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말 2:10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7-8
마음을 정하고 뜻을 다해 주를 섬기는 일이란 점점 단순해진다. 다른 일들로 쓸려 다니지 않게 된다. 마치 하루의 동선이 일정하여져 행동반경은 그 사람의 영역이 된다. 만나는 사람이나 관심을 두는 일이 한정되어진다. 여러 일로 부산하였던 날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러고 살았나 싶을 정도이다. 목사로 그 사명을 지키는 자의 특징이 그러하였다. 내가 아는 이들은 여러 일을 겸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정치화된 자들은 늘 어딘가 붕 떠 있는 사람 같다. 챙기고 만나고 취해야 할 일과 사람으로 넘쳐난다. 저에게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란 여간해서 틈이 날 때뿐이다.
오늘 본문에서 우린 제사장을 주목하게 된다. 앞에서 이야기된 것이 제사장들에게 지시되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1:6).” 하실 때, ‘만군의 주가 네게 말하기를’ 하고 먼저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런 가운데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하고 지목한다. 책망되는 죄는 저들이 제물에 대하여 범한 죄이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7).”
그들은 백성들이 가져온 제물을 바침으로 조금은 변명이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들이 마땅히 그랬어야 할 만큼 선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제사장들의 잘못이 아니라 백성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여기 이른바 ‘더러운 떡’이라는 것은, 성전 안에 드리는 진설병이 아니다. 그 이유는 진설병은 제단 위에 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 ‘떡’은 ‘나의 단에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희생 제물의 고기를 뜻한다. 즉 고기를 떡이라고 한 표현처럼 음식이란 표현으로도 더러 쓰였다. “그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들의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레 21:6).” 그런데 이 희생의 고기를 드리되 더러운 것으로 드렸다고 하는 것은 흠 있는 동물로 드렸다는 뜻이다. “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너희가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22:20).”
이것은 주의 제단을 더럽게 하면서도 그렇게 한 줄 모르고 그 죄악을 부인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말로 멸시하지는 않아도 말보다 무게 있는 행동으로 그리하는 경우가 더러 많다. 그리하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 정도는 괜찮다고 한다. 이는 마비된 심령과 같다. 소위 ‘말함을 인함이니라.’ 하는 말씀은 그들이 구설로써 말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 행동으로 무언 중에 그렇게 나타내면서 사는 버릇이고, 버릇은 약점이 된다. 곧 인격이 된다.
따라서 책망된 타락에 대해 오늘 본문은 근원을 말한다. 곧 제사장의 잘못은 백성들의 선생으로, 율법의 해설자로 신탁 받은 자로서 죄책이 있다. 이것은 아직도 복음의 사역자들 손에 남아있는 역할이다. 비록 이 시대의 목사가 제사장들처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율법 곧 성경을 묵상하고 전하고, 말씀으로 권면하고 자신도 그러한 경건의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권면이 그들에게 관계되어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좋은 제물로 자신이 드려져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그렇게 시작한다.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1-2).”
‘이같이 명령하노라.’ 하심은 앞서의 말씀으로(1:6-14), 사역을 맡은 자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하여야 마땅한데, 이런 명령이 삶에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전하는 말과 생활에 괴리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전한 것을 자신이 순종하지 않으며, 마음에 두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비는 복을 하락하지 않으시는 것은 마땅하다. 그렇게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하고 말씀하시는데, 순종하지 않은 결과로 벌써 저주받은 일이 된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그 사역은 병들었다. 사욕에 눈멀고, 나태와 게으름으로 몸은 둔하여지고, 자신들의 기호에 도취되어 사는 사역자들이 의외로 많다. 겉으로야 누가 알 수 있겠나만 자신에게는 찔림이 있을 텐데 그 또한 둔하여져서 스스로가 괜찮다고 여기면서 문제다.
