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현. 2026. 6. 13. 05:52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 11:6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 70:4

 

 

누구든지 회의와 갈등이 들 수 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이 길이 맞나? 싶어서 다른 길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앞서 예수의 길을 예비하였던 요한이 옥에 갇혔다. 때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복음을 전파하러 다니시고 있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1).” 그런데 요한의 신세는 옥에 갇혀 있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2-3).”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훈련하시고 파송하시는 가운데 자신의 처지는 상대적으로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예수께서는 가버나움 근처에서 각처로 제자들을 보내시고 있었다.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 6:30-31).” 예수님은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일하고 계셨다. 가르친다는 것과 전도한다는 것은 여기서 분명히 구별된다. 가르친다는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고, 전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음을 많은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신자를 교육시키고(디다케),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케리그마)이다. 

 

그때 요한은 옥에 있었다. 헤롯은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였다. 이를 세례 요한은 책망하고 지적하였다. 이에 요한을 옥에 가둔 일이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14:3-4).”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였던 성의 감옥이었다. 예수께서는 유대 지경을 벗어나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계셨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4:12-13).”

 

요한은 감옥에 1년 정도 감금된 후 사악한 헤로디아의 요구로 참수당했다(14:1-12). 그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요, 메시야의 선구자로 유대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며 설교하던 자이다. 자신의 뒤에 오시는 이가 자기보다 능력이 많고 또 그를 믿는 이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 확신하고 선포했었다. 그런 가운데 예수께서 오셨고 그는 확신하였으나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이 미덥지가 않았는지 혹은 자신이 생각하던 사역이 아니었는지… 예수께서 자신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맞는지? 궁금해졌다. 본문에서 마태는 예수를 그리스도란 칭호로 부르지 않고 있다. 그런 그는 여기서 세례 요한이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회의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에 염두하고, 요한이 의심하고 있는 그분 예수가 확실한 그리스도요 모두가 오실 것을 기다리던 메시야이심을 깨우쳐 주기 위해 이 표현을 썼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2).”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제로 요한이 ‘들은 그리스도의 일’에 대해 회의하고 갈등하였을 세례 요한을 짐작하게 한다. 곧 정작 예수께서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교제하였다. 예수의 이적과 교훈, 제자를 파송하는 등의 사건들을 전해 들었다. 특히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키신 일도 들었을 것이다. 그렇듯 큰 이적과 기사를 베푸셨음에도 자신의 선구자요 친족이었던 자신이 감옥에 갇혔는데 무관심한 것을 두고 의아해 했는지도 모른다. 흔히 우리의 생각과 다를 때, 뭐지? 싶은 어떤 의심은 우리로 주춤하게 한다. 나는 요한의 이와 같은 심정을 이해하겠다. 신대원을 마치고 글방에서 교회로, 글방 선생에서 교회 목사로 바뀌고 난 뒤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글방에 잘 다니던 아이들 부모 가운데 종교인으로의 선생이 부담스럽다며 대놓고 아이를 보내지 않는 일도 생겼다.

 

