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현. 2026. 5. 27. 05:41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이방 나라들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슥 12:9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시 53:6

 

 

주신 삶을 다하는 게 사명이다. 저마다 처한 상황에서 주를 의지하는 것으로 맡기신 사역에 충성하는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 여기저기 아픈 데가 늘어가고 누구는 그 이상의 고통으로 신음하며 살아가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바라는 일이 ‘교회’의 역할이었다. 우리로 주의 성전이라 하심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하심을 두고 묵상할 때면 내가 내 것이 아니라는 데서 항상 안도한다. 이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러니 이 몸을 이끌고 살아내는 것으로도 충분하였다. 살면서 주를 더욱 의지함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9).” 하심 같이 주신 바, 그것이 병마와 씨름하는 일이거나 홀로 외로움에 사투를 벌이는 일이라 해도 주가 함께 하심으로 귀한 일이었다. 내 곁의 누구는 홀로 장애를 안고 살면서 쉰 살이 넘어 주를 더욱 바라게 되는 것이 육체의 고통 때문이라 하였다. 스스로도 이처럼 간절하였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주를 바람인데, 고통과 외로움으로 힘에 겨울 때면 주를 의지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가 그의 고통으로 주를 의뢰하여, 서로가 한 지체임을 확인한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오늘 본문은 우리로 안전함을 알게 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이 경고’가 될 때 이는 짐 같아서 지고 나르는 일이 우리 삶을 억누를 때가 있다. 그것으로 힘에 겨울 때,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니 그 때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그가 이르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귀 위에 던져 덮더라(5:7-8).” 이와 같이 성전을 대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이다. 말씀이 부담스러운 무게로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위안이요, 은혜이다. “그가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신 33:2).”

 

앞서 말한 아무개의 경우 저는 오늘의 힘든 상황을 말씀으로 견디고 있다. 하나님의 오른 손에서 나온 불같은 말씀과 섭리는 그의 힘이고 위로이다. 그렇듯 하루 중 긴 시간을 말씀을 듣거나 읽는 것으로 자신을 그 앞에 두는 것으로 오늘의 여러 갈등과 염려를 물리친다. 곧 우리 대적에게 공포하는 말씀이 그들에게 화평을 전했는데도 싸우자고 들고, 우리에게는 용기와 밝은 빛을 비추어 주었다. 곧 애굽 사람에게는 두려움과 절망을 주고 흑암이 되었는데, 우리에게는 그때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심을 안다. 우리에게 축복의 말씀이 저들에게는 무거운 외면이 되는 것이다.

 

이에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1).” 오늘의 경고는 우리 심령을 지으신 이가 하시는 말씀이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모든 민족에게 취하게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이르리라(2).” 먼저는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다. 경고는 ‘협박하는 예언’이란 의미다. 이것은 경성하지 않는 자를 깨우치기 위한 교훈이다. 어찌 우리로 깨우치게 하시려는가? 그것은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까닭이다.

 

그 하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사 43:15).” 우리의 거룩한 이시고, 창조자시고, 우리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암 4:13).” 이 모든 오늘의 현실을 ‘밟는 이’시다. 이렇게 하나님을 ‘창조자’로 칭호하는 목적은, 그 창조의 능력으로 오늘 우리가 사는 하늘을 펴셨고, 천공의 무수한 천체들을 유지하신다. 하나님께서 이 물질 세계에서 하신 일들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우리의 심령으로 이를 알게 하심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기초로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오늘 우리로 주를 알게 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밖에 다른 그 무엇도 의지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의 심령은 위를 향하여 더 나은 본향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에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모든 민족에게 취하게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이르리라(2)” 하심 같이 하나님으로 우리가 취하게 하심 같이 교회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데 전심을 다할 뿐이다. 곧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사 41:17).” 하심 같이, 교회가 이 땅에서 복음의 승리를 거두는 것은,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그것을 드는 모든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슥 12:3).”

