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마 8:34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 67:3
우리의 삶을 이끄시고 이 땅에 두어 인생으로 하여금 살게 하심은 주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곧 이 모든 창조 목적은 그러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데 의가 있다. 그러나 죄악 된 세상은 이를 거절하여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34).” 하니,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이 또한 우리에게 있다. 하여 더하신 은혜가 성령이시다. 주의 영을 우리 속에 두어 우리로 주를 찬송하게 하신다. 이를 구하게 한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 67:3).
이로써 우리는 주의 나라에서 주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하여 오늘도 인생이라는 여정을 걸어간다. 그러다 주를 만난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2).” 하여 이를 낫게 하시고 그의 믿음을 입증하게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4).” 또한 백부장의 하인의 열병을 고치시고(6), 중풍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낫게 하시고(15), 거센 바람과 바다도 잔잔하게 하시었다(26). 뿐만 아니라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다가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28).” 하는 저들 속에서 귀신들을 몰아내신다(31).
이 모든 일을 듣고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34).” 두려움은 회피와 안주를 바라며 주를 온전히 알고자 하는 마음을 잃게 한다. 이를 상대적으로 구하고 바라는 자들로 우리를 예정하시고 택하셨다. 서로 유사한 택함과 예정에 대하여, ‘택함’은 찬송하게 하시려는 대상을 지목하신 것이고, ‘예정’은 그들의 구원의 근거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구원론을 가지고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놀라운 진리를 정립하였다. 그에 따른 계획은 ‘창세전에’ 세워졌다. 이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사람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세계에 합당한 자들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이를 또한 받아들일 수 있는 권세가 ‘은혜로’ 주어졌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그 이유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4-5).” 그 목적은,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6).” 이를 두고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있고, 몇 주 전부터 아이와 성경공부를 한다. 오늘 오전부터는 누구와도 같이 한다.
곧 오늘 본문에서 이를 알 수 없었던 저들은 예수로 떠나시기를 구하였다.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34).” 이와 같은 심리와 그 상태를 이해한다. 내 안에 성령이 없다면, 우리가 은혜를 입지 않았다면 우리들 역시 이와 같은 사실 앞에 두려움으로 설 것이고 피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에 오늘 시편은 매우 대조적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67:1-3).
우리로 찬송하게 하시기를 간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신앙훈련을 마치고 다시 일반 백성들 속으로 들어갔다. 예수님은 저들을 이끌어 갈릴리 호수 근처의 낮은 지방으로 내려오셨다. 이와 같은 제자훈련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몇 차례 더 있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10:5-6).” 그 이유는 분명하였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13:11-12).”
곧 택하시고 예정하신 일로 ‘허다한 무리’와 구별된 자들로 이와 같이 경계하셨다. 허다한 무리는 그 숫자가 한정되지 않은 불특정 다수란 의미다. 예수께서 산상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있는 동안 그 소문이 각지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이 방방곡곡에서 그의 교훈을 듣고자 모여 들었다. 이들 가운데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를 찾아온 자들은 나병환자이거나 열병을 앓는 이거나 하여 삶의 질고로 고통당하는 자들었다. 오늘 본문은 이에 제자훈련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실 때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된 것이 나병환자였다. 나병은 영적인 의미에서 온갖 죄악 된 성품을 다 지니고 있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흔히 천형이라 하여 나병의 중함은 그 어떤 질병과 비교할 수 없다. 죄의 형질을 종합하여 놓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에 또 나병환자가 과감히 예수 앞에 나온 사실은 놀라운 사건이다. 당시에도 그렇고 저들은 동네 밖으로 내쫓기고 사람들을 피해 살아야 했다. 마치 모든 죄의 현장이 대체로 어둡고 음습하고 은밀한 것과 같다. 이를 무시하고 그 자체로 주 앞에 나와 절하는 저의 놀라운 용기는 그만큼의 절실함이었지만 동시에 그럴 수 있는 은혜의 마음이었다. 절을 한다는 것은 무릎을 꿇는다는 것으로 그만큼의 경외심을 보이는 것이다. 곧 나병병자의 적극적인 겸손은 그가 예수의 절대적 치유를 확신했음을 반증한다. 예수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주여’ 하고 불렀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2).” 이 한 구절에 우리의 돌이키는 심정과 자세가 모두 내포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현자나 율법학자를 높일 때 ‘랍비’란 말을 사용하였다. 반면 ‘주’여라 부를 때는 종이 주인에게 사용하는 극존칭이다. 이 나병환자는 랍비라는 호칭이 아니라 ‘주여’ 하고 부름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믿고 나왔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르기를 ‘원하시면’ 하고 자신의 소원을 아뢰기 전에 주의 뜻을 물었다. 이 말은 예수께 자신의 병을 고칠 능력이 분명히 있는데, 다만 고쳐줄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였다. 곧 ‘나 같은 자’를 받아주실지 말지… 예수의 능력을 확신하여서 나왔고, 그 능력을 자신에게 베푸실지 여부는 주의 뜻에 달렸음을 보여준다.