누굴 염두에 두고 같이 교회를 세워갈 줄 알았다. 혹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어디 괜찮은 자리(?)로 소개되어 갈 줄 생각도 했다. 어릴 때 가끔 낭만적으로 꿈꾸던 나환자촌 교회나 보육원 같은 기관의 원목이나 교목으로 갈 줄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나의 예상은 번번이 어그러졌다. 오히려 공황과 불안이 가중되었고 사람을 상담하고 대하는 일에도 어려움이 생겼다. 가까이 하던 친구들과 선생은 외면했고, 글방에 아이들은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그만두었다. 마치 텅 빈 광야에 홀로 버려진 듯 아무도 오지 않는 날이 길어졌다. 그 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을 읽고, 여러 신앙서적을 탐독하는 것뿐이었다.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서 지금도 가끔은 ‘이게 맞나?’ 하는 의심이 든다. 굳이 이럴 거면 교회를 왜 옮겼지? 하는.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3).” 정확하게 세례 요한이 제자들 중 둘을 예수께 보내었음을 누가는 강조하였다.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눅 7:19).” 그런데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왜 예수께 보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추측할 수는 있다. 메시야에 대한 회의와 자기 제자들의 의구심을 풀어주기 위해서도 그렇고, 예수가 과연 자기에게 세례를 받았던 전날의 그 사람, ‘이는 내 아들이라.’ 하신 하늘의 음성이 들렸던 그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를 메시야로 확신하기 위해 직접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도마와 같이 눈으로 직접 보고, 만져보고,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 안의 의심은 단지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믿음이 흔들릴 때거나 스스로가 확신하지 못할 때이다. 더욱이 요한처럼 옥에 갇혀 있는 신세 같다면 더더욱 이게 맞나? 싶을 것이다. 가령 누구에 대해 어떤 열심을 다해 대하고 기도하며 힘썼다. 그런데 번번이 그럴 때면 마치 일을 망치는 것 같은 결과를 낳을 때가 있다. 괜히 그랬나? 싶을 정도로 안 하니만 못한 사이가 되거나 하나마나한 일이 될 때 나는 급속도로 갈등한다. 후회와 미련이 나를 억누른다. 차라리 그냥 둘 걸… 하는 마음으로 괴로워한다. 좀 더 신앙적으로 믿음으로 가까워지려 하면 그처럼 틈이 벌어진다. 그냥 좋은 사이로 교회도 말씀도 권하지 않을 때가 나은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요한의 의문은 정당하다. ‘오실 그이’로 묘사될 이와 같은 표현으로 물었다.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눅 7:20).” 그때,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21).” 하는 것으로 누가는 요한의 의심에 대한 해결책으로 ‘오실 그이’가 왔을 때, 일어나고 있는 메시야의 이적을 의도적으로 밝히고 있는 듯하다. 영적으로 못 보던 이가 눈을 뜨고 본다. 그때 요한의 제자들이 묻는 것이 ‘당신이오니이까?’ 하는데, 당신이 바로 오실 그이 오니이까? 하는 질문은 ‘메시야의 오심’이 맞나? 하는 것이다.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이까?’ 하는 것으로,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4-5).” 하심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일거에 요약해서 전달하게 하신다. 곧 저들이 ‘듣고 보는 것을’ 말이다. 예수님의 답변은 간결하고 권위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야로서 변호를 일찌감치 접어두시고 단지 그 현장의 사역을 통해 메시야의 실재(實在)를 증거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는 이사야의 글로도 앞서 증거된 바 있다.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29:18-19, 35:5-6, 61:1).”

 

누가는 복음서에 이와 같은 시점으로 소개한다.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눅 7:21).” 곧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고 계시던 때에 도착했고,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을 있는 그대로 전하게 함으로 메시야에 대한 저들의 의문에 대한 답을 가름하였다. 이미 온몸으로 답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듯 듣고 보는 것이란 ‘경험한 것’이란 의미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곧 예수의 증거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있었다. 듣는 것은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진리의 영적 의미에 대한 것이고, 보는 것은 영적 진리의 진실과 권위에 대한 증거이다. 결국 예수의 증거는 완벽한 권위를 갖고 말과 행동으로 그 현장을 보임으로 군더더기 없게 하셨다.

 

예수님의 답변은 자신에 대해 의심하는 요한에게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내세우신 이적들은 사실 선지자들도 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이런 일들을 하셨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러한 이적을 행하였다! 이 차이를 알기란 쉬운 게 아니다.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 같아도 빛이라고 같은 빛이 아닌 것처럼, 발광체와 반사체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예수께서는 메시야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셨다. 요한은 이 사실을 듣고 보아서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어렵지 않게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내가 느끼고 믿는 것으로 이해하면 가능할까? 아무런 성과도 없고 오히려 늘 하나마나 한 것 같은데 매번 주의 돌보심으로 교회가 이어져간다. 또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사연으로 그런 사람을 마주하게 하신다. 비로소 전하였을 때 저들은 멀어지고 심지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지만 다음에 있을 성령의 역사를 나는 지금으로서 알지는 못한다.

 

모친의 자살로 신학생이 사회복지사로 활동하다 그마저 활동을 멈추고 두문불출 은둔형이 되었는데, 어쩌다 저가 우리 교회로 오게 된 것일까? 나와의 대화 이후 어찌 되었을까? 다니던 교회로 갔을까? 다시 사명을 찾아 일하고 있을까? 나는 아무런 소식도 알지 못한다. 늘 그냥 아는 사이로 지내길 원하는 이에게 바른 신앙과 그 생활을 요구하며 성경공부를 권하고 예배로 인도하다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막혔다. 괜히 그랬나? 그냥 둘 걸 그랬나? 하고 여러 생각을 하고는 한다. 남편을 잃고 그의 일을 맡아서 사업을 하던 예순다섯 살의 여사장에게 공연히 예수를 소개했나? 그나마 일주일에 두 번씩 오면서 글도 쓰고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지내고자 한 것을 너무 성급하게 교회로 이끈 것일까? …… 나는 늘 일이 예상 밖의 결과로 끝나고 나면 마치 일을 망친 것 같아서 혼자 또 한동안 힘들어한다.