 

세상의 모든 문화와 가치와 상식과 기준이 우리를 무거운 돌로 여겨 배척하겠으나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하심은 무거운 돌을 쳐들어 보려는 자가 결국 그 자신이 상처를 당하게 되고 힘들 뿐인 것을 알게 하려 하신다. 세상의 가치나 어떤 존엄함이 결국은 교회를 능가할 수 없다. 그 어떤 사상과 이상도 말씀을 우선할 수 없다. 그것들이 교회를 치려다가 도리어 자기들 편에서 손해를 볼 것이다. 여기서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렇게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 하니(단 2:45).” 세상 곧 쇠, 놋, 진흙, 은, 금 등 모든 게 이 돌에 의해 부서질 것이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

 

우리가 힘이 들고 어렵다가도 오히려 그 무게로 세상을 이겨내고 사는 것이었으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슥 3:9).” 하심은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눅 20:17).” 이 모든 게 예수를 가리킨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마 21:44).”

 

여기 ‘무거운 돌’에 대한 말씀은 하나님이 ‘하늘을 펴셨는데’ 그것은 ‘궁창이 있으라’ 하시고 궁창을 지으셨던 것과 같다. 태초에 창조를 하실 때부터 지금까지 그 일을 행하신다. 그는 하늘을 ‘포장처럼’ 펴시고, 그것은 계속 그렇게 되어서 ‘하늘이 두루마리같이 서로 말리게 될’ 마지막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하늘을 펴시는 그의 능력은 다함이 없고, 또한 그에게는 힘겨운 어떤 일도 있을 수 없으시다. 곧 오늘 우리가 살면서 사는 동안의 시간을 직선으로 생각하는데 이를 두루마리로 말아두는 것 같이 생각해보면, 아브라함도 다윗도 우리의 모든 믿음의 선친들과 우리의 시간이 포개진다. 두루 말려서 주의 손에 쥐어 있다.

 

그 하나님은 이 땅의 기초를 두셨다. 그것을 굳게 다져 기초를 고정시키셨다. 바다 위에 터를 세우시고(시 24:1-2), 땅을 허공에 달으셨을지라도(욥 26:7) 우리가 사는 오늘, 이 땅의 축을 단단히 고정시키셨다. 이를 홀로 버려두셨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혼자 살면서 혼자 외로움으로 고통을 견디며 사는 이에게 나는 자주 위로의 말을 전한다. 그런 가운데 여러 유혹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저의 외로움은 이를 간절히 원하여서 전에는 이단의 과도한 친절에 빠지고, 지금은 한 여성과의 인연으로 갈등할 때도 있지만… 그의 사연이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

 

‘여호와께서 땅을 버리셨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자들의 말이다. 자신을 비하하여 이를 높이신 이를 욕되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 안에 심령을 지어 놓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영혼을 지으셨다.’ “시드기야 왕이 비밀히 예레미야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으며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넘기지도 아니하리라 하는지라(렘 38:16).” 저마다 이를 안다. 알면서도 더 가까운 듯 유혹에 또는 어떤 이의 생에 대한 애착에서 위로를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몸은 ‘우리 육체의 조상’에게서 왔으나 영은 ‘영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의 심령을 지으셨다는 데서 우리가 그의 장중에 있음을 알게 한다.

 

오늘이 어떠하든지… 나는 종종 뭐라 답하기 어려운 이의 고충으로 덩달아서 힘들 때가 있다. 흔히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은 또 다른 이해와 공감을 요구한다. 이를 위하여 나로 그와 같이 두셨는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저마다의 고통은 더러 억울하고 원통하기도 하지만 특별하게 주를 바라게도 한다. 똑같은 시절에 누군 심한 우울을 겪으며 일상에서 벗어났다. 그런 자신을 도로 일상으로 편입하고자 더 큰 무게에 짓눌린다. 나는 저에게 그 상태로도 괜찮다, 그대로도 괜찮다 하며 주를 바라길 원하지만 저의 간구는 다만 일상으로의 복귀라… 왜 자신에게 그러한 일이 벌어졌는지가 관건이라 힘들다. 어제도 누구와 긴 시간을 통화하면서 저의 특별한 현실을 두고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알려주고 싶어 했다.

