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에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규가 없어지리라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슥 10:11-12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시 51:1
인생을 고난의 바다라 하신다. 이때에 우리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시대적 배경으로 당시 이스라엘은 몹시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그런 그들에게 굉장히 영광스럽고도 은혜로운 일들이 앞 장에서 약속된 바 있었다. 이제 그들이 그 모든 일을 하나님께 구하게 될 것이다. 자신들의 행실 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바라신다는 사실을 그들로 알게 하실 것이다. 이 예언의 때를 맞추어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시기를 기도로써 간구하라고 명령하며 시작한다.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1).” ‘봄비 때’는 실상 늦은 비의 계절로 팔레스타인은 추수하기 전에 결실을 위한 비이다. ‘번개를 내는 하나님’이 비가 내릴 준비로 번개를 만들어주신다. 성경은 이와 같은 자연 현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립되는 것을 가르친다. 비는 하나님이 주시는 자연의 축복을 상징한다. 은혜의 영적 비유다. 영적인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성령의 감화를 말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을 알게 한다. 축복하실 이는 하나님밖에 없으시다.
몇 해 동안 불순한 일기로 굉장한 기근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결국 많은 곡식과 포도주를 거두게 되리라는 것을 앞 장에서 약속하셨다.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9:16-17).” 그런 가운데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땅은 그 소산을 낼 수 없다. 땅의 기름진 소산과 수확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하늘의 이슬’을 구하여야 한다. ‘너희는 주께 비를 구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호 2:21-22).”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때, 넓으신 자비로 아주 긴요할 때에 ‘늦은 비’를 주신다. 먼저 오는 비는 가을철 파종기에 내리는 비이고, 늦은 비는 곡식의 이삭이 패어 영글어갈 무렵인 3월부터 5월 사이 봄철에 내리는 비이다. 어느 한 때라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그 땅은 쓸모없게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이후 3월 하순부터 9월까지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섭리가 인도하시는 바, 충성스럽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일상적인 방법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적절한 시기에 그의 자비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징표로 비를 내리지 않게도 하셨다. 그때는 막연하게 기도를 할 수 없었고,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징표로 비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넘치도록 많은 소나기를 우리 영혼에 내리실 것이다. 들에 있는 모든 풀포기까지 자랄 수 있게 은혜의 단비를 내리실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뜻을 알게 하시려고 가뭄과 비를 예비하고 계신다. 이를 통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도 우상을 섬기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알게 하신다.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가 헛되므로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10:2).”
우상은 헛된 것만을 꿈꾸게 한다. 곤경에 있을 때 우선하게 되는 것이 저마다의 요행을 바라는 일이다. 서로가 위로할 때도 ‘다 잘 될 거야!’ 하는 식으로 막연한 희망을 준다. 서로가 찾아갔었고 서로가 의논하여 드라빔으로 자신들의 소망을 구한다. 드라빔은 보통 가정에 보관하는 유상인데, 점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유대인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 전에 이런 미신 때문에 벌을 받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바벨론에서 포로로 있을 때에도 이러한 미신을 숭상하였다. 곧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요행이 드라빔이다. 우상은 하나님 외에 더 구하고 갈구하는 의지다. 그것이 돈이든지 가족이든지 그 어떤 위안의 대상일 때는 사뭇 조심해야 한다.
실제 우리가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스스로 직면하기보다 남을 찾고 다른 이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이 ‘드라빔 효과’이다. 남들은 제 3자의 입장임으로 들어주거나 뭐라 위로하는 일에서 한결 당사자보다 여유가 있다. 공감도 하고 위로도 할 수 있으나 엄연히 저는 ‘남의 일’을 다룰 뿐이다. 그런 입장에서 나는 누구의 어떤 일에 대해 상담할 때 더더욱 주의한다. 더러는 감정이입이 과중하여 실제 당사자보다 더 힘들어하기도 한다. 그래서 누구는 나더러 이 일이 맞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알지만 그래서도 같이 울며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내 안에 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될 때 주 앞에 간절해진다. 어쩔 땐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하고 돌려보낼 때도 있다. 그런 뒤에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한다. 우리가 주의 이름 외에 의지가 되는 모든 것은 드라빔이다.
당시 그들에게 비를 약속해 주는 체하고, ‘복술가들은 거짓을 꾸며댔다.’ 그들의 환상은 기만이고 속임수였다. 그들은 거짓된 꿈을 늘어놓았다. 그와 같은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들이 아닌 것을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 그들은 거짓된 계시의 말을 하였고, 그것을 듣는 자들에게 헛된 위로를 주었다. 열방의 허무한 것들 중에 그 어떤 것도 비를 내리게 할 수 없었다. “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렘 14:22).”
누가 와서 신앙을 상담하다 말고 요즘 TV에 유명한 아무개의 상담프로를 소개하며 저의 말, 어떤 조언이 힘이 되었다며 말했다. 우리가 살면서 근원적인 문제를 비껴가면 더러는 여행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이, 아무 생각 없이 혼자 있는 것이 위로가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한동안 낚시를 선호했다. 시쳇말로 ‘물멍’이라 해서 낚싯대를 던져놓고 가만히 생각 없이 집중하는 시선으로 늘 위로가 되었다. 그때는 그것이 회피였다는 것을 몰랐다. 그렇듯 친구를 만나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시시덕거리는 것도 도움이 되는 줄 알았다. 술에 취해 늘어놓는 말로도 위로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결국은 다시 황폐한 영혼이었다. 우리 심령의 근원적인 문제에는 각자의 드라빔으로 도달할 수 없다. 같이 기도하는 성도의 중보가 필요하다. 기도를 부탁하느라 자신의 허물을 토설하는 일도 귀한 시간이다. 하여 나는 자주 글쓰기를 권한다.