저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서 더 확실해진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3).” 곧 나병환자는 예수께서 그와 같은 능력이 있음을 알았고, 자기의 의지보다 주의 뜻이 중요함을 인정하여, 자기를 고쳐주겠느냐고 먼저 물었던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내가 원하노니’ 하시는 예수님의 응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그에게 은혜 베푸실 의지가 있음을 저에게, 또한 우리에게도 확인하게 하시는 것이다.
또한 나병환자는 자신의 병에 대하여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는 매우 충격적인 고백으로 요청하였다. 왜냐하면 나병은 그 치료가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왕하 5:7).” 하였던 상황으로도 알 수 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믿었고,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14).” 이와 같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만이 고칠 수 있는 것을 이 나병환자는 알았고, 믿었고, 이에 주의 뜻을 먼저 구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른 예수님의 호응도 놀랍다. 곧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하는 대목에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었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에 위배된다. 율법은 나병병자와 접촉한 자는 나병병자가 상징하는 죄성(罪性)에 오염된 것으로 간주되어 의식법에 따라 부정한 자로 취급되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레 13:45-46).” 즉 율법을 어기고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셨다. 손을 대심으로 기꺼이 부정한 자가 되셨다.
이는 예수께서 율법의 완성이시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다. 즉 율법에 갇혀있지 않고 율법을 지배하신 것이다. 더욱이 구약의 제사장들은 나병의 치유 여부를 판별할 때 그에게 접촉해도 부정하지 않았듯이 예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셔도 하나님 앞에 부정하지 않고,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해 이 땅에 오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심을 증명해하는 수순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부정한 자의 몸에 손을 대심으로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자가 주님의 ‘손대심으로’ 정(淨)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또한 ‘내가 원하노니’ 하고 ‘주여 원하시면’ 하는 나병환자의 믿음에 응답하셨다. 이는 주가 원하시면, 고쳐주시겠다는 결정을 주께서 하실 수 있음을 우리로 알게 한다. 하여 이르시길, ‘깨끗함을 받으라.’ 하고 외치셨다. 육체 치유와 의식적 정결까지 모두 포함한 표현의 말씀이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는 곧 완벽한 치유를 뜻한다. 그러자 ‘즉시 깨끗하여졌다.’ 치유에 따른 선언과 동시에 일어난 결과다. 예수의 말씀이 지닌 권위와 능력의 초월성이 입증되는 순간이다. 예수님이 손을 대신 것은 죄인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상징하고, 말씀으로 깨끗하여지라 하신 것은 어떠한 삶의 장애, 역경, 질고에도 극복이 가능함을 알게 하신다. 곧 우리의 죄가 아무리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치유시키는 능력은 한 생명을 새롭게 탄생시키시는 일이다.
이어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4).” 곧 우리의 대처방법을 알게 한다.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하심 같이 예수님은 여러 번 이와 같이 함구령을 내리셨다.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12:16, 16:20, 17:9).”
이는 이 이적에 따른 ‘허황된 소문’이나 ‘그릇된 신앙관’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치유 받은 자의 교만을 예방하기 위해서이다. 더하여 종교 지도자들의 견제와 시기로 복음 전파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사실 예수께서 ‘허다한 무리’가 이미 목격하는 가운데 이와 같은 이적을 베푸셨기 때문에 그 소문이 널리 퍼질 것을 잘 알고 있으셨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그 치유 받은 자가 율법의 예를 따라 제사장에게 나아가기 전에 미리 이적의 소문이 전파됨으로 나타날 제사장들의 편견어린 판결을 의식하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자신을 반대하는 제사장들이 편견 없이 순수하게 그 치유의 결과를 받아들이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그 치료받은 자가 함구령을 무시함으로 그 후로 복음 전파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막 1:45).”
또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에 놀라워하시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1-12).”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본 자손들’은 나라를 상속하게 될 자들로 유대 민족을 가리키지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천국에 속한 자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단순한 ‘혈통의 순수성’만으로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여기서 ‘바깥 어두운 데’는 멸망의 장소다. 베드로는 불의한 자들을 위해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 되어 있다고 하였다. 곧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벧후 2:17-18).” 저마다 믿는다고 자부하고 교회도 다니고 성도로 자처하며 사는 자들이 많은 현실에서, 의당 천국 백성이라 알았던 유대인들과 같이 이러한 믿음의 신봉자들도 하나님은 하나님이 없는 곳, 어두운 곳에서 어두움의 권세 아래 두심으로 영영한 절망이 있을 것을 가리키고 있다. 결국 ‘바깥 어두운 데’란 절대 소외와 영적인 절망 및 종말론적인 죽음과 형벌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그 결과 저들은 빛으로 오신 예수를 떠나시라 하고 있는 것이다.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34).”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이해와 상식으로 수용할 수 있는 합리적인 원리에서의 종교로 기독교를 원할 뿐 그 이상의 복음, 저 천국의 놀라운 시민권을 거부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많은 자들이 이 땅의 삶에서 형통함을 구하고 위안의 종교 하나쯤으로 족하게 여길 때, 예수께서 이르시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7:13-14).” 그렇게 교회의 양극화도 심화되었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시 67:5-6).
우리의 복은 이미 창세전에 택하시고 예정하심으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오늘도 이루어져 간다. 섭리란 공급하고 돌보시며, 앞으로의 모든 일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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