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37, 48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시 64:10
너무 복잡한 세상이다. 다들 그 속에 우주 하나씩은 품고 산다. 온갖 행성들이 떠돌며 질서를 유지하다가도 어떤 일로 출렁거리면 순식간에 뒤죽박죽이 된다. 그러다 서로 충돌하고 싸우고 다투며 부정과 분노와 변명과 타협과 우울이 혼재하다 순응한다. 이는 모두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다들 생각이 너무 많다. 족한 줄을 알지 못하고 저마다의 소욕을 따라 분주하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핵심은 하나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37).” 그러니까 그 속이 복잡한 까닭은 심령이 가난하지 못하여서이다. 그러니 사는 게 늘 지옥 같다. 산다고 열심을 다해 사는 일이 고단할 따름이라, 오늘 말씀은 다스리게 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3).” 가난하여서 그 심령은 하나님으로만 충만하다.
이를 구하여 애통하고, 애통하다 온유하고, 온유하여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하여 긍휼히 여김으로 그 마음은 청결하다. 청결하여서 화평하고, 화평하여서 모진 박해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 한 분으로 족한 것이다. 단순하고 명료한 마음으로 산다. 옳다, 아니다, 둘로 족한 마음은 온전하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 다들 저마다의 사연으로 그만하면 된 것 같은데 어떤 이는 어릴 적 그 속의 노여움을 안고 평생을 산다.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아홉 살 때 일을 기억하며 서러웠던 일을 되새긴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할 수 있는 것’은,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우리가 놓지 않음은 잡은 적이 없어서다. 사는 데 따른 소요경비가 모두 상대적이라서 누구는 집이 아홉 채가 있는데도 한 채를 더 가지려고 전전긍긍한다. 더러는 한 채도 없지만 아홉 채가 있는 자처럼 넉넉하기도 하다. 하여 세상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이라,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도대체 남들보다 서너 채 이상의 값으로 여러 개를 소유하고도, 그것으로 사느라 급급하여 찾아다닐 곳이 끝도 없으니 그 인생은 참 고달프다. 그러니 족한 줄을 알지 못하고 사는 영혼은 얼마나 더 채워야 채워질까?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잠 30:15).”
고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이에 오늘 시인은 구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시 64:10).
오늘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이와 같이 이르신다. ‘입을 열어’ 곧 그리스도의 입이 열렸으니 ‘떡으로만 살던 무리에게 생명의 말씀이 주어지게 되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4).” 이를 ‘가르쳐’ 이르시는 것이다. 가르침의 최종 메시지는 천국 복음이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23).” 바로 이 ‘천국 복음’이 오늘 본문의 ‘산상 수훈’ 또는 ‘팔복의 말씀’의 중심이다.
새삼 다시 읽으면서 나는 다만 ‘단순한 심령’이면 이 모든 게 수용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라 사람은 그 누구도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더러는 그 나이가 되어서도 왜 그처럼 지난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사는지, 그래서 누구는 누굴 더 이상 안 보고 원수처럼 지낸다. 더하여 어떤 이는 그 미워하는 마음이 원동력이 되어 오늘의 성공을 이룬 것이라, 철저하게 가난을, 수치를, 남들을 향한 보복의 심리로 살기도 한다. 다들 그 속에 복잡하여서 스스로도 죽을 맛이다.
이러한 무리를 보시고 입을 열어 가르치시니, ‘심령이 가난한 자’를 찾으신다. 이를 누가는 단지 ‘가난한 자(눅 6:20)’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마태는 그 앞에 우리의 ‘심령’을 덧붙임으로 영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구약에서도 그저 ‘가난한 자’로 하여 ‘종말론적인 의미’를 담아냈다. 헬라어와 히브리로 이 단어는 상대적으로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6:19).” 하여 가난은 겸손하게 한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시편에서도,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시 40:17, 69:29).
이를 좀 더 단순화하면, 가난함으로 도움을 구하는 심령이라. 우리 영혼이 하나님으로만 바라게 된다. 하여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하는 시인의 기도가 되새겨진다. 이렇게 가난한 자란 물질적으로도 그러하여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에 대해 연상하게 한다. 물질적 궁핍은 그 차원을 넘어 사는 데 따른 감사와 감격도 내포한다. 내가 아는 누구는 집고 절도 없이, 가족도 일가 누구도 없는 처지에서, 홀로 극심한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나이 쉰 살이 넘었어도 혼자 있을 때 찾아드는 두려움은 가중된다. 오죽하니 내게 전화를 해서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사정을 물을 때면 그럴 수밖에 없는 저의 가난으로 누구보다 하나님을 더욱 간절하게 찾을 수 있겠다싶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매주 수요일 오전, 에베소서를 같이 읽고 몇 구절 안에 담긴 약속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
가난이 복이라면 하나님 앞에 선 모든 인간은 무가치하다는 것을 몸소 살아서 체험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이 놀라운 비밀이 심령이 가난한 자의 속을 가득하게 하였다. 저의 속은 천국이다.
