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 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 내가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합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슥 11:4, 7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시 52:9
유대의 파멸이 예고된다. 침울하고 비유적인 표현으로 쓰였다. 먼 훗날 예루살렘과 성전과 유대가 모두 파괴되리라 예언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때가 되었을 때 매우 알기 쉽고 명백하게 예언하신 바, 베드로에게 이르신 말씀과 연결된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15).” 또 이르시되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16).”
이렇듯 연거푸 우리에게 이르심은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너 잣나무여 곡할지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쓰러졌음이로다 바산의 상수리나무들아 곡할지어다 무성한 숲이 엎드러졌도다(슥 11:1-2).” 하시는 오늘 본문으로 정리가 된다. 나무들이 불타는 것으로 이방나라의 집권이 멸망할 것을 상징한다. 동시에 유대의 멸망을 비유한다. 이것은 유대가 로마로 말미암아 멸망당할 것을 말한다. 이에 ‘목자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바산의 자랑할 만한 목장이 불붙은 까닭이다.
‘요단의 자랑’은 왕성한 초목을 의미한다. “목자들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그들의 영화로운 것이 쓰러졌음이로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쓰러졌음이로다(3).” 이스라엘 열 지파가 포로 되어 간 뒤 거기에 사자들이 있었다. “보라 사자가 요단 강의 깊은 숲에서 나타나듯이 그가 와서 견고한 처소를 칠 것이라 내가 즉시 그들을 거기에서 쫓아내고 택한 자를 내가 그 위에 세우리니 나와 같은 자 누구며 나와 더불어 다툴 자 누구며 내 앞에 설 목자가 누구냐(렘 49:19).”
이 울창한 수풀이 불붙게 되어 사자들도 부르짖게 됨은, 장차 로마로 말미암아 유대에 무서운 침략이 있을 것을 예고한다. 이에 오늘 본문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4).” 하고 명령하신다. 여기서 ‘잡혀 죽을 양떼’는 곧 유대 민족을 가리키고 이들을 먹이라고 하신다. 이는 메시야의 일이었고, 여기서 양떼를 먹이는 선한 목자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 실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를 연속으로 전달한다.
“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 내가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합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꺾었으니 이는 모든 백성들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7, 10).” 이와 같은 은총은 주의 것으로 주가 이루시어야 한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은 ‘잡혀 죽을 양떼’처럼 비참한 처지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야께서 그들을 끝까지 목양하여 잘 되게 하려고 막대기 둘을 취하여 그들을 먹이셨다. 하나는 ‘은총’으로, 하나는 ‘연합’으로 말이다.
곧 이 두 막대기 중 ‘은총’은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은혜의 관계’라고 가르친다. 다른 막대기 하나는 ‘연합’이라 하여 형제의 연합을 배양하려는 사역이다.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하시는 말씀에서 강한 두려움을 가진다. 은총을 거두시면 우리로서는 살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은혜를 중단하신다는 의미인데, 그것은 백성과 맺은 언약을 폐하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백성’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열국을 뜻한다. 곧 하나님께서 열국에게 명령하사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돌아볼 때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에 따른 것보다 세상이 자발적으로 친절하였던 경우를 생각하게 한다. 나에게는 그러했다.
당시 건축하였던 교회가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넘어가고, 나의 부친은 빈 손 들고 나와야 했다. 그때 같이 참여했던 나와 아내와 아이들은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고, 그때 어울리던 이들의 손길이 극적으로 우리의 살 집과 아내의 학원을 개원할 수 있게 도왔다. 그때는 미처 몰랐는데 우리 믿는 자녀들의 삶에는 안 믿는 자들의 도움과 그들의 손길도 주의 섭리가운데, 마치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보호하게 하셨다. 자주 회상하지만 그때 신학학부를 편입해서 공부하였고 그 상황은 그럴 수 없는 여건이었다는 것을 누구라도 다 안다. 그때의 학비며 생활비 일부도 저의 손길에서 나왔다. 또한 한참 논술이 붐을 맞아서 글방의 아이들도 대기인원이 여럿이었다. 그 모든 상황이 마치 나를 감싸고 보호하심 같다.