글은 스스로의 감정을 자제하고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여 고르면서 자기 문제를 보다 객관화시킨다. 또한 다시 읽을 수 있다. 읽기와 듣기의 차이는 엄청나다. 우리는 어쩌면 여전히 ‘거짓 우상’들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그것 때문에 참되신 하나님의 돌보심도 잃어버린다. 뿔뿔이 흩어진 양떼처럼, 또 다른 괴로움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이라는 말처럼 폭설 위로 서리가 내리는 것 같이 어려움은 더 큰 문제로 덮인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들을 지켜주며 보살필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 제사를 올려야 하는 제사장이라든지, 그들을 다스릴 임금이 없다. 나이가 들면서 더는 누가 야단쳐주는 사람이 없다. 완고함으로 누구 말도 듣지 않으려 한다.
그런 가운데 모든 일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돌보아 그들을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3)” 주가 주도하시는 삶이 복되다. 무리를 먹이되 게으르고, 때로 굶기는 목자들을 노여워하신다. 사악한 방백들과 우상 숭배자들에게 노를 발하신다. 바벨론의 포로 생활은 오늘 우리의 현실과 같다. 그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는 오늘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하나님께서는 부정하고 해악한 무리들을 ‘염소의 무리’로 표현하시며 벌하실 것을 알게 하신다. 오늘의 괴로움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자주 언급하지만 그래서 나는 찬송가 가사의 고백을 자주 읊조린다. 일가족을 한 날 한 시에 모두 잃고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하고 찬송하는 스패포드(새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 일생을 정신질환으로 고통하며 심한 우울과 자살 충동으로 시달리면서도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하고 찬송하였던 윌리엄 쿠퍼(258장). 노예무역선 선장이었던 존 뉴턴은 회개하여 돌이키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하며 찬송하였다(305장). 어떻게 이런 끔찍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면 더러는 그 믿음이 우리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 곧 오늘의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그들에게 나타남을 보여 주신다. “모퉁잇돌이 그에게서, 말뚝이 그에게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서 나와서 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원수를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한즉 그들이 싸워 말 탄 자들을 부끄럽게 하리라(4-5).” ‘모퉁이 돌이 그에게서, 말뚝이 그에게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서 나와서 싸울 때’ 궁극적으로는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곧 모퉁이 돌은 건물을 든든히 서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건물의 이 부분과 저 부분을 결부시키는 것이다. 선지자는 장래에 신약 시대의 천국 운동을 집 짓는 비유로 표현하고 있다. 장차 유다에서 나올 이 운동이 어떻게 견고히 서게 될 것인지를 여러 표현으로 나타낸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견실한 사역의 방면을 보여준다. 싸우는 활이나 권세 잡은 자는 또 다른 성격을 띈 비유다. 곧 하나님은 싸우시듯 사역하시며 권세 잡으신다. 이와 같은 말씀은 교회가 견고하게 설 것을 포함한다. 모퉁이 돌은 이스라엘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심을 알게 한다. 말뚝은 풍속대로 집에 손님이 들어오는 곳에 박아서 그 위에 의복이나 귀중품을 걸어두어서 영광을 나타낸다. 곧 메시야는 이스라엘 집의 영광을 나타내실 자로 오신다.
활은 메시야가 모든 원수를 이길 것을 가리킨다. 권세 잡은 자가 메시야인 사실은 우리가 다 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그러므로 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대적을 밟을 것이다.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한즉 그들이 싸워 말 탄 자들로 부끄럽게 할 것이다. 유대인은 약하여도 병력이 강한 원수를 여지없이 패배시킬 것이다. 그들이 승리하는 것은 주가 함께 하심이다.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미 7:10).”
이와 같이 우리 영혼은 우리로 견고하게 하는 것이 있음을 안다.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모든 항아리까지니라(사 22:23-24).” 하여 우리의 믿음은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심을 받았다.’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스 9:8).” 그렇게 하여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
이에 오늘도 싸우는 활 곧 군대의 힘이나 그 손으로 백성의 힘을 쥐고 있는 권세 잡은 자들이나 힘 있는 자들도 왔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의 눈을 들어 ‘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면 된다. 복음적인 약속은 이처럼 간단하고 명료한데, 자꾸 복잡하게 여겨지는 것은 자기 생각-드라빔을 놓지 못해서이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임재를 받으면서도 두 소욕이 서로 싸운다. 성령은 우리 육신을 거스르고 우리 육신은 성령을 거스르면서, ‘주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점점 더 확실해진다.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이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가 내버린 일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에게 들으리라(6).” 즉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오늘도 이 아침 주 앞에 나와 앉았다. 말씀으로 글을 쓴다.
교회는 가득 채워질 것이다.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8).” 지금은 황량한 것 같아도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호 2:23).” 이는 숫자나 교회의 외형으로 말하는 게 아니다.
딸애 내외가 여수 애양원교회에서 주일을 지키고 왔다. 대부분 노인들로만 썰렁하니 빈자리가 많았다는데, 진실로 그들의 자녀들은 그것을 볼 것다. 그들은 자기들의 자녀와 함께 생동하여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을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으려니와 그들이 먼 곳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이 살아서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돌아올지라(9).” 고로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들에게 한 것이라.’ 하신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2:39).” 그리하여, “내가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에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규가 없어지리라(11).”
하여,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12).”
오늘도 나의 죄와 허물을 그대로 가지고 주 앞에 선다. 주의 긍휼하심 앞에서 아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 51:1-2).
죄가 내 안에 있을 때 우리 영혼이 호소하는 것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0-1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17-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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