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 12:36-37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시 71:1
말(言)이 화근이다. 보면 늘 모든 게 말에 달렸다. 어떤 느낌이나 생각이야 마음의 일이라, 이를 다스리는 데 있어 말이 밖으로 나오면서 서로의 마음을 더욱 상하게도 한다. 이에 오늘 말씀에서도 여러 사람의 말과 말을 듣게 된다. 예수님도 말씀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고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 하심으로 이 말의 연속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 하심은 앞서 사람들의 말을 상기하게 한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1-2).” 하고 바리새인들이 말하였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이는 한 순간의 동작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찰을 통해 본 것을 말한 것이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와 같은 장면을 목격하고 지적하였다. 바리새인들의 시선은 현상적으로 제자들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예수를 고소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이다. 그들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듯 말하였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한다거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한다거나 하면서 말이다(9:14, 15:2). 곧 저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행위를 빌미삼아 예수께 도전과 비난을 일삼은 것이다. 여기서도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이라 규정하는 율법을 기준으로 말하였다. ‘하지 못할 일’은 ‘합당치 못한 일’을 의미한다. 사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규정은 모세의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상의 유전에 의한 것으로 39개의 항목이 있다.
이 39개 항목이 기록된 것에 따르면 성전에서 예배드릴 경우나 기근 등으로 인해 생명이 위태로울 경우에는 그것을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본문의 경우처럼 피할 수 있는 경우에는 밀 추수를 하는 일은 엄연한 범법행위가 된다. 일련의 사건이 있은 때보다 훨씬 후에 이 조항들이 다소 완화되어 안식일일지라도 손으로 곡식을 잘라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어떤 기구를 사용하는 것만큼은 금지하였다. 그러니까 스스로들 규정하고 따르려는 의식적인 행동으로 자신을 옭아매는 식이라, 자유를 속박하는 것은 자신들이었다.
이에 예수님은 말로서 응수하신다. 곧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셨다. 이는 ‘다윗이 시장할 때에 한 일’ 곧 “…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하니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삼상 21:1-6).” 하는 사건으로, 다윗이 요나단의 도움으로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을 피해 호위병 몇 명과 도망하다 놉에 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제사장 아히멜렉이 주는 거룩한 떡으로 그들의 주린 배를 간신히 채웠던 일이다.
이 일은 제사장만이 그 거룩한 떡 즉 하나님 전에 진열되었던 12개의 떡을 먹을 수 있다고 하는 모세의 율법(레 24:5-9)을 위배한 행위가 된다. 이 진설병이 방금 올린 것으로 묘사되어 이 사건이 안식일에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설병은 금요일에 만들어져 다음날 안식일에 진설했고, 그 묶은 것은 대체되어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고 한다. 예수님의 말의 의도는 다윗이 시장할 때 모세의 율법을 어겼으므로 시장한 제자들이 조상의 유전을 어긴 행위도 용납될 수 있다거나 어떤 예외를 허용해야 한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다윗의 그러한 행위를 정죄하지 않았고 사실을 지적함으로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나치게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근본에 어긋난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의 관점은 ‘안식일이 너희에게 주어진 것이지, 너희가 안식일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다. 그렇듯 유전을 사람보다 귀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아히멜렉이 율법의 규정을 어기면서도 다윗과 소년들에게 떡을 주었다는 사실을 바리새인이면 알고 있을 것이고, 시장한 예수의 제자들의 행위를 당연히 용납했어야지 오히려 이를 정죄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말은 관점의 차이를 가지고, 관점은 주관적인 판단이 가미되어 드러난다. 이에 예수님은 아예 쇄기를 박듯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6-8).” 여기서 ‘성전보다 더 큰 이’라 하심은 우선 성전법이 안식일을 지키는 법에 우선하듯 성전의 주인인 하나님의 아들의 활동은 성전법보다 우선한다는 논리다.
이 구절의 논쟁은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어떤 애매모호한 논리에 대해 더 분명한 논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성전보다 더 큰 이’에 해당하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이 성전에서의 제사장 예배보다 더 위대하다는 의미다. 또한 ‘성전보다 더 크다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의미한다. 이는 7절의 말씀에서 ‘자비를 원한다.’ 하는 말씀을 근거로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전보다 더 큰 것’이 굶주림에 대한 긍휼한 생각, 사랑이라는 것이다. 곧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 그 어떤 율법이나 규례보다 예수가 더 위대하심을 알리시는 것이다. 성전은 안식일보다 크고, 예수는 성전보다 크신 분이시다. 이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기준을 둔다. 율법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다. 율법은 비로소 예수에서 완성된다.
더 나아가 자신을 성전보다 큰 이라 표현한 것에 대해 예수의 권위가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를 무죄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그의 모든 제자들이 신약 시대에 있어 제사장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한다. 즉 예수가 성전보다 크다고 자신을 소개한 것은 바로 예수 자신의 권위와 제사장들의 권위를 대조하는 문제가 아니라, 성육신하신 말씀으로서의 예수께서 성전 그 실체이심을, 예수의 절대적인 권위는 제한되지 않고 영원하심을 강조한다.
