같이 어울려 영어성경공부에 참여하게도 했다. 그러다 교사를 그만두고 굴지의 언론사 기자로 갔다. 보다 넓은 세상을 보고 느끼며 저의 철학과 관념은 신앙을 지배해갔다. 그렇게 20여 년이 흘러 한국의 콘텐츠를 수출하고 상품화하는, 당시로는 발 빠른 사업을 시작하여 성공했다. 그의 안목은 적중했고 그러는 동안 저는 ‘우리 문화’에 깃든 ‘얼’을 추구하다 다신론주의자가 되었다.
오늘 본문의 두로와 시돈을 묵상하다 선생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당시 저와 어울릴 때 나에게는 저가 현자와 같은 지혜를 가졌고 안목을 지녔다. 그들 자신의 교묘한 데서 취하는 것이 그의 명예인 것이다.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요새)을 건축하였듯이 저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며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심히 살았다. 결코 붕괴되거나 정복되지 않을 것 같이 말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부를 축적하였고, 지혜와 은총의 상품들로 성공을 거두었다. 더 훗날의 일은 모른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았다. 더는 연락을 삼가게 된 것은 저의 다원주의가 나로 부대낌이 되었다. 저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만큼 나의 심령이 상하는 것이다.
결국 하니님은 이기고 또 이기신다.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계 6:2).” 그렇듯 “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서 그들의 화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 남방 회오리바람을 타고 가실 것이라(슥 9:14).” 하여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16).”
고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15).” 그리하여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17).” 하심으로 훗날을 기억한다. 이는,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시 50:1-3).
그때에,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7-8).
그리하여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14-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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