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 6:9-13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시 65:4, 10
우리의 삶은 믿음의 증거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산상수훈’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앞서 5장은 우리 받으며 살아야 할 8복을 중심으로 이는 주의 성령으로 우리가 그러할 수 있음을 알리었다. 그러므로 빛과 소금의 삶으로 그 삶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곧 5장 1-12절은 산상수훈의 서론에 해당하겠다. 그리고 13-16절은 산상수훈의 본론에서 세부적으로 나뉘는 첫 번째 단락이 된다. 17-48절까지는 기독교 교리(敎理)의 중추가 된다. 13-16절의 실제 적용으로 오늘 본문 6장에서부터 7장 14절까지 이어진다.
실상 5장 17-48절에 수록된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을 점검하고 정리하는 사항이다. 복음이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구속사의 점진적 전개에 따라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며 이루어지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밝히 드러난 것이다. 율법은 우리 삶에 지표와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면 ‘율법의 의미’를 ‘복음의 빛’에 비추어 정립하고 적용하며 살아야 한다. 이는 구원 받기 위한 게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로서 믿음으로 사는 데 따른 증명이다. 이에 따른 실제적인 생활이 오늘 본문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곧 우리가 살면서 세 가지 남의 의식하며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다. 이는 신앙생활에 있어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서로만 아는 사실이면 족하다. 이를 드러내어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데 따른 주의를 오늘 본문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1-18).
곧 우리가 천국 시민으로서 기본적인 생활로 구제(1-4), 기도(5-15), 금식(16-18)에 대하여 구체적인 교훈을 다루고 있다. 특히 본문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실천의 문제를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형식적 실천으로 대조시켜 제시한다. 즉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속으로 새로워지는 결과에 주목하게 한다. 이는 나이가 들어 늙어가는 일과 같아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사람의 시선과 그 관계도 다를 게 없다. 이에 하나님의 품성을 강조하고, 성도가 하나님께 진정으로 헌신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각 단락의 끝 부분마다 예수께서는 순결한 자세로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에게 주어질 종말론적 상급을 분명히 예시하시고 있는 것도 주목할 일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관해 교훈하시며 이를 외식하는 자의 경우로 먼저 경고하고, 올바른 방법과 태도를 지시하셨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할 것을 역설하시는 것이다. 이 교훈의 의도는 세 가지 교훈 모두 우리의 경건생활에 있어 중요한 것을 강조하신다. 다만 하나님 앞에 진실해야함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가르치는 신앙생활은 경건 훈련의 과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시민으로 영원한 신분을 가진 자로서 지녀야 할 덕목을 연마하는 일이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자신을 단련하여 주 앞에서 날로 새로워지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사람에게 보이려할 때 그 마음은 오염된다. 순수함을 잃는다.
이에 대해 앞서 5장 14-16절에서 ‘빛을 비추는 삶’과 오늘 본문에서의 ‘은밀하게 하라’는 말씀은 대조적이다. 왜냐하면 진정 사람들에게 빛으로 비출 수 있는 행위는 스스로를 자랑하는 교만하고 위선적인 태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자 하는 ‘겸손’에서 비롯된다. 가령 우리 교회는 누군가의 기도와 헌신과 헌금으로 유지된다. 모두가 무심한 듯 내색하지 않고 나 역시 조심스러워서 드러내지 않고 늘 마음으로 주의 복을 빈다. 열 명도 안 되는 실제 우리 교인들 가운데 가족을 제외하면, 모두가 아프다. 심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그 삶이 어려움의 연속이다. 가끔은 생각하기를 나의 약함으로 먼저 주 앞에 엎드려야 저들의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울과 조현과 공황으로 약을 복용하고 그 삶에 있어서도 고단한 육신의 연약함과 정신의 고단함을 감당하면서 각자의 삶을 다한다. 그러니 사실 저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한다는 게 회의적일 때도 있다. 알아듣기나 할까? 싶은 마음이 들지만 그래서 더 성령으로 한다. 나는 다만 할 뿐이고, 저들은 그나마 따를 뿐이고, 서로의 이런 과정은 일반적이지 않다. 그렇게 함께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섬기는 이들이 그렇고 스쳐가듯 오가며 신앙을 상담하고 각자 섬기는 교회나 가정에서의 일을 듣거나 말해야 할 때는 더욱 난감하기도 하다. 우선 저들은 자신을 모르는 자에게 토설하는 의미에서 두서없이 어려움을 호소한다. 나는 그 사연을 잘 헤아려 듣고 더러는 적절한 답을 주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결국은 스치는 바람처럼 그렇듯 불어 지나갈 뿐이다.
그러할 때마다 나에게 남겨지는 과제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다. 구제는 저들에게 줄 게 없는 나로서는 시간과 온 마음뿐이다. 성심으로 저를 대하고 위로하는 것이라, 당사자인 저들도 자신들이 드러날까 하여 경계한다. 그러니 나의 기도는 필연적이다. 주밖에 나의 마음을 알아줄 이가 없다. 저들 역시 그렇지 않겠나? 언어로는 서로가 소통이 어려운 사람도 있다. 일반적이지 못한 사고로 자기 안에 갇힌 시간에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 보니 말이 좀 길어지고 어떤 상황을 듣다보면 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자칫 감정으로 응대하다가는 화가 난다. 짜증이 인다. 그러니 금식은 필수다. 나의 시간이나 생각이나 마음을 금하고 주께로만 아뢰는 일이다. 누구에게 이런 상황을 설명하기조차 불가능해서 말이다.
이에 기도뿐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9-13).”
