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하현. 2026. 5. 30. 05:50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말 1:5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시 56:11-13

 

 

풍성하여 넉넉할 때 배은망덕해진다. 상대의 호의와 선의를 자신의 권리로 안다. 함부로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그 오만함의 척도는 겸손을 잃은 데서부터다. 오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마치 자신들의 특권이나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알았다. 그 하나님의 극진하신 은혜를 함부로 여겨 자신들의 권세라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삶은 배은망덕하였고 기고만장하여서 마치 하나님을 같잖게 여기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1).” 먼저 그에 대해 경고하신다.

 

경고는 재앙이나 환난이 있을 것을 알리시며 책망하는 말씀이다. 이는 앞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심으로 그리 경고하시는 까닭을 밝히신다.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여지껏 사랑을 독차지 하였으면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 하고 묻는 게 너무 철딱서니 없고 배은망덕하다. 하여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2-3).” 하고 이스라엘을 남달리 사랑하셨음을 밝히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실 때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영혼은 불쌍하다. 선지자 말라기는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미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신앙을 강조하기 전에 먼저 그런 행위를 가능하게 하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한다. 곧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신 것만큼 저들은 그것에 대한 감사를 인정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 모든 종교적 행위가 있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온전하지 않았음을 근거로 한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신 사실의 변증하는 그 자체가 어이없는 일이기는 하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신 사랑은 무엇보다 저들을 ‘택하신 사랑’이었다. 곧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신 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연한 것도, 어떤 계기로 저들의 행위에 따른 게 아니었음을 알게 하신다. 곧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다. 그 기준을 우리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이 일은 창세전에 일이다. 모든 우주와 만물이 생기기 전에, 에서와 야곱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이를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3).”

 

이는 저들이 아직 나기도 전이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의 모친 리브가가 임신할 때부터 언급한다.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0-11).” 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이성을 능가하는 일이다. 그때에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12-13).” 아직 저 두 아들을 낳기도 전의 일이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14).” 이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어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15-16).” 하는 바울 사도의 설교가 기가 막히다. 하나님은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7-18).”

 

이와 같이 에서는 야곱의 형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야곱에게 ‘장자의 기업’을 주셨다. 이것을 보면 ‘선택’은 자연적 질서로 말미암은 게 아니다. 어떤 우리의 노력이나 기여에 따른 것도 아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것이다. 칼빈의 표현처럼 불가항력적인 은혜이고 사랑이다. 사랑은 이렇게 객관적 조건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행하는 자의 무조건적인 결정에서 나온다. 여기서 미워하였다는 말은 역시 에서를 택하지 않은 결과 그의 지은 죄대로 갚으신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하셨다.

 

에서의 자손으로 에돔은 황무지가 되었고, 맨 처음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정복하러 가는 도중에 그리 된 것이다. “보라 내가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주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을 놀램과 비웃음 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5:9).” 곧 저들이 주를 멸시하고 함부로 죄악 중에 살기는 하였으나 그 결과로 그리 된 게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그리 될 것으로 알게 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을 우린 어찌 이해하고 파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고 저들은 이내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지도 못했다. 이 또한 은혜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 결과적으로는 에돔의 교만이나 에돔은 그 자체로 그런 존재였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자기 힘을 믿어서 어디까지든지 스스로를 회복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그러고 사는 오늘 날의 사람들에 대하여도 같은 느낌이다. 어찌 저들을 우리 힘으로 돌이키거나 할 수 없다.

 

늙으신 나의 장모는 여든아홉이 된 둘째 여동생을 위해 매번 기도하는데, 저는 신주를 집안에 두고 무속인으로 살아간다. 그들과 살았던 옛날을 기억하며 돌이켜 회개하고 주의 자녀가 된 장모는 부디 자신의 동생에게도 생이 다하기 전에 주를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어제도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그런 내용으로 기도가 한참 이어질 때 나는 속으로 그 일이 가능하겠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하긴 우리 장모나 그 집안의 내력으로 손위처남과 장모의 회심은 기이한 일에 속한다. 앞전에 그들의 장본이라 할 수 있는 ‘동대문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그 마지막 순간에 나는 귀에 대고 예수 믿기를 권하여 기도하였던 기억이 난다. 저는 이내 눈을 감았고 돌이킬 기회도 얻지 못하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나 역시 엉터리로 살던 때라, 그러면서도 예수를 영접하고 죽기를 바랐다.