하여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7).” 하신 것은 앞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9:13).” 하신 말씀으로 호세아서 6장 6절의 말씀으로 ‘자비가 제사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시는 것이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이는 제사를 부인하고 중단하라는 게 아니라, ‘종교적 의무’를 배격하고 인본주의를 주의하라는 것이다. 분명 하나님의 뜻과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실천하는데 있어 자비를 율법의 의무보다 우위에 두는 것이다.
그러나 늘 말이 앞서는 것은 종교를 의식하고 이를 판단하는 데 있어 ‘모든 세대 사람들의 공통된 과오’가 거기에 있다. 이에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심도 결국은 말이 먼저 쏘아져서 정작 그 의미는 뒤따르지 못하는 경우를 보여준다. 이에 단호하게 말씀하심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8).” 곧 안식일을 제정하신 근본은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곧 안식일의 기원은 ‘사람의 안식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 두지 않고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다. 곧 주님은 그 자신이 신령한 안식이 되심을,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일과 같음을 알리신다.
곧 그를 떠나 행하는 모든 것은 안식일의 파괴가 된다. 어떤 일에 주체적 운용은, 주인이신 예수께서 안식일을 소유하고 주관하며 안식일의 규례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지금까지 가려둔 것은 안식일이 지닌 참 자유와 평안을 들추어 모든 이에게 그것들을 나누려하심이다.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는 말씀은 바로 안식일에 얽매여야 하는 의무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자유하게 하시는 권세를 예수께서 받으셨다.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나 주에게로 와서 쉼을 얻으라는 의미다. 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하시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우린 어쩌면 우리의 말로 우리의 의식을 묶어둔다. 우리가 서로를 용납하고 관용하여 이해할 수 있는 힘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의식적인 행함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주님을 온전히 섬김으로 주께서 주일의 주인 되심을 아는 것으로 자유하여진다. 바로 그렇듯 전하신 말씀은 뒷전으로 미루고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9-10).” 그러니 우리의 의식이나 말이란 게 얼마나 고약한 지를 알 수 있다. 우선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거기서 떠나’셨다는 것이다.
‘거기를 떠나다.’ 하는 것은 ‘자리를 바꾸다’는 의미로 이야기가 진행되던 장소와 시간이 전면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주 이런 것을 경험한다. 가령 누가 내 안에 들어왔다. 어떤 일로 혹은 상황으로 저의 사연을 접하고 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주께로 가고자 한다. 그러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대체로 들어주는 때는 머물다가 뭐라 권하면 떠나는데… 그럴 때는 허무하다가 또 다른 이야기로 다른 인물과 사건이 내 앞에 주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하심 같이 어떤 이야기, 그 상황이 빠르게 전환되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이렇듯 극명한 어떤 변화, 전환에 대하여 ‘회당에서 손 마른 자를 고친 사건’이 일어난 날은 ‘밀밭에서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사건’이 있던 바로 그 안식일과 다른 날이든지 같은 날이든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같다. 곧 “거기에서 떠나”셨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나 상황이 거기서 끝났다는 의미와 같다. 다른 사건, 다른 이야기다. 주어지는 상황에서 우리의 만남과 머묾은 모든 게 일시적이다. 지나가는 것들뿐이다. 시간도 공간도 우리의 모든 인연도 지나간다. 영원한 머묾은 이 땅에 없다. 하면 그것으로 미뤄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30).” 하시는 말씀에서 멈추게 된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라 하심은 상대적으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 하심과 같아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눅 9:50).”에 의해 ‘우리’와 ‘너희’의 사이에서 ‘무관심한 자들’에 대하여, 이는 하나님의 권세와 사탄의 권세가 서로 투쟁하는 와중에 ‘중립적 입장’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함께 아니하는 자’란 단순히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해 무관심한 자, 그 이상으로 예수와 연합하기를 싫어하는 자를 뜻한다. 좀 더 적극적으로 바리새파나 그 추종자들처럼 공공연히 예수를 비난하고 서로 의문을 제기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고로 이들 모두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들로 동일하게 “헤치는 자”이다(30).
따라서 오늘 말씀으로 새삼 느끼는 것은 ‘말의 품격’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37).” 하면 누구를 대할 때나 어떤 일을 논할 때, 어떤 상황을 풀어서 말할 때나 주장할 때, 주여! 나의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길…. 자칫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 그러므로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사 57:19).” 고로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호 14:2).” 할 때,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 141:3).
이에 오늘도 주 앞에 시편으로 아뢰기를,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시 71:1-2).
내 의지로는 감당할 수 없는 ‘율법적인 말’과 ‘의식적인 판단’에 대하여 더는 주 앞에서 나의 입장이나 생각은 죽어지기를.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5-6).
할 때에,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17-18).
오늘도 주 앞에 엎드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23-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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