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하현. 2026. 5. 29. 05:56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슥 14:1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16-17, 22

 

 

‘여호와의 날’에 두려움으로 주 앞에서 주를 바라는 게 복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상하고 변화무쌍하다. 때때로 밀물과 썰물이 서로 뒤섞이듯 조수가 대항하여 거세게 밀려오는 것 같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목적을 위하여 이 모든 게 이루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때로는 어려움으로 이해를 모아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본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1).” 하시는 말씀에서 예루살렘은 결국 약탈당하고 이는 정결하게 하는 불이 된다. 하나님이 열방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신다.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2).”

 

이르러 ‘여호와의 날’이라 하신다.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 나누이리라.’ 하셨다. 유대를 침략한 적군이 유대의 재물을 그 나라 안에서 나누게 될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이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 하셨다. 이 말씀은 로마의 유대 침략을 예언한 것이다. 더 나아가 주의 재림 직전에 있을 유대 민족이 당할 환난을 가리킨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3).” 곧 교회를 침략하는 적 그리스도를 여호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멸하시기 위해 강림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전쟁하신 일은 과거에도 있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수 10:14).” 하신 것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으므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들과 그들의 땅을 단번에 빼앗으니라(42).” 하신 것도,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삿 4:15).”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릴 위해 싸우신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삼상 7:10).”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슥 14:5-6).” 곧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다.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겨진다.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 것이다. 우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 하되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하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 한다.

 

여기 감람산이 동서로 갈라져 큰 골짜기가 생긴다는 것은 유대를 침략하던 적군들이 산위에 진을 치고 있다가 사방으로 도망한다는 의미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에 감람산에서 하신 것 같이, 그 때부터 사도들이 사방으로 헤어져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뜻을 함축한다. 산이 갈라지므로 길이 나서 가게 되듯 저들이 각처로 가게 되어 복음을 전하였고 오늘에 이르러 이 동방의 작은 나라에까지 주의 복음으로 가득하게 된 것이다.

 

이 말씀은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사 2:2).” 하신 것과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미 4:1).” 하신 것도 연관이 있다. 곧 하나님의 성전이 모든 산 꼭대기에 높이 솟으리라는 말씀에 기준하여 감람산이 갈라진 것은 그 지대가 무너짐에 따라 낮아지고 예루살렘은 높아지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여호와의 성전만이 높이 솟아날 것이다. 곧 이것은 물론 유대에서 난 하나님의 율법이 온 세계에 전파될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모든 해석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감람산에 오실 것이다! 그가 강림하실 때에는 여러 가지 두려운 일들이 있을 것은 사실이고, 지진도 일어날 것이다.

 

여기서 ‘아셀’은 감람산 한 끝에 있던 촌이다. 그 때에 사람들이 도망한다 함은 주님의 재림과 함께 있을 두려운 현실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여호와께서 모든 거룩한 자와 함께 오신다.’ 곧 그가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을 가리킨다. 앞서 간 성도들과 함께 말이다. 이는 주의 재림을 일컫는다. 앞서 주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어 거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 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 4:21-22).” 보면 교회가 더 어렵다. 교회를 지키며 섬기는 이들이 그 자리를 지키는 게 어려워진다.

 

더러는 하나님의 일이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아는 주의 사역자들이 사는 데 따른 사투로 사명을 삼고 있다. 자신의 몸의 질병으로 이를 돌보면서 말씀을 준비하고 주어진 한 영혼으로 씨름하는 일은 눈물겹다. 폐가 좋지 않아서 하루에 한 컵 가까이 객담을 뱉어내고 여러 방법으로 돌보고 위하는 일에도 힘에 겨운데 저는 종일토록 말씀으로 씨름하며 한 주간의 설교를 준비한다. 누군 당뇨 합병증으로 신장이 상해서 투석을 하는데 한 번에 네 시간 이상씩 고통을 감내하고 이삼일이 멀다하고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 그뿐인가? 생활이 찌들어서 먹고 살기도 급급한데 그런 가운데서도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 눈물겹다. 그러니 때론 우리의 이 아이러니한 현실을 어찌 이해하고 묵상하며 수긍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의 육신의 연약함으로 주를 더욱 바란다고 하나 고달픈 것은 사실이다.

 

그럼 가운데 ‘남은 자들’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슥 13:8).” 여기서 삼분의 일과 동일한 자들, 절반은 포로로 끌려갈 것이며 언젠가 그들은 거기서 돌아올 것이다. 백성들 중에 남은 자들은 그 도성에서부터 멸절되지 않을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고 각지로 달려간다. 하나님의 도성과 땅 위의 교회에서 쫓겨남을 면하게 될 것은 저들이다. 거기에는 십분의 일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사 6:13).” 물론 많은 자들이 타협하고 거짓 목자로 전락한다. 자신을 위하여서 복음을 내려놓기도 한다. 그야말로 다들 자기 코가 석 자다 보니 뭐라 탓하기가 어렵다.