 

이에 대하여 ‘나 하나님은 교만을 제일 미워하신다.’ 에돔이 자신(자기를 믿음)한 바와 정반대로 행하셨다. 곧 그는 에돔을 무너뜨리심으로 이처럼 본으로 삼으셨다. 앞서도 밝힌 바 저는 교만하기 전부터 교만하기로 작정된 사람이다. 우리로 의롭다 하심도 우리가 돌이켜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 이미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일이다. 이러한 성경의 교리를 우리는 우리의 이해로는 다 알 수 없다. 요즘 아이와 에베소서를 성경공부하면서도 새삼 드는 마음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이 일의 발단을 우리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만 정의할 수 있다. 그 사랑의 이유와 동기에 대해서는 함부로 가타부타하기 어렵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 어떤 이유로 그리하신 것인지는 훗날에 하나님의 품 안에서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목적은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6).” 하여 그럴 수 있게 하신 이의 은혜로 우리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지, 어떤 남다른 희생과 노력으로 그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를 누구에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매우 불가능한 일이다. 마치 아이가 느낌으로 엄마를 알고 모성에 대한 본능으로 엄마 품에서 안정을 얻는 것과 같다. 이 느낌, 영원 전에 우리 안에 두신 이, 설명하기 어려운 확신으로 믿음이 더해졌다. 곧 우리의 믿음이 어찌 상식적으로 설명될 수 있기는 한 것인가?

 

할 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심을 묵상하게 된다.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말 1:5).”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밖에 이방 세계에서 그 위엄을 나타내신다는 의미다. 곧 그가 에돔을 멸망시키므로 역시 모든 이방에 대한 주의 주권이 확실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곧 에돔으로 에돔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신 것은 교만한 자로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임을 보이신 것과 같다. 그 일을 이루시는 데는 애굽의 바로도 종으로 세워서 사용하신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찌 행하였나?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6).” 그러니 돌아볼 줄 모르고 돌이켜 회개할 수 없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렇게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하고 저들을 지목하셨다. 그리고 이르시길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하고 그 수신자를 분명히 하였다.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실 때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고 오히려 뻔뻔하였다. 이 세상 모든 윤리 제도는 하나님께서 내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데서 유래한다. 초등 학문이라고 할 지식과 상식과 서로에 대한 예의도 이를 기초로 한다. 말라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하고, 주인과 종의 관계로 그 도덕적인 관계를 설명하였다. 곧 하나님에 대한 제사장들(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의미에서)의 경건을 이렇듯 질문하여 요구하셨는데 저들은 오히려 반문한 것이다.

 

실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아버지와 같으셨다.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신 32:6).” 하였던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나라로 창조하시고 또 양육하신 까닭이다. “그의 종의 말을 세워 주며 그의 사자들의 계획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에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 하며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사 44:26-27).” 이와 같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함께 하심을 이제 나는 확신한다. 돌아보면 아주 어릴 때, 나의 의사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셨다.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렘 31:9).”

 

이에,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시100:3).

 

하나님은 우리의 주가 되시고, 우리를 소유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며 또한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공경은 기도함과 찬송함과 감사함과 순종하므로 이루어진다. 두려워함은 공포가 아니고 경외함으로 경이로워서 감히, 함부로 경솔하지 않을 것을 알게 한다. 곧 우리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 때문에 항상 두려워한다. 이는 신앙의 중요한 단서다. 내 안에 신앙이 있는지,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지, 하는 데 따른 기본적인 척도가 된다. 진정으로 산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산을 함부로 오르지 않는다. 물을 좋아하고 바다를 사랑하는 자들은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에게 겸손하고 교만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것과 같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 따위로 하나님께 반문하지 않는다. 참 신앙은 날마다 주 앞에 바로 서길 바라는 만큼 이만하면 됐다, 하는 따위의 태도로 주 앞에 오지 않는다. 보면 더러는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어요? 하고 물을 때, 자신들이 한 것에 대해 스스로는 할 만큼 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언제든지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산다. 마비된 심정은 늘 자신을 우선하여 변명한다. 그러면서 하는 짓이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말 1:8).” 마치 모를 줄 알고, 그래도 되는 것처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13).”

 

우린 너무 아무렇지 않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살고 있다.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멸시하고, 무의식적으로 무성의하다. 예배는 행위로만 그러하고 형식적이다. 그래놓고 신앙인으로, 믿는 자로 자신을 치부하여 마땅히 누려야 할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요구한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 56:1-3).

 

남들은 물론 나 자신도 그러하여서 나조차 나를 이기지 못하고 산다. 그러므로 오늘도,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4).

 

나조차 나를 감당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으로야 오죽할까 하는 심정으로 주 앞에 비옵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10).

 

그리하여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1-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