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마 3:1-3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 62:5-6
때로는 어떤 결정 아닌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이는 외부의 압력으로 그러한 게 아니라 내부의 판단으로 그러하다. 가령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소년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야 했다.’ 당시 저들은 유대에서 잡혀온 볼모이면서 동시에 다방면으로 쓰일 인재들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관리하여 왕이 먹는 산해진미를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이방 신상에 바친 제물들이었다. 그때에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1:8).” 말이 쉽지 이렇듯 결정하는 일은 스스로의 위험을 자처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떤 경우에 예기치 못한 판단으로 결정해야 할 때가 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시작한다. 곧 ‘그때에’ 하는 이 구절은 결정적인 어느 때를 말한다. 서슬이 퍼런 로마의 정권 아래 더욱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유다를 다스리며 신정통치를 하던 때이다. 그때는 예수님과 그의 가족들이 나사렛에 살던 무렵이다. ‘그 때’는 2장의 시점에서 약 30년의 차이가 있는 주후 28년 정도이다. 당시는 디베료 가이사 재위 15년이 되던 해이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1-2).”
여기서 ‘30’이란 나이는 모세 율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시기다. “곧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회막의 일을 하기 위하여 그 역사에 참가할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민 4:3).” 이는 결국 ‘율법의 완성자’이며, 인류 구속의 과업을 실행키 위해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인준해주는 하나의 중요한 시점이고 역사적인 증거자료가 된다. 세례요한은 히브리어로 요하난이란 이름에서 유래한 ‘요한’으로 제사장이자, 유대의 지도자로 주전 106년에 사망한 요한 힐카누스 이래 유대인들에게 흔히 사용되는 이름이었다. 이 이름은 신약에서만 네다섯 명 정도가 등장하는데 특히 본문에서 ‘세례 요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자주 나오는 다른 이름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로 활동한 ‘사도 요한’도 그런 의미이다.
세례 요한에 대한 언급에서 나는 항상 뜻 깊게 와 닿는 표현이 저를 ‘광에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3).” 실제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일정기간 활동하였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4).” 곧 구별된 삶으로 자신을 외따롭게 두고 연마하는 시간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대 광야는 여리고 남쪽과 사해 서쪽 고원 지대에 펼쳐진 황량한 석회암의 굴곡이다. 군데군데 오아시스가 있고, ‘엔게디 근처’에는 폭포도 있어 목초지로 이용되던 땅이다.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욜 2:21-22).”
이곳은 ‘십’ 황무지라 하기도 하고(삼상 23:14-15), ‘마온’ 황무지라 하기도 했으며(삼상 23:24), ‘엔게디’ 횡무지(삼상 24:1), 또는 ‘예루엘’ 광야(대하 20:16)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어떻든지 광야는 황량하고 척박한 땅이기는 분명하다. 이 모든 땅이 유다 지파에 속하였기 때문에 ‘유대 광야’로 지칭되었다. 즉 우리 인생에서 누구에게나 광야와 같은 시절이 있다. 끝도 없이 펼쳐져서 죽을 때까지 그러한 외로움과 고통 가운데 살아야 하는 이들도 수두룩하다. 날 때부터 부모에게 버려졌고 그 몸은 장애가 있어 혼자서는 생활하기 힘든 처지의 광야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중학교 때 우연히 가게 된 모 특수학교는 지체정신장애아들로 대부분은 고아였고 더러는 가정이 있는 아이들이 모여 생활하는 곳이었다. 당시 우리 교회 전도사님이 활동하던 밀알선교단체에서 토요일마다 들러 예배와 찬양과 아이들의 활동보조 역할을 하였다. 한 번은 같이 그곳에 가서 토요 학생부 예배를 드리고 같이 어울렸는데, 내 안의 어떤 동질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뒤로도 줄곧 토요일에 학교 끝나면 그곳으로 가서 아이들과 같이 놀다오고는 했다. 그러기를 꽤 오랫동안 하여서 마치 그곳 아이들처럼 스스럼없이 지내서 저들의 사정을 남다르게 이해한다. 그렇게 아직도 연관이 있고, 어울리는 친구 몇 명도 있다. 그러다보니 여러 사연으로 저마다 광야를 사는 것 같은 척박한 현실이 때로는 경이로울 지경이다. 팔다리를 쓸 수 없어서 몸으로 기어서, 또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 온 몸으로 표현을 구사하며 사는 이들도 있다. 결혼하고도 한동안 다니다 그만두었는데….
