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0-13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 72:18-19
서로를 안다는 것이 더러는 선입견으로 작용한다. 예수에 대해 잘 안다고 여겼던 이들이 예수를 배척하였다. 오늘은 천국에 대한 비유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신기해하였다(53-54). 더욱이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55-56).” 문제는 그렇게 안다고 하는 것으로 “예수를 배척한지라.” 스스로 복을 찬 것과 같아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57-58).”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일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매듭짓는 다섯 개의 형식적인 결론들 가운데 하나다. 그때마다 이를 구분하여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7:28, 11:1, 19:1, 26:1).” 그렇듯 오늘 본문에서도 특별히 ‘천국 비유’를 마치시고, 이제 새로운 사건 곧 예수님의 고향 주민들이 배척하는 이유를 들며 장을 마친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세 차례의 갈릴리 전도 사역 가운데서 두 번째에 해당한다(8:5-13:58). 사역을 시작하신 후에 처음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모습이다. 예수의 고향은 물론 나사렛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눅 4:16).” 이때부터 예수께서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그의 말씀 사역을 감당하셨다. 따라서 그에 대한 유대의 반감이 한층 고조되기 시작한다. 예수와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대립은 그의 고향에서부터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즉 저들은 예수님을 한낱 자신들이 보았던 고향 땅 청년으로 생각하였다.
그럼에도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하고 마태는 이를 주목하게 한다. 유대교인들과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모임을 구별하기 위하여 특별히 ‘저희’라는 표현을 써서 ‘저희 회당’이라 지칭하였다. 이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모임인 제자들의 집단이나, 이적을 바라며 찾아다니는 무리들의 모임에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그를 모함하고 해하려는 무리들이 공식적으로 모이는 회당에서 그들을 가르치셨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곧 예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그의 사역은 가르치심과 복음을 전파하심과 병을 고치심에 최선을 다하셨다.
그러니 예수께서는 회당에서만 가르치시지는 않았다. 다만 회당에서도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회당에서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눅 4:16-30). 그러자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유는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하는 선입견과 판단 때문이다. 예수님은 공식적으로 교육을 받은 게 아니다. 예수가 권위자이심을 증명해 주는 지혜와 능력과 진리를 가르치는 것과 기적을 행하는 힘의 근원이 어디서 나는지 알지 못하였다. 즉 저들은 자신들의 판단으로 이러한 지혜가 하나님께 있는 것인지, 바알세불에게 있는 것인지, 놀라워하면서도 그 권위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 오늘의 경우도 다를 게 없다. 가족이나 친구나 가까운 자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권면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저들의 첫 번째 선입견은 예수께서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공생애 전에 그 일을 하고 자랐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3).” 사실 당시의 유대 관습에 의하면 자녀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도 공생애 전까지 목수의 일을 담당하였다. 당시의 유대 주택은 대부분 흙벽돌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목수란 직업은 넓은 의미에서 건축 기술자 또는 목공 기술자로 볼 수 있다.
또한 ‘그 형제들’을 사람들은 잘 알고 지냈다. 이들은 요셉과 마리아 사이의 아들들이고 예수님의 친 동생들이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12:46).” 여기서 야고보는 후에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행 15:12-13).” 또한 ‘야고보서’의 저자이다. 형제 유다는 ‘유다서’의 저자이다. 이 둘을 위시하여 그 외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만 하더라도 예수를 구주로 믿지 못하였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 7:5).” 그러다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승천 이후에 그들의 믿음이 온전하여진 것이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
이렇듯 가족 간에서 성령으로가 아니면 남들보다 못한 사역의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 거 보면 나 역시 남들이 더 편하고 저들로부터 인정받고 공감을 얻는 게 더 빠르다. 가족이어서 더러는 말씀을 전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도 평소 더 잘 하려고 하는데, 가령 다툼이라도 있는 날은 가정예배를 드리는 일조차 서먹하다. 나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라, 가족과 친구들에게 말씀을 다가가는 일이 더 어색하고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러니 나는 종종 저들의 말이나 표정에서 주춤거리게 된다. 어떤 선입견이 저들에게도 있겠으나 나 역시도 있어서, 괜히 의식하고 조심하게도 된다. 쭈뼛거리게 될 때도 있다.
이때의 극단적 자세는 ‘배척’이다.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들이 걸려 넘어졌다.’ 하는 것이다. 곧 그들의 감정이 매우 상했다거나 적대시했다는 등의 표현과 동일하다. 서로 잘 안다고 여기는 것이 ‘예수에 대한 불쾌감’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선적으로 눈에 띈 것은 저들이 예수를 도무지 용납하지 않으려는 태세였다. 예수님은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거절되고 배척당하셨다. 심지어는 신성모독이라 하며,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눅 4:29).” 이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구속 사건을 예고한다.
이는 예수의 지혜와 권능이 저희들에게 거침돌이 되어 저들이 예수의 말씀을 거부함에 따라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나아가게 될 것을 암시한다. 그렇듯 고향이 유대 민족이 예수를 배척함으로 그들은 예수로부터 그들의 육신과 영혼의 질병을 치유 받을 기회를 상실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신 것이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이는 유대 뿐 아니라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에서도 볼 수 있는 격언이 되었다.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 중에 예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배척을 당한 선지자로 예레미야를 생각하셨을 것이다. 아나돗의 제사장의 아들 예레미야서는 ‘그곳 사람들’을 두고,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렘 11:21).”