 

어릴 적에 나의 부친은 나의 나 됨을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자주 알게 하였는데, 그것을 오늘에 와서야 인정하게 되는 것 같다. 왜 나를 여기에 두시는가, 하고 물을 때 의외로 우리 곁에 일반적이지 못한 것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심령들이 많았다. 그런 우리의 뒤틀린 심령을 ‘강물같이’ 바꾸어 흐르게 하시려고, 나 같은 자를 살리셨다! 누가 와서 믿기지 않는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할 때면 나는 주 앞에 저를 위해 빈다.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새삼 되새기고는 하는데,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슥 12:8).” 우리 가운데 약한 자를 다윗 같이 하겠다고 하신다.

 

우리가 신자로 사는 동안 어떻게 큰 은혜 받을 것인지를 보여 준다. 여기서 ‘약한 자’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뜻으로 ‘넘어진 자’를 일컫는다. 상한 심령으로 넘어진 자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올 때, 성도가 됨은 ‘다윗의 족속’이라는 의미다. 곧 ‘다윗의 집’이라는 뜻이다. 다윗의 왕통을 의미하면서 그 영광이 하나님 같이 나타나기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을 덧입은 것이 된다. 곧 구원을 받아 모든 형제들이 누리는 거룩한 화평을 누릴 것이다. 그에 따른 약속이다.

 

더러 우리를 삼킬 듯 고통이 찾아오나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 같이 주께서 이방인의 소란을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림 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사 25:4-5).” 그것으로 주의 역사를 본다. 교회는 모든 형제에게 위로의 잔이지만 더욱이 고통당하는 자의 위로가 되고 장래에 누릴 화평의 맛을 여실히 전달하게 된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시 116:12-14).

 

이러한 고백이 분명 일반인의 것은 아니다. 그만그만하고 적당하여 주의 이름 앞에 크게 간절하지 못할 때가 어중간하다. 세상에 속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회에 중심도 아닌 상태로 하나님의 사랑을 애매하게 머리로나 아는 사람이면 이를 알 수 없다. 세속 된 마음과 추구하는 가치는 언제든지 우리, 교회를 몰락시키려 하지만 오히려 우리가 고통 가운데서도 주를 바랄 때, 저들에게는 이와 같은 우리 생이 두려운 잔이 된다. 그리하여 진정 교회를 지키는 자들은 노인과 병든 자들로 그 심령이 가난하여 애통하고 주를 온전히 바라는 자들이다. 이번에도 딸애 내외가 한국교회의 산 증거라 할 수 있는 여수 애양원 교회를 가서 주일예배를 드렸는데, 대체로 노인 분들 서른, 마흔 정도의 인원뿐이라 안타까워했다.

 

결국,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사 10:22-23).”

 

우리로 ‘남은 자’가 되게 하시려고 오늘도 일반적이지 못한 상황에 두신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하고 고통당하는 누구에게 저의 ‘우울의 시간’이 오히려 더욱 주를 온전히 바라게 하는 것이기를. 말씀의 무게로 한결 가벼워진 심령으로 주를 찬양하기를. 다들 낫기만 바라고 남은 생을 좀 더 누리려고 할 때에 저 천국 우리의 본향을 더욱 사모하는 연습이 되기를.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8).” 하심을 다시금 읊조리며,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10).” 우리에게 향하신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은 애통하는 심령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 53:1-3).

 

하는 이 세상을 살면서,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7-8).

 

이에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이방 나라들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슥 12:9).” 하심 같이 오늘도 우릴 위해 힘쓰시는 주의 보호하심으로,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