그럼 당연히 그들이 빈 복을 주시지 않고 저주를 받도록 하시는 것은 앞으로 더 심해진다는 뜻이 된다. 하나님은 재앙을 내릴 때도 단번에 다 내리지 않으시고 점차 많이 내리신다. 이렇게 하시는 까닭은 그의 자비하심으로, 돌이켜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시니 저마다 잘못된 습관으로 그 영혼은 상하고 심령은 힘을 잃었다. 성경의 이 꾸짖는 말씀(1:6-14)을 마음이 간직할 능력이 없다. 상실한 영혼으로 주를 부르며 외치는 입만 살았다. 그러니 오늘 말씀은 ‘너희 제사장들아! 순전히 너희에게 이르노라(1).’ 하시는 것이다. 곧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선하신 뜻과 그를 올바르게 섬기는 길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했다.
오늘 날 교회의 목사란 딱 그 일만 하면 된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이 있다. 우선은 말씀으로 모든 상황과 여건을 판단하고 묵상하고 주시하고 권해야 했다. 누구의 어떤 과오나 그릇된 삶을 지적하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계명’ 곧 말씀으로 그 중심을 삼아야 한다. 요즘은 워낙에 사람들의 갈등이 심화되어 내남없이 정신과적인 질환을 안고 산다. 이는 목회자도 다를 게 없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래서 약물을 의지할 수는 있지만 주술적으로 서로 무슨 상담이나 조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드는 일은 주의해야 한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문제를 스스로 지려하지 않고 남을 의지하려 한다. 문제를 직면하기보다 외면하기를 바란다.
그러다보니 누가 들어주길 바라지만 뭐라 이르거나 자신의 잘못을 지목하면 이를 못 견뎌한다.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이를 수치심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는 내남 없다. 목회자도 다르지 않다. 어떤 이는 지나치게 활동적이어서 진득하니 앉아 말씀 묵상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구상하여 새로운 이벤트를 자꾸 만든다. 수시로 어디 봉사를 가고 선교라는 이름으로 교인들과 왁자지껄하다. 겉으로는 활발하고 사람들도 좋아라하고 참여한다. 또는 지나치게 비사교적이라 자기 연구에만 몰두한다. 혹은 게임이나 오락에 빠져 산다. 그러니 그들의 활동반경은 극과 극이다. 모두가 말씀과는 멀다.
말씀은 이르기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요란하고 활동적이며 생동감이 넘치고 심지어는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 정도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신다. 오늘 말씀은 단도직입적으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말 2:4).” 곧 다시 말하면 ‘너는 내가 너희에게 보낸 명령을 알게 할 것이다.’ 하고 그 일을 규정하셨다. 먼저는 ‘각성’과 ‘개혁’을 위해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이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보내진 말씀임을 알게 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먼저 ‘제사장들’ 곧 오늘의 목회자들에게 내려진 것이다. 그들에게 보내졌을 말씀을 그들이 알아야 한다. 여기에 그 거룩한 백성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이 있음을 뚜렷하게 알게 한다. 곧 왜들 저마다 상한 심령으로 괴로워할까? 말씀을 도식적으로 머리로는 아는데 삶으로는 적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어지간하면 성경에 대한 지식은 차고 넘친다. 그야말로 AI시대라 검색 몇 번이면 여느 설교에서의 설명보다 더 이해하기 쉽다. 개인방송채널도 여럿이라 듣고자 하는 ‘인기 있는 목사들’의 설교가 풍족하다. 그러니 더러는 그것으로 교회를 떠난다. 실물의 목사보다 가상의 목사로 더 신뢰한다. 실제 인간적인 관계가 소멸되고 있다. 혼자 감동하고 혼자 깨닫는 식이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만군의 여호와’가 ‘보낸 것’이 따로 있다. 이는 지식으로가 아니다. 이해와 상식의 범주도 아니다. 삶은 각각이라 저마다의 소화능력도 다를 텐데, 그의 언약은 ‘그가 명한 말씀’이다. 여호와는 그 명령을 다시 세우기 위해 선지자를 보내셨다. 그 계명은 그들이 모독했다고 해서 삭제될 수 없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달라질 수 없다. 어쩌다 화상으로 마주하고 손바닥 안에 쥐고 듣는 말씀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베푸신 영광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라.’ 하심은 성령의 감동으로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같은 시선과 호흡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내려 준 영광이 무엇인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5-6).”
