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현. 2026. 5. 28. 05:30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슥 13:8-9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시 54:1

 

 

‘그 날에’ 이루어질 일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즉 복음의 날에 ‘샘이 열릴 것인데’ 그것은 곧 자기의 죄를 깨달아 진심으로 회개하는 모든 자들의 죄를 깨끗하게 할 것이다. ‘그 날에’ 은혜의 영이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애통히 여길 수 있게 부어질 것이다. ‘그 날에’ 우리가 희망 없는 자들처럼 애통해하다 자기 죄를 용서받을 것이라는 위로가 가슴 속에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양심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평온케 될 것이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그리스도는 회개와 용서를 한꺼번에 주도록 들림 받은 분이다.

 

이를 오늘 본문은 구약의 시점에서 선포한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 그 ‘열린 샘’은 예수께서 찔리신 바로 옆구리를 묵상하게 한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12:10).” 곧 찔림을 당한 예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것으로 우리 죄를 씻으시고 깨끗하게 하셨다. ‘찔림을 당한 그리스도를 쳐다본 사람들’은 살 것이다. 그를 찌른 죄를 통회하고 마음에 쓰라림으로 그리스도를 다시 쳐다보고 회개할 때 죄 씻음의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그의 반석을 치는 것은 주를 기쁘시게 한다. 주가 우리에게 ‘생명수의 샘’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다윗 족속과 예루살렘의 거민들’이 ‘죄 아래’에 있는데, 그 죄는 부정함을 알게 한다. 곧 우리의 부정함에 대하여는,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13:2).” 진실로 우리는 부정한 것이며, 부정한 자들과 분깃을 같이 해야 마땅하였다. 그런데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바로 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으로 받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우리를 건지셨다. 성령으로 우리는 예수의 보혈을 믿는 자가 되었다. ‘씻는 샘’으로 믿음으로 거듭난 우리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8-39).”

 

‘그 배에서’ 즉 자기 뱃속만 채우려는 아집과 욕심과 남을 탓하는 마음은 시커먼 배와 같았는데, 바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 이 놀라운 사실로,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26:22).” 그것이 원망이 되고 원통함을 대신하는 앙갚음이 되어 저마다의 죄의 뿌리였다. 곧 누구나 그 속 깊은 곳에 노여움이 있다. 이를 스스로 위로하려 남을 탓하고 시기하고 원망하며 살아야 했다. 하여 굶주린 늑대 같아서 ‘남의 말’로 ‘별식’ 같이 즐겨오던 삶이었다. 이는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30:15).” 아무리 낚아채고 먹어치워도 만족함이 없이 허기지는 마음이었다.

 

누구는 가난이었고 누구는 장애였으며, 누구는 부모나 형제들에 대한 서러움이었고, 누구에게는 자신만 갖지 못한 결핍의 정도였다. 자주 생각나는 이가 있는데, 저는 목회자 사모로 살아왔으면서도 친정엄마가 죽을 때 숨을 거두기 전까지 ‘왜 엄마는 나를 한 번도 따듯하게 안아주지 않았어?’ 하는 원망이 그 속에서 터져 나왔다고 하였다. 그래서들 죽어라 하고 살았다. 공부를, 돈을, 사람을, 권력을, 부를 축적하는 데 있어 양심도 팔아넘기면서 저마다의 허기진 속을 채우느라 아귀가 되었다. 끝없는 탐욕과 욕망으로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허기다.

 

이에 오늘 말씀은 ‘열리리라’ 외친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 그것은 ‘만군의 여호와가 말씀하신 것이다.’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하신다.’ 그뿐인가?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하신다. <우상이나 거짓 선지자>는 포로 시대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다. 신약에 와서 예수의 복음이 전파됨에 따라 모든 우상과 거짓 선지자는 드러났다. 점점 유대 땅에서 근절 되게 되었다. 특히 바리새주의는 일종의 거짓 선지자의 운동을 하는 단체였다. 예수께서 그것을 흩으셨다. 그리고 우리를 정결케 하는 샘이 우리를 위하여 열렸다. 그 샘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 그리스도의 피와 그 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가 새로운 언약이 되어 우릴 붙드신다.

 

그 샘물은 다함이 없이 충만하다. 하나님께는 충분한 자비가 있다. 그리스도에게는 충분한 공적이 있다. 가장 큰 죄와 죄인이 용서받는 것은 복음에 의한 것이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 주 안에서 지어져간다. 수요일, 금요일 아이가 퇴근 후에 와서 같이 성경공부를 한다. 에베소서로 시작했는데 그 안에 우리의 정체성을 알고자 함이다. 또는 일주일에 두어 번 누구와 한 시간 이상씩 통화를 한다. 저는 혼자 살고 장애로 일그러진 몸으로 사투를 벌이듯 몸과 마음을 다잡는다. 저들과 대화할 때면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아이는 먹는 약 때문에 백혈구가 줄어서 조만간 결정해야 한다. 약을 바꾸어야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나는 자주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을 들고 주 앞에 호소한다. 저마다의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고, 닥치고 난 뒤에 겪을 어려움은 두렵기만 하다. 살아온 날들도 원통하고 서러울 따름인데 남은 날들도 괴로움으로 두려울 따름이라, 저마다의 사연을 듣다 나는 말 문이 막힌다. 어떤 일에 뭐라 조언하기도 쉬운 게 아니다. 흔히 우리는 남의 말이라 쉽다. 정작 나 역시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를 고백하고 주 앞에 함께 기도하기를 부탁한다. 그런 가운데도 이제 우리에게는 우리 영혼을 위해 끝없이 넘쳐나는 샘물이 있다. ‘열린 샘’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주 앞에 나아오는 자는 그 샘의 은혜를 입을 것이다. ‘다윗 족속’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거민’ 즉 부자와 위대한 자들과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자들에게도 그 샘은 열려 있다.

