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마 9:5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시 68:19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다.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는데, 같은 사안을 놓고 이를 판단하고 이해하는 정도도 다 다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중풍병자나 소경 둘이나 죽었다 살아난 아이나 이를 함께 지켜보면서도 속으로 판단하는 사람이나 무모한 듯 믿은 혈루증 앓는 여인이나… 그런 가운데 모두가 같은 것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 땅에 죄 없는 자는 없고, 그 결과 모든 질병과 고통과 갈등과 분파가 끝이 없다.
이에 예수께서 자기들의 지역에서 떠나달라는 ‘가다라 지방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폭풍우를 잠잠케 하시며 건너왔던(8:23-27) 게네사렛 호수를 다시 건너 되돌아가셨다. 마가와 누가는 이 상황을 다루면서 각각의 복음서에 예수께서 되돌아가기 전에 귀신들렸던 사람에게 자기에게 일어났던 기적을 그 지역 사람에게 증거 할 것을 당부하시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막 5:18-20).”
이를 누가도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눅 8:38-39).” 바로 그 동네는 가버나움을 가리킨다.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마 4:13, 막 2:1).” 가버나움이 갈릴리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중심지였기 이런 표현이 나온 것이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마 9:1).”
뒤이어 2-8절의 내용은 마치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에서 돌아온 후에 발생한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가다라에서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낸 사건을 살펴볼 때 오히려 다음의 중풍 병자 사건이 가다라 사건 이전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막 2:2-12, 막 5:1-20). 이는 두 사건이 시간적으로 연속되어 일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상 예수는 귀신과 죄 문제 같은 영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셨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미에서 연결되는 문학적 서술이다. 신학적 주제에 따라 마태는 이를 재구성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에 2-8절의 도입부로서가 아니라, 앞의 8:8-34의 사건을 마무리 짓는 결론부로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치유하실 때 먼저는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이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 <저희>는 거동을 못하는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온 사람들뿐 아니라 병자 자신도 이에 호응하여 온 것을 포함한다. 단순히 병이 낫고자 하는 그 이상의 믿음이다. ‘저희의 믿음’이란 예수께서 이 병자의 질병을 고쳐 주실 능력이 있음을 그들이 믿었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만이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보실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뜻이다.
예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것이 그들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혹은 간절함이나 어떤 맥락에서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다급한 심정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예수께 대한 믿음’이다. 예수님이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뒤에 다 죽은 아이를 살려달라는 일과 열두 해 동안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던 일과 죽기 살기로 소리치며 다가오는 소경 둘의 믿음이 함께 서술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오직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곧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1, 6).” 이는 더욱이 중풍병자의 치유가 단지 동료들의 믿음에 근거하기보다 근본적으로 중풍병자 자신의 예수께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가능했다. 이는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4).” 하신 말씀을 깊이 음미하게 한다.
곧 우리가 어떤 필요에 의해 주를 찾게 될 때 단지 그 문제로 초점을 맞추어 이를 해결하는 데만 급급한 경우가 있고, 그것을 통하여 오히려 더 하나님을 온전히 구하고 바라는 데 전심으로 믿음을 다하는 경우도 있다. 즉 저들은 원치 않는 끔찍한 현실에서도 주를 신뢰하고 믿음으로 그 모든 상황에 순응하는 사람들이다. 꼼짝 못하는 자가 주 앞에 나아가기를 소망하는 일이나 이를 구하여 어떻게든지 주 앞으로 저를 인도하려는 사람들의 하나 됨이 돋보이는 믿음을 선사하고 있다.