할 때, ‘복이 있나니’ 하심은 가난하고, 애통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인생의 원천인 죄로 인하여 직접적으로 이를 인식하고 삶으로 의원이신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을 구할 따름이다. 가끔 나는 몸이 너무 아프고 고달파서 병원에 간다. 그저 진통제 주제 하나를 놓아달라고 의사에게 사정한다. 굳이 치료한다 해서 나을 게 아니라서, 나의 간절함은 더러 절실할 뿐이다. 이 모든 ‘고통’이 죄의 결과라 회개뿐 할 게 없다는 사실로 더욱 더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긍휼을 구하고 주의 인자하심 앞에 엎드릴 따름이다. 여기 마태복음의 ‘복이 있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축복’의 약속이다. 육체의 가시에서 놓여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오늘의 가난은 유복한 상태로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할 때 마태는 메시야께서 통치하는 나라를 천국으로 드러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어렵고 힘들수록 주를 더욱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어서… 우리가 천국의 시민으로 사는 데 따른, 아직은 막연한 사후생의 아직 먼 나라가 아니라, 당장에 가까운 나라를 살고는 한다. 이를 어찌 이해하는가 하면 ‘이만만 해도 좋겠다.’ 싶은 날이 있다. 늘 어디가 아프거나 불편한 것으로 고통당하며 사는 사람이면 금세 이해할 것이다. 종종 누구는 쾌변을 놓고도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기뻐한다. 누구는 경우 10만원의 지원금을 가지고도 감격스러워하며 평소 먹고 싶었던 것을 사며 즐거워한다. 우리의 이 하찮음 안에 천국이 있다. 지금은 이처럼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선명하다.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안다. 긍휼히 여기는 게 어떤 것인지, 자신이 바라는 게 바로 그런 것임을. 자비와 사랑과 동정은 구약에서 ‘헤세드’라 하여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가리킨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이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로 자신이 그 대상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여 저는 ‘마음이 청결한 자’로 산다. 다른 말로 단순한 사람이다. 복잡할 게 없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면 뭐가 새삼 복잡할 게 있겠나? 청결은 헬라어로 ‘카다로스’라 하여 의식적인 정결을 의미했다. 그러나 본문은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되는 것이 바로 이 내적 청결로 가능함을 알린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죄사함을 받았다고 믿는 게 사실이면 이 믿음의 증명은 단순한 마음, 한 마음, 일심(一心)으로 주를 바랄 뿐이다. 하여 성도는 두 마음을 품는 자가 아니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8).” 왜 두 마음이 드는가 하면,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6-7).” 하여 오늘도 주께 구하였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구주를 나의 주로 인정한다면 더는 바라는 게 있을 수 없다. 바로 그, 천국이란 ‘다 이루었다’의 날들이다. 이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사는 일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그럼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는 데서 산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영적 축복이다. 지금은 신앙의 눈으로 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을 직접 보며 같이 살 것이다. 이를 현실적으로 누리는 것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고로 사람 관계, 과거의 어떤 기억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삶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그런 거 보면 사람들이 오늘이 우리가 왜 이처럼 단순명료한지 알 길이 없다. 더러 아내는 나의 태평함에 한숨을 쉬는데, 애써 설명할 길이 없어 저도 그리 살기를 기도한다.
요즘은 집 이사 문제로 복잡하다. 딸애가 시집가고 방이 하나 남고해서 전세가도 좀 싸게 할 겸 해서 옆 블록에 지어진 새 단지로 이사하려는데, 집주인이 무슨 일로 마음이 상했는지 내년 가을 재계약까지 그냥 살라면서 집을 빼주지를 않는다. 그 일로 설왕설래 말이 많은데 우리야 3년 전 그대로 1년을 더 살라고 하니 좋기는 한데… 서로가 이래저래 뒤엉긴 감정의 골이 깊다. 그런 가운데 나만 태평한 것 같아서 이래도 되나? 싶을 때, 같은? 은혜란 가끔 그냥 받아도 되나? 이래도 되나? 하는 면구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니 나는 오늘 이 오묘한 진리 앞에서 한 가지, 주를 사랑함으로 점점 더 단순해지라는 말씀으로 듣는다. 하여 우리가 빛이요, 소금이라는 데서도, 사는 게 다만 사역이라!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시 64:1).
주 앞에 고할밖에. 하여 오늘도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주 앞에서 단순하여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 하실 때에,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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