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하현. 2026. 6. 9. 05:45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시 66:5

 

 

때가 이를 것이고, 그 날에 판가름이 날 것이다. 오늘에 저마다 주여 주여 하지만, 결국에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심을 눈여겨보게 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 이 말씀은 ‘율법을 완전히 행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더하여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결국을 가르치신다.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이다. 무엇을 행하고, 얼마나 열심을 다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에서 그 기준이 갈린다.

 

심판 곧 정죄의 법칙은 ‘아버지의 뜻대로’이다. 정죄의 원리가 있고 그 후에 사죄의 규례가 생긴다. 이 말씀은 ‘심판의 원리’가 ‘구원의 원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곧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도리’는 은혜로 받는 ‘구원의 원리’를 알 때 자연스러운 겸손과 겸비한 삶을 유지하게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1-2).” 하시면서 말씀을 시작하신 이유다.

 

이는 오늘 날 우리 사회의 현상을 관통한다. 모든 불신과 적대감의 기저에 있는 원리를 일깨운다.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26:59).” 즉 대제사장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어떻게든지 문제를 일삼았다. 이는 자기들의 사회적 기득권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서였다. 결국 형식상으로라도 ‘신성모독’의 적용하려 비판하고 있었다.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65-66).” 신성 모독은 종교적 문제로 로마의 빌라도로 하여금 사형 판결을 이끌어내는데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저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다. 비판이란 말은 ‘평론’ 혹은 ‘정죄’를 의미한다. 오늘 날 다양한 방면에서 평론가들이 활개 친다. 문학,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저마다의 논조를 가지고 각각의 진영대로 그 주장이 서로 다르다. 이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하심은 그 값의 보응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에게서 받는다. 사람은 누구를 그 죄대로 갚아 줄 권세도 없다. 능력도 없다. 또한 죄의 경중을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지혜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이 어려운 일을 능히 하실 수 있다. 이를 인정함으로 우리가 삼가 비판을 조심하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저마다 참 열심히 산다. 자주 그런 생각이 든다. 그 안에 진정성은 차치하고 그 연세에 길거리에 나서서 저마다의 주장을 외치며 세를 모으는 것을 보다보면 대단한 것 같기는 하다. 가령 부정선거를 운운하며 연일 비판하는 자의 경우, 총리였고 법조인으로 그러는 자신이 세운 정치 공학적 원리인데 이를 문제 삼으며 주장하는 게 모순이 있어 보인다. 그 일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을 텐데, 자신들이 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조용하다 어찌 저러는가? 싶다. 그렇듯 자기 모순, 자기 열심에 빠진 자들이 오늘 본문에서 지적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22).” 여기서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다. ‘그 날’은 이 세상 끝의 심판 날을 이른다. 그 날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눅 10:12).” 하심 같이 더욱 심한 혼란과 있을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던 자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고 떨어지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그만큼 앞장 서 열심을 다한 자들이 더 큰 심판이 임할 것을 강조한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이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고 저마다의 열심을 강조하고 옳았다고 주장한다. 저들, ‘거짓 신자’들은 나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여 그리함이 아니고 자기들의 위신과 안전과 권세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용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지? 먼저는 남들 앞에 보이는 자신이 그런지? 어떤지? 그것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는 않는지? 나아가 자기만족으로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지 않는지? 신앙이란 경외함이다. 경외함은 두려운 줄 아는 마음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어떤지? 오늘 말씀은 두렵게 돌아보게 한다.

 

만일 ‘그 날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하시면 그땐 어떨까?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많은 능한 일을 한다고 하였는데, 나름은 헌신과 봉사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였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이 모든 게 허사일 수 있고 심지어는 심판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심지어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할지라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고전 13:1-3). 곧 “사랑이 없으면”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따른 게 아니면 그저 시끄러워서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아무 것도 아니요,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하심에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보면 저마다 너무 당당하다. 자신은 옳고 남은 틀리다. 그러한 적대감으로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어떤 때에 이러한 악인들도 이용하신다. 그들이 주님에게 일시적으로 이용된 일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애굽의 바로나 바벨론의 다리오 왕이 그렇듯 말이다. 오직 주님은 ‘나를 사랑으로 알아주시고, 나는 주님을 아는 신앙의 관계’가 구원의 방법인 것을 일깨우고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눅 10:22-23).” 이 놀라운 진리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오늘을 살면서 여러 현상과 상황과 여건과 환경으로 다들 씨름하고 사는 꼴이지만 정작 주 안에서 주의 뜻을 살피고, 주를 바라보는 것이 복이다. 하여 예수님은 이어서 이르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사실 반석 위에 짓는 집은 고되고 힘이 많이 든다. 거짓은 가장 손쉬운 방어이다. 말씀을 받아 행하는 자는 반석에 집을 세움과 같다. 말씀은 한 개의 반석과 같이 든든하여 하나하나 말씀을 더함으로 세워져가는 집이 서로 연결될 때 강하다. 하여 서로 지어져 가는 일이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이는 곧,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1-22).”