이에 “안심하라.” 이는 용기를 가지라, 무서워 말라는 뜻이다. 중풍병자가 지니고 있던 철저한 절망의 깊이를 일거에 깨뜨리시는 말씀이다. 곧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김으로 두려운 중에도 두려움을 가지고 선다. 불안과 초조한 중에도 불안을 안고 선다. 우리를 억누르는 고통의 무게를 벗고 용기를 낼 수 있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사죄(赦罪)를 선언하시는 순간이다. 이미 그 은총이 실현되었음을 나타낸다. 이 말씀은 적어도 이 중풍병자의 경우에 있어 죄와 질병이 어떤 밀접한 관계에 놓였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곧 우리의 모든 질병과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모든 인간은 예외일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풍병자의 특징으로 볼 때, 그는 오랫동안 나쁜 죄악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오랫동안 타락과 방탕이 원인이 되어 이 중풍병에 걸렸으며, 그 후 지난날에 범한 죄악에서 놓여나고자 양심을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자신과 같은 죄인을 주목해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지난 날 지은 범죄가 용서받았음을 먼저 선언하심으로 질병의 치유가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자기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음을 보이시려는 적절한 때에 일부러 기회를 삼으셨다.
만약 어떤 기적도 행치 않고 말로만 죄를 용서하고 선언으로 그쳤다면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를 용서함과 아울러 저를 낫게 하시는 이적을 행하심으로 어느 누구도 그의 이런 권능을 부인할 수 없도록 하셨다. 이에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8).” 이는 우리로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사 찬송하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이에 어떤 서기관들이 이를 두고 신성모독이라 판단한다. 서기관이란 바리새나 사두개 등과 같은 종교적 당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중앙 성전 또는 각급 회당 등에 속하여 율법을 필사하고 각종 종교 행정을 담당하던 자들을 지칭하는 사람들이다. 즉 당시의 공직을 가리키는 직업군이다. 이들은 유대 종교의 수구세력으로 예수의 메시야 직분에 대한 이해가 없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예수께서 죄사함을 선언하시자 이에 결정적인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하여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하고 통탄스러워하였다.
예수님은 그들 생각을 아셨다. 중풍병자와 그의 동료들의 믿음을 직시하셨던 것처럼 서기관들의 마음도 꿰뚫어보고 계셨다. 이에 대해 마가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다고 서술한다(막 2:8). 성경에는 인간의 생각을 알고 또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이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언급한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10).” 그러게,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괜한 게 아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 2:24-25).”
따라서 오늘 나의 속, 내 마음의 일을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은 아시나니… 이는 두려운 일이면서 동시에 매우 큰 힘이 되는 의지다. 이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결국 나의 ‘악한 생각’도 주가 아심인데, 나는 종종 나의 이 마음이 순수한 것일지를 두고 갈피를 잡기 어려워한다.
가령 아무개가 있다. 저를 마음을 다해 바로 이끌고 싶다. 그 몸과 건강과 형편과 사정으로 우리 교회로까지 오라하기는 어려워서 나는 저로 집 근처 가까운 교회로 연결한다. 그의 주소에서 사방을 살피고, 교회들을 살피고, 설교가 어떠한지, 교회는 어떤지… 나름은 신중하게 찾아서 저에게 권한다. 나의 이런 수고는 무색해서 저는 그러다 어떤 이유로 자기 편한 교회를 선택한다. 그러니 그것을 또 뭐라 할 수도 없고, 하여 어쨌든 교회에 일원이 되어 함께 어울리며 한 지체가 되기를 권면한다. 지난번에는 사람들의 동정과 시선이 어렵다는 말에 그것이 저의 사명이라 일깨웠다. 그 교회 교인들로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일, 저로 인해 누구라도 주의 이름으로 돕고자 하는 마음이 섬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서 아름다운 것이라 누차 설명하였다. 물론 동정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들이 어려울 수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게 저의 사명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나름 설명해도 소용이 없어서 저와 같이 성경공부를 하기로 했다. 전화로든지 줌으로든지 뭐든, 할 수 있다면 말씀으로 같이 하며 저의 믿음의 성장을 이루고자 했다. 그렇게 정한 시간이 번번이 어겨지고 묵살된다. 어제는 바로 그 직전에 병원에를 가야 한다면서 일방적으로 카톡을 하고 그게 전부였다. 나는 속으로 저를 세워 내년에는 우리 교회에서 집사직분으로 같이 하자 해야겠다, 비록 상황이 그래서 직접 오지는 못해도 줌으로라도 예배에 참석하도록 해야겠다, 저의 처지나 상황에서 우리가 한 지체인 것을 교회를 통해 알게 해야겠다… 하는 여러 생각과 구상이 번번이 어그러지듯 묵살된다. 그때마다 나의 갈등은 이게 순수한 의도인지, 아니면 어떤 서운함에 의한 것인지, 나도 내 속을 모르겠어서 늘 주 앞에서 면구스럽다.