몰라서 그렇지 오늘도 알게 모르게 여러 사람의 보호와 도움은 이상할 정도로 늘 나를 에운다. 그러한 멸망의 위기 가운데서도 이를 앞서 준비하시는 주의 손길이 놀랍다. 이에 ‘레바논아 네 문을 열라!’ 하신다.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지어진 성전과 레바논의 눈처럼 흰 성전의 돌은 훗날에 로마인들에 의해 불태워졌으며, 분노한 군사들이 그 문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이러한 일을 확증하려고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두 번째로 지은 성전이 무너지기 40년 전에 이미 성전의 문은 스스로 열려졌다. 이는 스가랴의 예언에 따라 성전이 무너질 날이 이제 가까웠음을 알게 한다. ‘백향목이 넘어지게 되면, 전나무는 곡을 하게 된다.’ 당당히 서 있던 백향목이 넘어졌는데, 가냘픈 전나무가 그대로 서 있을 수 있겠나? 백향목이 불살라지면, 전나무도 곡할 시기가 된 것이다.
곧 ‘바산의 나무는 곡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포도의 수풀은 무너졌고, 레바논에 있던 수풀도 무너졌다. 현명하며 선한 자들이 죄에 빠지고, 부자와 위인들이 곤경에 처했다. 그러자 파멸로 인한 애곡이 있다. ‘곡하는 소리가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곁의 사람들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글방의 아이들이 하나둘 줄어들다 예배가 시작되면서 급격히 없어졌다. 같이 어울리며 도움을 주던 이들도 내가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소원해지고 어려워하는 처지가 되었다. ‘젊은 사자들은 요단의 자랑이 황무하게 되었기 때문에 울부짖고, 요단의 자랑은 둑 위에 있는 숲과도 같아 사자들은 그 안에서 몸을 도사리고 있었는데 강물이 넘쳐나게 되면서 사자들도 그 속에서 기어나왔다.’ 이는 내 삶의 은유와 같다.
“보라 사자가 요단 강의 깊은 숲에서 나타나듯이 그가 와서 견고한 처소를 칠 것이라 내가 즉시 그들을 거기에서 쫓아내고 택한 자를 내가 그 위에 세우리니 나와 같은 자 누구며 나와 더불어 다툴 자 누구며 내 앞에 설 목자가 누구냐(렘 49:19).”
내 생에 있어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던 목자가 사자처럼 변하게 되면서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들의 교만을 낮추셨다. 나를 끌어가던 세상의 문화나 유행이나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가 허물어졌다. 예고된 심판은 또 다른 구원의 길로 열려진다(슥 11:4-14). 이 예언은 그리스도의 예형으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 9:37-39).” 내가 주 앞에 설 때 나의 가까운 친구와 선생들부터 하나둘 나를 멀리고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다.
하긴 주의 강권하심은 나로 하여금 꼼짝 못하게 하시려고 공황이니 불안이나 하는 심리적인 작동까지 일으키시고, 급기야 숨통을 끊듯이 모든 돈 줄, 내가 우선하여 변통하며 살았던 카드가 막히고 언제든지 가용하여 쓸 수 있던 손 쉬운 아르바이트-당시 나는 가요 작사나 광고 카피를 골라가면서 하고 말고 하였다. 그것은 실력이 좋아서라기보다 건당 얼마, 하는 식으로 건건히 할 수 있는 일들이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져다 며칠 고생해서 써주고 돈을 받곤 하였다. 그런 것들이 뜬금없이 글방 아이들 대입에서 논술 비중이 낮아지면서 순식간에 줄어든 것처럼, 전반적인 산업이 불황을 겪으면서 광고카피나 작사 같은 것이 막혀버렸다. 흔히 마음만 먹으면 주워다 하던 교정일도, 가까운 선생의 잡지에 실리던 짧은 글쓰기도 거짓말처럼 일감이 딱 끊겼다. 마치 나를 둘러싼 모든 우주가 일순간에 멈춘 듯 글방 아이들은 사라졌고, 일감은 없어져서 순식간에 카드도 막혀버렸다.