 

그렇게 교회가 이루어져 하나님의 처소가 된다. 우리 안의 여러 생각과 뜻과 계획들이 모아져서 주 앞에 하나가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짓 곧 이단은 모래와 같이 당장, 빠르게 모여서 세를 불리는 것 같으나 곧 무너지고 만다. 예수의 말씀은 영생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가지고 능력을 행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하여 거짓은 죽은 것과 같아서 생명의 능력이 없고 바람에 불리는 모래와 같다.

 

그러므로 가장 두렵고 끔찍한 것은 더는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없는 때, ‘그 날에’ 많은 사람이 그런다는 것이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곧 자신의 일을 스스로 기억하고 강조하는 것은 그때마다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 의식적으로 그 일을 행하여 기억하는 것이다. 오히려 ‘오른 손이 한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 하심 같이 자연스럽게 행한 그런 일을 한 것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25:37).” 오히려 자신이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38-39).” 그러할 때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40).” 이는 우리가 기억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나는 그저 잊고 있었는데 주가 기억하시고 갚으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사역도 그 사명도 다르지 않겠다. 무심히 행한 일이 어떤 의도를 가진 게 아니라 주 앞에 겸손으로 행한 것이면 이를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소위 스펙이라 하여 자신이 조금 행한 일도 마치 늘 행하였던 것처럼 부풀리며 과시해야 높이 평가 받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저마다 남의 작은 티는 지적하면서 정작 자신의 허물은 대수롭지 않은 듯 변명하고 산다. ‘티는 작은 것이고 들보는 큰 것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는 주의 물으심이 오늘 우리 사회의 대립에 경종을 울린다(3). 최소한 믿는 우리들은 그에 따라 부화뇌동하지 말아야 한다. 남을 정죄하는 것은 벌써 큰 죄이다. 남을 정죄하기 좋아하는 것을 그의 생활 이면에도 여러 다른 죄과들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있다. 그런 자의 배면에는 그 짓 이상의 정죄 받을 무언가가 있다. 스스로 켕기는 게 많을 때 언성을 높이고 더욱 과장 되이 허풍을 떨게 돼 있다.

 

이를 ‘의식하는 자’라 하겠다. 이것은 말씀과 같이 자기의 큰 허물을 못보고 남의 작은 것은 볼 줄 아는 자이다. ‘약대는 통으로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 먹는 자’이다. 저는 자신의 허물은 못 보고 남의 겉을 보고 판단한다. 그에 대하여 예수님은 엄히 말씀하신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6).” 여기서 거룩한 것은 영적 제물 곧 복음을 가리킨다. 복음의 요점은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하신 그리스도이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십자가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는 곧 복음을 믿는 일에 참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거룩한 것’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이를 ‘개’에게 주지 말라 하심은 ‘배교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운운하며 의식적으로 종교 행위로 신앙을 사는 거짓 신자들이다. 바울도 이들을 ‘개’라 하였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빌 3:2).” 이들의 특징은 ‘먹을 것을 찾아다닌다.’ 그래서 대접 받는 것을 탐하고 좋아한다. 결국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19).” 하는 것으로 바울의 설교는 여전한 이 사회의 단면을 지적하고 있다. 개는 귀한 보화를 알지 못한다. 그것도 먹는 것인 줄만 알고 물고 뜯는다. 거짓으로 믿는 자들은 복음이 보화인 것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을 통해 위로를, 위안을, 삶의 복락을 바랄 뿐이다. 실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실상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맘때면 여느 교회마다 선교여행(?)을 떠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교회에서 후원하고 있는 교회를 방문하고 어떠한지를 살피고 함께 더하여 도움을 주고자하는 의도라 이해하지만 정작 그러한가? 겸사겸사 전교인 여름휴가를 그리 정하는 경우도 흔하다. 가서 며칠, 아닌 그 며칠 중에 몇 시간 잠깐 체험하듯 흉내 내고 정작은 관광이 목적이다. 간 길에, 언제 또 그런 곳을 갈까 하여 수백만 원의 비행기 값에 체류비용에 관광까지…. 사실 동생이 필리핀에서 사역할 때면 그런 명목으로 방문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럼 하루 혹은 몇 시간 원주민들과 교류하고 탐방하듯 선물을 주고 예배는 하지만 대부분은 어디 휴양지로 모시고 가 가이드 역할이 주된 일정이었다.

 

그러니 두려운 말씀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흔히 우리의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 밖으로 드러나고 누가 알아줄 때 이미 그 순수함은 잃게 된다. 남을 의식하고 저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순간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이 자주 두렵다. 행여 나의 이 글쓰기가 그러할까? 누구와의 성경공부가 그러할까? 고작 하는 것도 없으면서 그것으로 누가 알아주지 않나… 하는 마음이 내게는 없는 것인지? 나는 자신할 수 없어서 주 앞에 엎드린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 (셀라)

(시 66:1-4).

 

무던히 그저 묵묵히 주만 바라며,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8-9).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16-17).

 

오늘도 조심히 또한 겸손하게,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