이와 같이 광야는 소수의 사람이 칩거(蟄居) 생활을 하며 흩어져 살았던 예수님 당시의 극단적 유대교 종파로 엣세네파도 있었다. 또는 로마의 박해나 유대 지도층의 억압에 환멸을 느껴 은둔하여 생활하는 경우도 있었다. 누구에게는 자발적인 터전이 누구에게는 피치 못할 터전이기도 하다. 하여튼 세례 요한은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눅 1:80).” 뿐만 아니라 저의 사역의 시작이 광야였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요 3:23).” 요한을 엣세네파의 일원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근거는 없다. 다만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에게 광야는 단순히 소외된 지역이 아니라 ‘예언적 의미’를 갖고 있는 특수한 환경이었다.
조상들 또한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40년을 살아야 했고, 가나안을 정복하고 왕정시대에도 특히 다윗은 사울을 피해 광야를 터전으로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들에게 율법도 광야에서 계시되었고, 열심당원들도 광야를 은신처로 삼고 살았다. 그래서 더러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그리 오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24:26).” 이렇듯 세례 요한의 활동 무대가 광야였던 것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곧 요한의 사역 현장의 현재성과 역사성을 광야에 두고 언급하는 오늘 본문에서 이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을 알 수 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곧 세례 요한이 천국을 전파하는 데 있어 ‘광야’야말로 피폐한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데 적절하다. 가령 나는 자주 그렇게 묵상한다. 부르심에 합하여 비록 억지로 또 끌려온 셈이기는 하나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면 뭔가 다를 줄 알았다. 예전의 나로 볼 때 어디 그럴듯한 목회 사역지나 교회가 준비된 줄 알았다. 어릴 때부터 나환자촌에 있는 교회나 앞서 밝힌 지체정신장애보육원 같은 데를 상상하기도 했었다. 또는 아버지의 인맥(?)으로 어떤 교회, 색다른 목회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글방이 고스란히 교회가 되게 하신 것도 모자라서 목사가 공황을 겪고 범불안증을 안고 살아야 한다니… 그렇게 또 ‘그런 사람들’만 어쩌다 오가게 하시는데, 저들이나마 이곳에 머무는 게 아니라 광야의 스쳐가는 바람 같아서 기껏 이래저래 공감하고 개입하여 좀 나아졌는가 싶으면 다들 자신들 교회로 가거나 도로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경우라….
나는 자주 ‘이게 뭔가?’ 싶을 때면 이 구절을 생각하였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3).” 곧 나는 그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족한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사명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는 것. 또 하나는 ‘주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는 것. 결국 내 손에는 쥐는 게 없다. 마치 사막의 모래 같이 손에 쥐었다 싶은데 어느 틈에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이 한동안은 허무하였고, 이게 다인가? 싶어서 ‘남들처럼’ 어떤 교회에서, 어떤 목회를 꿈꾸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마음을 정한 계기가 있다.
누가 아이 때문에 왔다. 아이는 습관적으로 자해를 일삼고 극한 대인기피증으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그때도 아이는 응급실에 실려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손목을 긋고 자해를 한 시점이다. 아이엄마는 서초동에 있는 대형교회로 다니는 믿는 이였다. 아이가 입원한 동안 아이엄마는 틈만 나면 오고, 전화하고, 이런저런 그간의 사정을 말하였다. 기구한 저의 결혼 생활과 친정 이야기는 차치하고, 아이에 대한 사연은 충격적이었다. 이를 글로 쓸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해서 아이를 억지로라도 끌어내자는 목표로 우선은 나를 돕는다는 이유로 시급으로 계산하여 하루 두 시간씩 와서 책장을 정리하거나 손으로 쓴 나의 원고들을 타이핑 하는 것으로 꾸며(?) 아르바이트로 하고 아이가 주 2회 두 시간씩 오기로 했다.