 

한데,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4-5).”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소경이 보며, 즉 모든 질병과 환난과 곤비함, 그리고 애통하는 것이나 죽음까지도 없어지리라는 것이 그 당시 팽배해 있던 보편적 확신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런 기대와 구약의 사고를 지닌 자들에게 구약에 근거하여 메시야로서 그 일을 확인하게 하셨다. ‘맹인, 앉은뱅이, 귀머거리’ 하는 모든 병의 의미를 영적으로 이해하면 보다 쉽겠다. 볼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늘 앉아 있는 영혼으로 귀에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 자들로 보고 듣고 걷게 하신다.

 

우리의 사역도 그러한 게 아닐까? 조금은 더딜지라도 바로 그 즉흥적일 수 없는 성과로 오히려 기다리고, 기다림으로 주의 뜻을 더욱 갈구하고 확신하면서 하나님을 확신하고, 알고 찬양할 것을… 나로서는 그리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상황으로 주밖에 달리 길이 없다! 어떤 성과가 있어서 교인들이 모이고 교회가 확장되고 나 역시 인지도도 높아지고, 뭔가 교회다운(?) 부흥이 일어나면 좀 나을까? 그때도 정치나 사람을 보지 않고 이처럼 말씀과 기도로만 죽은 듯 살 수 있을까? 오늘 주님은 그런 나 같은 자에게 외치신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6).” 예수의 일로, 교회를 이뤄가고, 한 영혼을 상대하는 일로 실족하지 않는 것으로 복이다. 실족한다는 것은 길을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된 것으로 부딪쳐 넘어지는 것이다. 또는 그것에 걸려 비틀거리는 것이다.

 

말씀에 있어 이와 같은 계시의 발전 과정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다. 제한적인 사고와 인식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알 수 없다. 그러다 돌아보면 ‘앗’ 하고 그제야 보인다. 저만치 걸어온 길마다 주가 일으키신 초역사적인 역사들이 말이다. 누가 믿어주겠나? 97학번에 신학부로 편입하였을 때나 다시 물러갔다가 09학번으로 신대원을 3년, 6학기 동안에 하나님이 나의 전 과정의 학비와 생활비를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입히셨던 사실은 거짓말 같다. 오늘도 이와 같은 여건에서 이렇듯 교회가 유지되고 이어져가는 것이 기적이다. 이는 예수와 그의 사역을 믿으며 그를 참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증거의 한 단면이다. 나 같은 보잘것없는 자의 이러한 실제 현실과 체험을 누가 알기나 할까? 나도 가끔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이상하다.

 

이에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20-21).” 가장 가까이서 보고 듣고 느끼며 함께 했던 이들이 오히려 회의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은혜에 무지한 사람이 은혜 없이 사는 사람보다 불쌍하다. 회개하지 않음으로 믿지 않았다. 그들의 완고한 태도를 책망하신다.

 

‘화가 있을진저’ 이는 숙명적인 절망이나 엄숙한 경고와 연민의 정을 표현하는 일종의 감탄사다. 먼저 ‘고라신’은 지명으로 그 위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가버나움에서 북서쪽으로 떨어진, 옛날에 파괴된 고라신의 유물들이 발견된 곳이다. ‘고라신과 벳새다’ 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한다. 예수님의 선교 중심지였던 가버나움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않다는 점에서 그들 고을 선교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을 것을 짐작할 수는 있다. ‘두로와 시돈’은 항구도시로 구약의 선지자들은 가끔 바알 우상 숭배지로 이 도시에 대해 심판을 예언하곤 하였다(사 23장).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방아 너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가 내게 보복하겠느냐 만일 내게 보복하면 너희가 보복하는 것을 내가 신속히 너희 머리에 돌리리니(욜 3:4).” 그러므로 오늘 주님은 우리로 부르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8-30).”

 

그냥 쉬는 게 아니라, ‘내 멍에는 쉽고 가벼움이라.’ 하시며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신다. 예수께서 오늘 내게 제공하신 짐, 그의 계명은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이 사랑은 확실한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다. 선하고, 바르고, 좋은 것이다. 항상 예수의 능력에 의존하게 하는 신앙이다. 나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으로의 사랑이다. 영생을 동반한 쉼을 얻는 증거이다. 이에 오늘도 말씀을 통해 나로 늘 흔들리게 하는 것들을 돌아보았다. 주춤하고 물러서려 할 때, ‘멍에를 메고 배우라.’ 하심을 염두에 두게 하신다. 이때에,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시 70:1-2).

 

오늘의 회의와 갈등이 나로 하여금 주밖에 없음을 더욱 더 확신하게 하는 것이다. 주만 의지하며,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