이렇듯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막 6:6).” 예수께서도 그들의 불신에 대해 놀라움과 경악을 금치 못하셨다. 그러므로 나사렛 고향을 제외한 모든 촌에서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푸는 일이 빈번하였다. 고향에서만큼은 그에 대한 불신과 시기가 지나치게 강했기 때문에 삼가셨다. 실로 선지자의 자연적 속성을 익히 알고 있는 자는 그 선지자가 지닌 초자연적 속성(신적 권위에 의한)을 소극적으로 간과해 버리거나 적극적으로는 배척하는 누를 범한다. 적당히 모르거나 거리감이 있는 경우가 오히려 어떤 신뢰도 깊다. 그래서들 서로가 친밀한 관계보다 친절한 타인으로의 거리두기를 선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 일로 예수님은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셨다. 스스로들 복을 차는 것이다. 누가 자꾸 내게 ‘그런 말’이 불편하다고 했다. 저에게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형이고, 인간으로 그냥 편한 사이이길 바랄 뿐 영적으로 가까이 하는 것에 부담이 느껴졌다. 누구는 노골적으로 그래서 더 교회는 ‘거기로’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 말이 상처가 되었다가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아이엄마는 글방 선생으로는 너무 좋고 존경하나 종교인으로서는 부담스럽다며 목사가 되고 난 뒤 아이들을 보내지 않았다. 저이는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더욱이 가족들에게서 자주 느낀다.
그러자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막 6:5-6).” 하심도 이해가 된다. 실제로 예수께서 권능을 행하실 능력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 공생애 기간에 많은 기적을 행하신 가운데 배척하는 고향 사람들과 가족들에게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자제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곧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나타내시며 전파하시고자 할 때 그의 기적도 함께 행하셨다. 그러므로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늘로서 난 자’이며 ‘하나님이 주신 권능을 행하시는 자’라고 사실을 배척할 때 달리 도리가 없었다. 천국이 이미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시는데 이 말을 믿지 못하는 저들을 어쩌겠나? 결과적으로 계시(믿음)의 문이 열리지 않은 자들에게는 기적과 치유도 열리지 않는다.
이는 어릴 때 젊을 때 내가 나의 부친을 멀리하고 외면하려 했던 것을 후회하게 한다. 오히려 먼 발치께에 있는 선생을 더 따랐고, 저의 말이나 권위에 더 신뢰가 갔다. 그러던 시절에 나의 부친은 안타까움에 당시 설교를 녹음한 녹음테이프를 주면서 운전하고 다닐 때 들으라고 하였으나 그때는 제대로 듣지 않고 들고 다니다 버린 적도 여러 번이다. 요즘은 다르다. 에베소서를 설교 본문으로 정하고 말씀을 준비하는데 있어 나는 생전에 저장해 놓은 아버지의 원고 파일을 찾아서 혼자 읽으며 공부한다. 이를 앉아서 혼자서 서툰 타이핑을 하며 깊은 묵상의 시간을 가졌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예전에는 주로 손으로 직접 쓰던 시대라, 환갑이 지나고 나이 일흔이 다 돼서 노트북을 사용하며 원고를 저장하였으니….
오늘도 복음은 씨앗과 같이 미미하게 우리 안에 떨어진다. 더러는 길 가 같고, 돌밭 같고, 가시떨기 가득한 땅 같아서 말씀을 듣고도 금세 잃거나 채 자라지 못하고 가시에 막히거나 돌부리에 걸려 더는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이에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15-16).” 하시며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하시면서 이와 같은 비유의 말씀을 다시 풀어서 설명해주신다. 곧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하실 때 우리 마음에 얼마나 많은 여러 생각과 사상과 가치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가를 생각하게 된다(18-19).
또한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하심은 우리 마음에 여전한 어떤 응어리진 것을 생각하게 된다(20-21). 이것을 두고두고 굳어지게 하여 흔히 ‘트라우마’라 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무장하고 살고, 이와 같은 방어기제로 말씀을 듣기도, 실천하기도 어려워하는 경우가 여럿이다. 심지어 누구는 사역자로 목회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게 불편하다. 선친에 대한 마음이 그만큼 앙금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는 사람에게 실망하였던 기억, 교회에 대한 안 좋은 인식, 혹은 가난이나 장애나 어떤 슬픔으로 마음에 저마다의 ‘노여움’이라는 돌덩이 하나씩을 얹고 산다.
이에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22).” 곧 그러한 못된 습성과 모난 뿌리가 염려와 근심으로, 혹은 경계와 의심으로, 염려와 자책으로 엉겅퀴처럼 떨기를 이뤄 가시가 뒤범벅된 마음이라 도대체 자신이 각오하고 결심하지만 어렵다. 번번이 자신의 기질와 성격으로 막힌다. 이를 위해서는 갈아엎어야 한다. 밭을 개간하는 일이란 땅을 뒤집어놓고 돌을 고르고 쓸모없는 뿌리를 걷어내야 한다. 시골에서 자랐을 때 소를 끌고 쟁기를 밀며 부지런한 농부들은 매번 그 땅을 갈아엎곤 하였다. 그렇게 해서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23).” 결국 저절로 좋은 땅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여,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하여 오늘 우리의 복된 자세를 되새긴다.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10-13).” 고로 오늘도 말씀으로 하루를 여는 것은 있음으로 더욱 넉넉하게 되고자 함이다. 하여 주님은 오늘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우리의 ‘마음 밭’과 ‘가라지와 곡식’과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이 천국이 어떠한가를 알게 하신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도 같다(33).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고(44),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에게 극히 값진 진주 하나’ 같고(46),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고(4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52).” 하신다.
이에,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시 72:13-14).
이는,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17).
하시고,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18-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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