이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마 9:5).” 하고 물으시는 오늘 말씀에 주목한다.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할 때 잠시 시선을 멈추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죄사함과 병고침 중에 어떤 것이 더 쉽겠느냐 하고 물으셨는데, 사실 생각하면 ‘일어나 걸어라’고 하시는 것이 분명 더 쉬운 일 같다. 왜냐하면, 죄사함을 선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지만 이적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여러 선지자나 사도들도 가능했다. 종종 세상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한편 유대인의 생각에는 죄사함보다는 병 고치는 능력이 더 쉬울 것이었지만, 이 둘은 모두 권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두 가지다 신적인 일이다. 예수님의 이적은 메시야직의 진정성과 궁극적 목적으로 죄와 사망에서의 구원을 나타내 보이시는 일이다.
곧 이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시다. 누구도 죄를 없이 하게 할 수 없다. 이에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심으로 이와 같은 권세가 예수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 오늘 저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소 선언하셨다. 온을은 이러한 사건들로 연결돼 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10).” 일부러 그러신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당연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하고 물을 것을 알고서 말이다(11). 이에 따른 예수님의 명쾌한 의도는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12).” 곧 자신의 병든 자라고 여기면 의원을 찾을 것이다. 스스로 온전하고 괜찮다고 여기면 쓸 데 없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알리신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3).” 이에 ‘너희는 가서 배우라.’ 하심은 종교적인 임무를 다 한 것이라고 착각하였던 종교인들에게 ‘내가 긍휼을 원하고’ 있음을 알리신다. 이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하는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다. 긍휼과 사랑이 결여된 제사는 아무런 실체가 없는 껍데기와 같다. 예배가 진정하지 못할 때 허튼 시간인 것과 같다. 하여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하고 말씀하심도 그 때문이다.
끝으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인의 믿음과 이를 보신 예수님이 그 죄사함을 명하시는 부분을 재차 읽게 된다(19-22). 여인은 수많은 인파 속에서 예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 했다. 우선은 여성으로서 수치스러운 자신의 질병, 죄를 안고 나왔다. 이를 해결하고자 무려 12년 동안이나 여러 방법을 찾아 헤맸을 것이다.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여자는 예수의 뒤로 갔다. 감히 사람들 앞에 나설 용기도 예수께 당당히 낫고자 구할 입장도 아니었다. 여자는 예수의 ‘겉옷 가를 만졌다.’ 다소 미신적인 신앙에 가깝지만 그만큼 또한 믿음이 있었다.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21).”
이를 아시고,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22).” 이 놀랍고도 신나고, 희한하면서도 놀라운 역사 앞에 웃음이 저절로 번진다. 우리 안에 이마한 믿음만 있어도, “그 겉옷만 만져도” 하는 믿음이 위대했다. 주로 예수의 만져주심을 받은 사람들이 병에서 치료받았다는 것을 알고, 역으로 생각하여 자기가 예수의 겉옷만을 만져도 다른 사람들처럼 병이 나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를 모르실 리 없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그 많은 인파 속에서도 이를 아셨고, “안심하라.” 하신다.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22).” 이와 같은 원리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다.
이에 오늘도 주 앞에 고하기를,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시 68:3-4).
사는 게 때로 힘에 지칠 때도,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19).
이를 목격하고 경험하고 사는 일이란 복되다. 그리하여,
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
…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28, 34-3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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