먼저는 언약의 말씀으로다. 목적은 주를 경외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불의함이 없고 화평과 정직함으로 하나님과 동행이 따른다. 그러면 죄악에서 떠난다.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하는 데서 우선 멈추어야 할 것 같다. 이 말씀은 그리하여 순종하게 하려 하심이다. 또한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하심으로 ‘레위’라 불리는 모든 ‘참 제사장’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다. 참 제사장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다.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 그의 생활도 경건하여 간다. 불의한 교훈을 가지지 않는다. 목사의 삶은 화평과 정직으로 하나님 앞에서 평화의 관계와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사역을 행한다.
화평과 순결은 하나님의 종들로서 자격이다. 우리가 이런 자격을 가지고 사역할 때 다른 사람을 주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다. 늘 서로가 같은 동선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정해진 시간 속에서 그의 역할과 사명에 충실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 언약은 생명과 평강이라.’ 하실 때 하나님의 존귀와 예배를 위해 구별된 생활이 필요하다. 스스로가 보장해야 하는 시간이다. 각기 정도는 달라서 사역의 특징은 있을 수 있겠지만 서로가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되는 삶으로 같다. 하나님은 비천한 종인 오늘의 나와도 그러하시다. 언약하셨고, 하나님의 역사를 행하게 하셨다. 삶 속에 이를 받아들여서 나의 동선을 대부분 일정하다.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불리는 말씀으로 접근하다. 누구의 어떤 사연도 저마다 절절하겠으나 해결 방법은 언제나 하나다. 우리의 영혼에 ‘생명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뿐이다.
그런데 종종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8).” 하시는 오늘 말씀이 우리의 나태와 태만과 적당함으로 스스로 합리화하는 생활 때문이다. 입으로는 말씀을 말하지만 아무개는 그렇게 게임에 빠져 산다. 누구는 여전히 우유부단하게 자신의 사는 일에만 급급하다. 누구는 너무 정치화되어 모임도 많고 보이려는 업적도 크다. 정작 성도 개개인의 삶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누구는 권력구도를 유지하며 시스템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인다. ‘영적인 제사장’은 신자들 모두가 함께 누리는 참된 은혜의 언약이다. 그 언약은 생명과 화평의 언약이다. 그 언약은 개별적이지 않다. 영원한 화평과 영원한 생명은 모든 신자에게 확신으로 주어져서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에까지 보증하는 것이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17).” 자신의 버릇이나 습관을 깨닫지 못할 때, 여호와를 괴롭게 하는 죄를 범한다. 스스로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자신만의 어떤 기호나 즐거움이 그러하다. 목사가 돈벌이에 급급하고 명예를 추구하며 사람들로 하여 인정받고자 할 때, 쓸데없이 부지런하다. 또는 나태하다. 그래서도 적당하다는 게 더러는 큰 장애물이 된다. 좀 살고, 건강이 적당한 이들 가운데 더러는 목회를 크게 귀히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마치 안 해도 그만인 것처럼 크게 문제의식이 없다. 가진 것이 적당할 때 더러 나타난다. 반대로 결핍에 찌든 이들이 자기만족을 위해 사역을 감당하기도 한다. 그런 이들은 진짜 열심이다. 겉으로는 그런데 늘 그 마음이 허기져 있다.
오늘 말씀으로 나를 돌아보며, 어떠한가? 묻다가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 57:1).
주의 이름을 부르며,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2, 4).
종종 내가 나의 약한 육신으로 복되다 하는 것은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아뢰고 고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7-8).
오늘도 말씀 앞에 나를 던지고,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9-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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