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하현. 2026. 6. 6. 06:04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마 4:19-20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 63:2-3

 

 

예수께서도 시험을 받으신다. 저는 성령에 이끌리셨고 광야로 가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1).” ‘그 때에’는 요한의 세례를 받고 성령이 예수께 임한 후 즉시다. 예수를 잉태하게 하신 성령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거하셨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3:17).”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마귀에게 시험 받으시도록 광야로 이끄신다. 이를 마가복음에서는 ‘몰아내신 것’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 1:12).”

 

우리에게 여러 어려움이 주어진다. 이를 더러는 시험을 받는다고 한다. 우리도 성령에 의한 것이다. 시험을 ‘징계’나 ‘꾸지람’으로 이해하면 된다. 어떤 불안이 또는 뜻하지 않은 일이 우리로 두려워 떨게 한다. 누가 위경련이 왔던 것 같다. 순간 식은땀이 흐르고 호흡이 가쁘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겁에 질려 전화를 했는데 나 역시 뭐라 이를 의학적인 지식이 없다. 저도 이를 알 텐데 그리 한 것은, 주의 뜻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름은 묻자 국수를 좀 과하게 먹고, 어려운 몸을 이끌고 걷기 운동을 무리하게 했던 것 같다. 순간 어지럼증이 밀려오자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런 증상으로 겁이 덜컥, 났던 모양이다. 우선 소화제를 좀 마시고, 속은 괜찮은지 어디가 어떤지 물으며 이런저런 말을 하게 했다.

 

굳이 내게 전화를 한 것은 심리적으로 불안해서였을 거라 짐작했다. 이런저런 대화로 그 마음을 진정시키고, 일주일에 한두 번 오전 일찍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흘러갔고, 나 역시 저를 진정시키느라 처음에는 놀랐다가 그 상황의 의미를 생각하고 속으로는 주의 이름을 여러 번 부르며 말에 말을 더했다. 어떤 일, 흔히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우선은 이 모든 게 성령으로 이끌리어 일어난다. 심지어는 불행한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하신 말씀을 나는 자주 음미한다. 어떤 어려움이 우리를 살린다. 고난이 좋을 리 없지만 그러한 고난으로 우리 영혼이 산다. 얼핏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순간적으로 저를 엄습한 두려움이 내게 전화를 하게 했고, 나로 하여금 저를 진정시키다, ‘줌’으로나 ‘전화’로나마 성경공부가 이루어지게 하셨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는 더러는 잔인하다. 내가 돌이켜 주 앞에 승복하기까지 사실은 자살을 선택하기 직전까지였으니까, 죽고 싶은 심정으로 살게 하신다. 여기서 삶은 영생을 사모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도 표면적으로는 수동적으로 인도당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성령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하신 것이다. 우리 영혼도 성령을 바라지만 우리의 육은 다르다. 하여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우리가 원하는 것은 죄다. 세상이 참 좋다. 돈만 있으면 만사 행복할 거 같다. 육신은 늘 그렇듯 이 땅의 것을 원한다. 이에 마태는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셨다’ 하고, 마가는 예수께서 성령에 ‘내몰리셨다’고 했다.

 

성자와 성령은 유기적 연합과 협력의 관계로 마귀를 상대하셨다. 곧 우리의 육신도 성령과 연합하고 협력해야 할 것을 보여준다. 실제 마귀가 하나님의 적수라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적하는 것은 사실이다. 성령이 충만하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 ‘첫째 아담’ 곧 사람의 몸을 입고 정복해야 했던 사탄을 보여주고, 이에 ‘둘째 아담’인 예수께서는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신 것을 보여주심으로 우리도 그리할 것을 알게 하신다. 이 도전을 우리는 매순간 겪는다.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은 극복하는 것이지 정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사탄을 대적하고 승리하심으로 메시야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셨는지, 우리가 어떻게 성도로 주의 권속으로 주어진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신다.

 

먼저 ‘시험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과정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누구라도 예외는 없다. 이에 세 가지 유혹은 필연적이다. 먼저는 먹고 사는 문제다. 다음은 명예다. 다음은 권세다. 이를 휘두르며 사탄은 우릴 유혹한다. 그 계략은 전형적이다. 그러므로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5).” 하신 의미도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살전 3:5).” 어떤 어려움, 시험이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연단으로 시험은 필수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 22:1).” 그렇듯 주의 백성들도,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출 20:20).” 고로 시험은 필수다.

 

우리로 어느 난감한 상황을 만드시는 것은,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요 6:5-6).” 이는 주께서 알고자 하심이 아니라, 우리로 우리 자신의 상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다. 하여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곧 오늘의 어려움을 달가워할 수는 없어도 수긍할 수는 있다. 이를 인정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그럼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시험을 어떻게 대처하심으로 사탄을 물리치셨는지를 보면 된다.

 

먼저는 먹고 사는 일에서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3).” 할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 시험하는 자는 당연히 사탄이다. 사탄의 존재 이유는 우리로 죄짓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쳐놓는 것이다. 하여 먼저 의심을 심는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곧 우리로 믿는 자이면, 목사라면, 하나님이 자녀라면, 하고 가장 원론적인 의문을 갖게 한다. 그 첫 시험은 ‘떡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것도 ‘부당한 방법’을 사용해서 말이다.