 

그런 가운데도 “너는 터럭 중에서 조금을 네 옷자락에 싸고 또 그 가운데에서 얼마를 불에 던져 사르라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겔 5:3-4).” 하심 같이 모든 걸 던져버리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주 앞에 나아가는 목회자들도 여럿 있다. 내 곁의 부한 목자보다 어려움의 나락에서도 교회를 떠나지 않는 목자들을 주목한다. 저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바라고 섬긴다. 자신들의 처지를 우선하지 않으나 그 또한 사역이라 여겨, 몸 하나 건사하며 주신 길을 묵묵히 걷는 게 사명이었다. 별의 별 경우가 다 있다지만 누구는 기어이 목회를 등지고 자기 살 궁리로 평온하여져서 좋다고 하니, 그의 나아진 형편을 좋다고 해야 할지 의구심으로 바라봐야 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게 ‘여호와의 날’의 일이다. 그 길이 예비되어 모든 산과 언덕마다 낮아질 것이라, 하심을 스스로 피해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다만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40:4-5).” 하실 때 우리의 어려움도 주의 사명이라. 다들 우리를 눈여겨본다. 그때에 주의 이름으로 그 길을 걷는 것이 주의 영광이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란 주신 상황에서 주를 인정하는 것이겠다. 스스로 살 길을 찾아 현실을 모면하느라, 사역의 길을 떠난 자들에 대하여는 뭐라 말하기 어렵다.

 

분명히 때가 가까울수록 교회는 어려움을 겪는다. 세상적으로 어떤 성과나 기대에 못 미쳐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거나 멀리할 수도 있다.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 그럴 걸 왜 그 길을 자처했나? 하며 조롱하고 한심하게 여기는 게 사실은 가까운 사람으로부터다. 더러는 한심하다는 눈치를 받으면서 가까웠던, 나를 잘 알 거라 여겼던 자들로부터의 눈총이 어려워서 주께 호소한다.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시 55:11-13).

 

그리하여 가까울수록 이해받기 어렵고 늘 또 같은 타령 같아서 민망하기도 하다. 조금은 나아진 것, 어떤 성과를 기대할 텐데 일생을 제자리걸음 하는 것 같이 한 곳을 맴돌 뿐이라, ‘산의 골짜기’는 복음의 교회이다. 거기는 피난처를 찾아 오늘 도망자들의 은신처가 된다. 그리로 도망한 자는 구원받게 되며, 그러한 자들의 수가 더하여질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산’을 골짜기로 만드셔서 ‘길이 되게 하셨을 때’ “보라 그와 같은 무리들이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 대장장이들은 사람일 뿐이라 그들이 다 모여 서서 두려워하며 함께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사 44:11).” 하는 시절을 사는 동안,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8-10).”

 

교회는 그러하여서 더욱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던 자들이 그 골짜기로 돌아올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던 이방인들도 가까워질 것이다. 이와 같은 결합은 하나이신 성령에 의해 아버지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보면 늘 열에 아홉이 교회를 떠났거나 등지고 살고 있었다. 어쩌다 느닷없이 연결되는 이가 자신의 지나온 날을 풀어놓을 때 나는 이 모든 말씀의 실제를 보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저들은 다시 돌아가 제 길로 간다. 나는 늘 예배 전에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하는 찬송으로 시작한다(새찬송가 190장). 이는 엄연히 성령으로가 아니면 나도 저도 한 치 앞을 모를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위로다. “여호와가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라.” 한다.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슥 14:7).” 그처럼 혼합된 생활 가운데서도 모든 사건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확신하게 한다. 저와 내가 아무 상관도 없던 시절을 지나다가 이처럼 만났다. 누구는 글로, 누구는 말로, 누구는 기도와 협력으로 마주하며 서로가 같은 하나님으로 시종일관 그 뜻을 구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 이 작은 교회는 오늘도 유지가 되고 살았다. 모든 바퀴가 오직 하나의 바퀴를 만들 뿐이고, 한 방향으로 굴러가듯이 우리는 서로 다른 위치에서도 오직 한 날을 이룰 뿐이다. ‘한날’ 이 삶에서의 요즘, 한 순간에 이루어가는 주의 뜻을 같이 공유하며 찬양한다.

 

이때로부터 여호와의 말씀은 주변 나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8).”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 흐른다.’ 열방에 회개와 용서를 전파하게 될 자들이 그곳에서 시작할 것이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7-48).” 그러므로 저마다의 어려움이, 그 골 깊은 한숨 사이로 복음이 가는 길을 열어낸다. 하나님의 영이, 은혜가 뒤따르며 이를 증명한다. 그 곳에서 생수가 흐른다. ‘하나님의 도성을 기쁘게 하는 그 생수의 흐름은 나라를 기쁘게 하고 좋은 물이 나는 여호와의 동산 곧 낙원으로 만든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3).”

 

비로소 우리는 ‘특별한 하늘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쪽 림몬까지 이를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 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10-11).” 이것은 유대에서 특별한 은총을 나타내고, 예루살렘이 예시해주는 교회의 모습으로 한 풍성한 은혜와 성도들의 열매가 그 밖의 많은 곳으로 전파될 것이다. 세상은 점점 서로서로를 파멸시킬 것이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크게 요란하게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13).” 즉, 여호와께서 그들로 크게 소란케 하신다. 정치가 경제가 서로의 주장과 진영논리가 싸움에 싸움으로 번져간다. ‘서로가 물고 뜯는 것이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

 

그러한 때의 우리 교회는 작으나 평안하고 불안한 시대이나 안정되다. 그리하여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20-21).” 정제되고 고운 가루와 같이 우리의 신앙은 주 앞에서 정결, 성결한 교회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시 55:1).

 

주 앞에 모두 아뢰며, 저마다의 사연을 놓고 주를 의뢰함이니, 더러는 사는 게 힘에 겨워 힘들 때면,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7-8).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었으나,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16-17).

 

하여 오늘도 주 앞에 올라와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22-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