그런 일, 심판이나 징계로 여겨졌던 일들이 새로운 은혜의 길을 열었다. 곧 하나님으로만 의뢰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때 울면서 신대원을 다녔고, 그러는 내게 가까운 이들부터 한심하게 여겼다. 늘 가까웠던 선생은 아예 노골적으로 나에게 ‘현실도피자’라 할 정도였다. 그렇듯 멸망은 새로운 생성이다. 심판은 어디까지나 주께서 오셨을 때 비로소 유대의 위선과 속된 생활이 뒤집어지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려 하셨으나 그들은 치료받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파멸을 택했고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서 숨지게 하였다. 유대의 성전은 독재 정치 하에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렀고, 자기들 사이에서 종살이가 이방 나라에서 포로 생활보다 더 비참하게 되었다. 즉 “사들인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하게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들의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5).”
자연신론자였던 사두개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함으로 도덕과 윤리를 타락시켰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마 15:16-17).” 그들은 양 무리를 잡아 죽였으며, 팔아넘기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성취하고 이익을 구하는 데만 급급하였다. 백성들이야 어떻게 되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정당화시킨다. 율법이 준 의무를 멋대로 해석하고, 스스로 면제하여 깨뜨렸다. 악을 행하면서도 정당화시키는 자들로, 그 마음은 지독하게 무디어져갔다. 그들은 ‘내가 풍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고 하였다. 자기들의 악행으로 번영하고 재물을 얻어서 지위를 취하고도 하나님이 자기들을 축복하신다고 하였다.
그들은 신앙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그것을 좋게 여겼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31).” 그렇게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받는도다(호 5:11).” 죄악은 서로 맞물려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이에 오늘 말씀은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주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슥 11:6)” 하나님의 자비를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된 자들은 참으로 비참하다. 자기들의 양심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사람의 명령을 말씀인 양 가르친다. 여러 사람이 힘이 되고 권력이 되고 돈이 되는 세상이다. 때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점점 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마 15:9-10).” 주님이 이르시는 데를 주목하면, 저들은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23:6-7).” 그렇게 권력은 행사되고 교회도 어느 순간부터 유명세로 진리가 가리워지기 십상이다. 저마다 ‘랍비여, 랍비여’ 불리어지는 것을 원하면서 목회를 하고 교회를 번성하게 한다. 결국 하나님은 그로 인하여 아들을 보내셨으나,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21:37)” 저들은 하나님의 아들마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게 하였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셨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그렇게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겔 34:23).” 하시며 알리셨으나, 저마다 스스로의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 하여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요 7:1-2).” 그러니 저들은 표적을 구하고 각종 이벤트를 찾아 예수를 구할 때, “명절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11).” 예수께서 오신 것은 ‘이 양떼들에게 아버지로부터 받은 부탁’ 곧 오늘 본문에서 밝히는 바,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슥 11:4).” 하심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저들은 이를 거부하였고 이내 버림받은, 잃어버린 자들에게로 가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마 15:24).” 곧 오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심판은 멸망이 아니라 소망을 이루려하심이고, 악인들의 악함으로 우리에게로 복음이 넘어왔다. 이에 오늘 우리도 이러한 사명을 수락하고 섬겨야 할 이유가 분명해진다. “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 내가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합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슥 11:7).” 비록 오늘 내가 하는 일이 참으로 보잘것없다 하겠으나 주가 두 막대기를 취하심으로 하나는 ‘은총’이라, 하나는 ‘연합’이라 하신다.
이에, “화 있을진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내리리니 그의 팔이 아주 마르고 그의 오른쪽 눈이 아주 멀어 버릴 것이라 하시니라(17).” 하심을 두려운 마음으로 되새길 때,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시 52:1-2).
이와 같은 악으로 우린 더욱 선을 갈망한다.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7-8).
하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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