그렇게 두어 달 지나면서 서로 가까워지자 아이는 서서히 자기 이야기를 하였고, 심지어는 이를 글로 쓰기까지 되었다. 그때 나는 아이엄마조차 모르는 아이의 내밀한 사연을 글로 읽었고 그 영혼이 피폐한 가운데 있음을 알았다. 그렇게 마음을 열고 글도 쓰고 이를 소재로 하여 어디 문학상 같은 데 수기공모나 수필로 보낼 마음까지 서슴없이 나누게 되었다. 나는 아이에게 주일에 와서 같이 예배를 드리기를 권하였고, 아이는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이러한 진전을 나는 누구보다 아이엄마가 기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저이는 아이가 그런다면 한사코 서초동에 있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로 데려갈 것을 고집하였고, 그래도 상관없는데 아이가 이제 마음을 열기 시작했으니까 얼마 동안이라도 여기서 같이 예배를 드렸으면, 하고 권하였다가 저의 단호한 거절과 심지어는 주중에 보내는 것까지도 그만두게 되었다. 서너 달 동안 그래도 아이와 정이 들어서일까? 나는 그때 그 황당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참을 혼자 힘들어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아이엄마 입장에서 글방으로 족하였고, 나는 아이의 영혼의 문제로 접근하려고 하다 그리 되었다. 감정도 상하였고 하나님 앞에서도 이게 뭔가? 싶은 어리둥절함으로 깊은 회의에 들기도 했다. 그때의 말씀이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나의 사역은 그것으로 족한 것인지 모른다. 얼마 전 느닷없이 방문하였던 모 교회 권사님의 이런저런 사연으로도, 그 뒤 더는 어쩔 수 없는 지점에서 나는 늘 홀로 남겨지는 느낌이 든다. 비록 이 일이 ‘광야의 소리’ 같이 허무하게 흩어져서 더는 다시 들려지지 않을 것이라 해도 또 다른 누군가가 오거나 닿거나 할 때면 나는 다시 묵묵히 ‘주의 길을 준비할 뿐이다.’ 저의 길로 곧게 하는 게 나의 사역인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나의 감정은 필요 이상으로 이입이 이뤄지고, 한동안 그들의 사연은 광야 같이 나를 홀로 두는 것 같다. 그러니 어떻게든 살고자 하여 나로서는 다시 주의 이름을 부를 뿐이다. 기억이 희미해질 때까지 저의 이름을, 그 사연을 되뇌어 주께 아뢰거나 어쩌다 다시 연결이 되면 다시 시작하는 사람처럼, 나의 공든 탑은 다시 무너지기 위해 세워진다. 나의 전하는 소리는 바람에 흩어지기 위해 외쳐진다. 그 뒤로 성령이 어찌 인도하시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앞서 저 아이는 이제 서른이 얼추 다 돼 갈 텐데 어찌 지내고 있는지… 얼마 전 모친의 자살 이후 모든 생활을 포기하고 홀로 은둔형으로 살아간다는 어느 청년은 지금 어떤지… 예순 살에 남편을 암으로 잃고 교회도 그만두고(?) 수도 없이 많은 동호회 활동으로 바쁘게 산다는 이는 다시 교회를 다니고 있는지… ‘광야의 소리’는 다시 내게 들려주지 않으나 나로서는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 규정하고 마음을 정하였다.
‘회개하라.’ 나는 누구와의 만남에서든지 이를 주제로 한다. 나름 권사로 안수집사로 교회에서 열심인 자에게도, 어쩌다 교회를 떠난 자에게도, 심지어는 스스로 죄인이라 하며 동성애라고 하는 이에게도, 거짓말, 오락, 성욕, 도박 중독자들에게도 나는 동일하게 주제로 삼는 것이 회개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헬라어에서 순수한 의미로 ‘마음을 바꾼다.’ 하는 의미다. 단순히 ‘무슨 일을 후회한다.’ 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 새로운 행실로 바뀌는 것, 세계관 가치관이 새로 정립되는 것, 그 발판이 되는 게 회개이고 진정한 회개는 동시에 회심이다. 마음을 바꾸는 일이다. 나아가 전인격적인 참회로 하나님의 은혜가 깃드는 지점이다.
누가 좀 나은 줄 알겠지만 우린 다 똑같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어떤 사연을 두고 나는 저보다는 낫다고 여기는 경우들이 있는데, 광야는 절대적인 것이다. 상대적으로 논할 수 있는 터전이 아니다. 그것이 육체의 장애로든지 정신적인 장애로든지,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주 앞에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이 급박한 것은 ‘천국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회개의 이유를 밝히면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는 날이다. 저마다의 사연은 모두가 지옥 같은 광야에 산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요 1:23).” 이를 나 역시 스스로에게 알게 하였다. 뜻하지 않은 실패(?)와 가시적으로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는 현실에서 ‘나는, 광야에서 외는 자의 소리로라.’ 하는 것이 나의 고백이 되기까지 나는 여러 번 갈등하였고, 그만두고 싶었고, 다른 일을 하려 하였고, 굳이 이럴 거면서 왜 그렇게 강제로 이 길을 가게 하시는가? 하는 원망 섞인 기도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이로써 나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씀에 승복한다. ‘예비하라는 말은 정확하게 준비되었다는 뜻이다. 우연처럼 느닷없고 난데없는 나의 만남이 더러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나 이는 또한 천국을 예비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결국 주님이 가신 길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하심을 되뇌며, 요즘은 어릴 때 심장병으로 죽다 살았고 그때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이나 교회를 등지고 살면서도 아련하게 주를 사모하는 어떤 이를 두고 자주 기도한다. 스스로도 알지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으로 쉰 살을 살았다. 이제 어쩔 것인가? 하고 묻는 것 같은 저의 막다른 길에서도 여전히 저는 나중에, 다음에, 하고 미루고 있어서 나는 어렵다.
그런 나에게 먼저 선포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 62:1-2).
그러니,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3-4).
그러하나,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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