‘그러므로’에 모든 나의 감정도 지금의 상황도 모두 연관이 된다. 하여 ‘너희는’ 곧 이 일을 사명을 받은 사명자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도의 모범을 알려준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 기도문을 수차례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을 안다. 마태는 그 중의 한 경우를 기록했고, 누가는 또 다른 경우를 기록한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일반인이 아니라 주의 사명으로 사는 주의 자녀요, 제자들이다. ‘이렇게 기도하라.’ 하고 지목하였다. ‘이렇게’는 그릇되고 아무 효과도 없는 기도와 구별하기 위한 지목이다. 먼저 시작은 ‘하늘에 계신’ 하고 나의 기도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한정한다. 하늘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계심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그 권능과 지혜로 통치하시는 초월적인 대상을 강조한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 139:8).
곧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 66:1).” 하심으로 ‘하늘에 계신’이라 먼저 지목하는 것은 기도의 방향과 목적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는 ‘우리 아버지’ 하고 부른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은 예수께서 그리 정하신 것으로 ‘우리 아버지’란 호칭은 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의 표시다. 그러므로 기도 서두에 ‘우리 아버지’로 묘사된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준다.’ 그는 단순히 존재의 근거가 아니라 ‘유일한 아버지’이시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 3:14-15).”
‘우리 아버지’에서 ‘우리’는 복수형태로 예수의 제자 된 우리들로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독특한 관계를 정립한다. 하나님은 무분별하게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시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혼자 드리는 기도의 모범이 아니라, ‘우리’가 같이 서로 교제를 나누며 드리는 기도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8:19).”
이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한다. 주기도문에는 7개항의 기도 내용이 있다. 앞서 3개항은 찬양과 천국 도래와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낸다. 뒤이은 4개항에서는 개인의 현실적인 문제를 아뢰며 고하는 내용이다. 이에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할 때 십계명의 제1, 3계명과 연관이 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3, 7).” 여기서 먼저 하나님의 이름은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대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시다. 그가 자신을 계시하시는 그 자신이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따라서 그의 이름에는 거룩하신 인격과 능력과 권위도 함께 한다.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 할 때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의 가치만큼은 거룩하게 대접받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날 우리 사회에서 그 이름은 너무 아무렇게나 함부로 불리는 경향이 있다. 이에 우리는 우리의 천한 생각과 행동에 의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경멸받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해야 한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 1:6).”
거룩은 하나님 자신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신성 자체이다. 하나님은 모든 세속과 사악에서 구별되신다. 절대무흠(無欠), 지존자(至尊者), 유일한 예배와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한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거나 희석하고 와해시켜 하느님, 하늘님으로 동일시하는 따위는 모두 화가 있을 것이다. “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들도 교훈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사 29:23-24).” 곧 하나님은 유일하신데 이를 보편화시키고 일반화시켜 두루두루 모든 신으로 둔갑시키는 다원주의나 다신론주의자를 증오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나타났다. 세상 끝 날에 비로소 완성되는 이중 구조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옵소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가 계속 확장되게 해달라는 기도다. 그 나라가 완성되게 해달라는 기도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또는 우리 주께서 임하셨도다(고전 16:22).” 하여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11:17, 22:20).”
하여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 말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하늘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이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여기서 ‘뜻’은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7:21, 12:50).”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18:14, 26:42).”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같은 대속의 죽음이 실현되어야 했다. 동시에 절대적 순종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그렇게 ‘나라이 임하시옵시며’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의가 지금 현재 온전히 성취되기를 구한다. 하나님의 뜻은 현재 하늘에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거기에는 완성이 된 것이다. 이 땅은 아직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구현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곧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한 기도가 끝나고 이제부터 개인의 신앙과 생활에 실제 필요한 내용으로, 첫째는 ‘양식’을 구한다. 이는 오늘, 지금, 필요한 것으로 ‘하루의 양식’을 뜻한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필요에 대한 요구이지 탐욕을 위한 기도가 아니다.
겸손한 기도는 하루에 족한 줄 안다. 쌓아두고 넘치도록 하는 게 아니다. 날마다, 지금, 바로 뒤 따르는 것으로 ‘앞으로 올 날을 위하여 우리의 양식을 오늘날 우리에게 주옵소서.’란 뜻이 된다. ‘일용할 양식’은 생존을 위한, 오늘 필요한, 매일 필요한 등의 뜻이다. 곧 물질을 초월하는 ‘양식’으로 ‘일용할’ 즉 이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 30:8).” 또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할 때 죄는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 할 바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가 서로 사하여 준 것 같이’ 이는 하나님의 사하심의 양과 우리의 사죄의 양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눅 11:4).” 고로 우리의 사죄가 선행되어야 한다.
마태의 기록은 분명히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의미다. 반면에 누가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점이다. 둘이 다른 것 같으나 같다. 결국 ‘자신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은 죄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일단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남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가 상대적으로 극소화되어 나타난다.’ 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를 과장해서 보는 사람은 또한 자신의 잘못은 극소화하여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회개와 자각은 단순한 후회와 달리 철저한 자기 부정과 겸손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어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곧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주의 긍휼하심을 구하여,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할 때 다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앞의 간구로 이어지는 ‘악’에 대한 능동적 승리를 기도하는 것이다. ‘구하옵소서.’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권한이다. 보호하고 지켜달라는 간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풀이나 새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일깨우신다. 이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3-34).”
모든 염려와 근심은 주께 맡김으로,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시 65:2-3).
오늘도 주 앞에 아뢰며,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4).
하여,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10-13).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0) | 2026.06.10 |
|---|---|
|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0) | 2026.06.09 |
|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0) | 2026.06.07 |
|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0) | 2026.06.06 |
|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0) | 2026.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