 

우리는 그의 피로 죄에서 씻김을 받았다. 그리하여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5-6).” 하는 사도의 중보도 우리에게 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있던 우상 숭배는 사라질 것이다. 우상에게로 이끌던 잘못을 치유 받게 될 것이다.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으리라.’ 하신 오늘 말씀이 그 증거다(2). ‘그들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호 2:7).”

 

어제도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하여 듣다 그의 시간과 건강을 두고 주께 구하였다. 우리는 저마다 말할 수 없는 비밀 같은 허점을 안고 산다. 이를 쉬쉬하느라 사람을 피하거나 거짓으로 대한다. 교회를 크고 왁자한 곳으로 다니고 성도의 친밀한 교제를 피한다. 서로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 혹은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서로들 뒷말을 한다. 남의 말은 언제나 별미 같이 달콤하다. 그러니 성도와 성도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위선과 거짓과 부풀려진 말들 때문이다. 그것으로 힘들어하는 이에게 먼저는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허물어지기를, 이를 위한 특별 기도를 제안하였다. 또 하나는 자신의 어떤 허물이라도 이를 더하신 이를 인정함으로 부끄러움이나 노여움에서 놓여나기를 구하였다. 사람이 사람 눈치 보며 사는 일처럼 서러운 일도 없다. 모든 영혼이 이 두 거대한 우상, 즉 세상과 육체에 속하여 살면서 하나님과 막히고 사람들과 거짓으로 사는 일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여기서 거짓 예언도 한몫을 했다. 거짓 예언이란 의도적인 왜곡도 있지만 자기만의 오해도 있다. 하여 ‘내가 선지자들과 더러운 사귀와 귀신의 지배를 받는 선지자들을 이 땅에서 떠나도록 할 것이라.’ 하심을 눈여겨보게 된다. “사람이 아직도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가 예언할 때에 칼로 그를 찌르리라(슥 13:3).” 말씀을 멋대로 전하고 믿고 자기 식으로 간추려 사는 자를 죽이라 한다. 또한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환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4).” 오늘도 위선으로 두 얼굴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저들은 세상이 끝나기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악마는 더러운 영이다. 죄와 부정함은 거기서 나온다. 악마에게는 자기 이익을 돕고, 자기 지시를 따르는 많은 ‘예언자’들이 있다. 곧 말씀을 뒤틀거나 멋대로 해석하여 자기들 좋을 대로 풀이하고 의지하며 산다. 이런 자를 물리치라 하시는 것이다.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어찌 됨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5-6).” 곧 정직한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사 가르치는 자나 듣는 자나 모두는 주의 긍휼하심으로만 이해하고 따르고 순종할 수 있다. 스스로 무식한 일꾼이라 자처할 때 주의 도우심으로만 의뢰하게 된다.

 

그리스도께 직접 속하여 말씀을 충분히 알 수 있게 되었나 그럼 그럴수록 신약의 사도들은 더 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한탄하며 주의 도우심만을 구하였다. 그럴 때 나서는 것과 자신이 주목 받는 것에 경계한다. 하여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할 때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이교도들이 그 거짓된 신에게 예배할 때 칼로 찌른 자리다. 이교와 관계있던 자들이 회개하고 복음으로 돌아온 뒤, 그 과거의 미신을 부끄러워할 줄 안다.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다. 이는 ‘자기들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다. 가까이 하던 이들이 어떠했는지, 자신도 그들 가운데 있었음을 철저하게 회개하는 심정으로 산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7).” 여기 ‘내 짝된 자’는 ‘나의 가장 가까운 자’를 의미한다. 이는 단지 사람만이 아니고, 내가 의지하던 여러 우상이었거나 하나님을 대신하며 살았던 이상과 꿈과 희망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 대상이 되어 날 위해 대신 죽으시는 메시야를 내포한다. 곧 그리스도께서 잡히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가리킨다. 여기 ‘작은 자들’이라는 것은 비록 사람들이 보기에 미천한 자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오늘 우리 자신들로, 신자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손을 들어 복 주신다.

 

이와 같은 중의적인 의미에서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1-32).”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는 주를 버렸고 동시에 찾았다. 이에 ‘여호와가 말하노라.’ 하시며 전하길,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8-9).” 이는 두렵고도 소망을 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에 따라 유대인들이 환난 중에 많이 멸망 당하고 그들 중 신자들은 영생에 참여하게 됨을 가리킨다. 그러나 남은 신자들도 환난 중에 시련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 시련은 신앙의 연단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하게 하고, 기도를 더하여 주와 친밀하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실히 한다.이때에 극성인 것은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1-12).” 오늘 우리의 현실이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예언자’라고 자처한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을 말한다. 백성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 부모들이 율법에 따라 그것 때문에 그를 찌르는 최초의 행위자가 된다.

 

할 때,

 

“너는 그를 따르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여기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신 13:8-9).”

 

우리로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는 모든 것을 끊어야 한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3).” 그리할 때에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신 33:9).” 인정에 끌릴 게 아니다. 그러므로 친족이라도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와 대립하게 될 때, 그들을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눅 11:26).”

 

하여 주 앞에 아뢰기를,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 54:1-2).

 

이는,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4).

 

그때에,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