 

곧 ‘하나님이 아들이어든’ 하고 그 안에 의심을 넣으면서 동시에 그렇다면… ‘돌로 떡을 만들라’고 하는 것은 그럴 수 있는 권능을 남용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부모 찬스’니 ‘지인 찬스’니 하는 따위가 모두 그런 맥락과 같다. 내가 목사라면, 성도라면, 믿는 자라면… 하고 드는 어떤 당연한 권능을 남용하여 먹고 사는 문제에서 더 나은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흔한 일이다. 오죽하니 어느 관공서나 병원에서조차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도 남들과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렇듯 ‘먹고 사는 문제’는 언제든지 편법으로 얻을 수 있는 유혹이 많다. 사탄은 예수께서 가진 권능으로 메시야직의 수행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개인의 당면한 문제, 허기를 해결하라고 하는 것이다. 만에 하나 그리스도께서 돌들로 떡을 만들어 잡수셨다면 그분의 사명과 하나님의 뜻에 중대한 과오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 우리가 의지할 것은 나의 지식이나 경험이 아니다. 어떤 권세나 인맥도 아니다. 다들 그러고 산다지만 우리는 ‘기록되었으되’ 즉 성경으로 주어진 이 말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먹고 사는 원론적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이어서 사탄은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5-6).”

 

먼저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 세웠다는 것은 우리가 신봉하는 어떤 ‘거룩한, 성전, 꼭대기’ 즉 나름의 신념과 확신의 꼭대기랄 수 있는 저마다의 자아도취적인 ‘옳음’을 뜻한다. 그런 곳에 데려다 놓고 한 번 보여달라는 것이다. ‘뛰어내리라.’ 하는 것은 ‘스스로 네 몸을 날려보라’는 의미다. 전력을 다해 죽기 살기로 사는 이 땅의 어떤, 옳고 그름의 기준이나 가치에 대한 자신의 명예를 도전하게 한다. 정말로 내 주변에 그렇게 사는 사람이 여럿이다. 나름은 존경할 만하다. 의연하고 꿋꿋하게 소신껏 자기 생을 다하는 자들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저는 모든 것을 걸었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걸어도 되는 우리 것이 있다고 착각이 문제다. 가령 목숨 걸고, 자신의 전부를 걸고, 하는 따위의 오만함을 생각하게 한다. 그게 왜 내 것이었나? 스스로의 것이라 여기는 자체가 불순하다.

 

사탄의 공격은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됨’과 그 아들이 신뢰하는 ‘하나님의 보호’를 동시에 시험하는 것이다. 곧 우리가 믿음으로 가지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걸고, 그 믿음을 자신의 알량한 믿음으로 삼게 하여 내 것이 아닌 값없이 주신 선물임을 잊게 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강한 도전이다. 이에 우리는 무장해야 한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4-17).” 사탄은 또 우리를 사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한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1-12).

 

이와 같은 주의 권능 아래 경외함 곧 신앙으로 서야하는데 그걸 역으로 이용해서 그러니까 그래도 되는 것들처럼 주의 긍휼하심을 함부로 여기게 한다. 이는 역으로 우리의 믿음이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저지르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이에 따른 예수님의 대답은 그래서 간단하면서 중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7).” 곧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심은 그러한 열심? 우리의 수고? 어떤 노력? 또는 헌신? 등이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꼴이 된다.

 

신앙에 실패는 불순종에 따른 이탈도 크지만 나름의 열심이 더 교회를 어지럽히고 하나님의 일을 훼방해서 생긴다. 보면 꼭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 등 권위 있는 자리의 사람들이 저들의 보수적인? 판단으로 목사를 몰아내거나 성도들을 갈라치기하는 게 다 그런 것이다. 하여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다음은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8-9).” 곧 ‘지극히 높은 산’, ‘천하만국과 그 영광’은 이를 심리적이고 환상적으로 보여, 우리로 신앙을 이상적으로 접근하게 한다. 믿음을 낭만으로 생각한다. 사는 데 있어 종교 하나쯤, 신앙 하나쯤 가지고 살면 위로가 될 듯한 종교의 추상적인 면모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꿈꾸기도 한다. 천국을 그렇게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서의 모든 행복과 기쁨을 마치 전유물처럼 가지고 살아야 신앙이 올바른 것처럼, 그것에 ‘경배하면’ 하는 조건은 종교적 숭배와 예배로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리는 동양적 의미를 함축하는데….

 

그러므로 ‘네게 주리라’ 하는 것이 허황되다. 마치 자기 것처럼 준댄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피조물을 놓고 흥정하는 꼴이다. 사탄은 이 세상의 임금을 자처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다(엡 2:2). 타락한 신(고후 4:4)이다. 그는 제한된 범위, 세상 안에서 자신의 권세로 실현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우리 영혼을 앗아간다. 끝 날에 형벌이 있을 것을 저도 안다. 그러니 더 극성스럽게 우리를 끌어들이려 한다. 가룟인 유다가 결국 은 30에 예수를 판 것 같이 더러는 그렇게 자기 영혼을 팔아서 세상의 허상을 산다. 천하만국의 영광이라니! 마침내 멸망할 것들로 흥정하는 꼴이다. 여기에 예수님은 단호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10).” 곧 우리가 갈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기쁨이나 행복이니 하는 모든 것은 부수적인 것일 뿐 전부가 아니다.

 

이 일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19-20).” 먼저는 ‘나를 따라 오라’ 하신다. 이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실 것이다. 저들은 그물로 고기를 잡고 있었다. 따르라, 하실 때 저들은 ‘버려두고’ 갔다. 멀리 내던지고, 포기하고 갔다는 소리다. 나름의 수단과 방법, 어떤 구상을 다 버려두고서 말이다. 우리가 제자로서 소명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와 같이 ‘버려둠’으로 따를 수 있다. 다음은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22).” 아버지를 버려두고 갔다는 것은 그 뜻을 거스르고 소명에만 전념하기 위해, 부친의 권한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나하나, 깊이 있게 묵상하다보면 그 의미가 생동감 있게 오늘의 나를, 생활을 건드린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 63:1).

 

말씀을 사모하고 묵상하는 일이란, 참 같이 나누고 싶은 일이다.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4, 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