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 14:28-33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 73:16-17
때론 무모함 같이 주를 바란다. 호기롭게도 감당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다 보기 좋게 빠져 허우적거리다 주가 건지심으로 산다. 우리의 믿음은 작다. 그럼에도 스스로 믿을 때 자신의 믿음으로 넘어지고 쓰러질 때가 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나 시편의 시인과 같이 알면서도 우린 더러 미끄러져 넘어질 때가 있다. 이에 주의 전에 올라와 기도하면서 깨닫는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8).
때는 헤롯이 세례 요한을 처형시킨 주후 39년의 일이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전도하고 계시다 저가 죽은 소식을 듣고 들판으로 나가셨다. 많은 사람들이 따랐고 그런 가운데 병자를 고치시고 말씀을 전하셨다. 굶주린 저들로 돌아가게 하자는 제자들의 말에 예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 이후 제자들을 배에 태워 보내시고 예수님은 기도하려 혼자 남으셨다. 그때도 바다에 풍랑이 일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 배에 있는 제자들에게로 오셨다. 이를 보고 유령인가 하다 예수신 것을 알고 베드로가 물 위로 내려섰다. 예수를 볼 때는 물 위로 걸을 수 있었지만 풍랑에 두려운 마음이 들자 금세 물에 빠졌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31).”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드셨고, 왜 의심하는가 하시며 나무라셨다. 특별히 부름 받은 세례요한은 선구자의 사명을 감당하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예수의 삶의 예표가 되었다. 세례요한의 삶과 죽음은 그 전체가 예수의 모형이다. 그의 투옥(14:3)을 통해 예수의 수난의 삶이, 그의 죽음을 통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예표 되었다. 세례요한의 죽음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사역은 더욱 강화되었다. 의로운 말을 외치다 세상 권력에 당하는 요한의 죽음에서조차 당신의 예표를 보신 것이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스스로 메시야가 되심을 드러내시고, 수차의 고난을 예고하셨다. 곧 메시야로서 십자가 고난을 준비하셨다.
당시 팔레스타인 북부, 헤롯 안디바스의 관할 지역은 전 유대 땅에서 가장 큰 화제는 세례요한의 죽음과 예수에 대한 소문이었다. 세상은 예수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부단히 자신들만의 편협한 시각으로 오해는 깊어갔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헤롯은 분봉왕으로 ‘네 개로 이뤄진 나라’에서 1/4을 통치하는 자이었다. 이들은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로마가 다스리는 한 부분을 통치하는 왕을 가리킨다. 헤롯은 주전 4년부터 39년까지 네 개의 통치 지역으로 나뉜 유대 땅 가운데서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렸던 헤롯 안티파스이다. 당시 이곳에서 세례요한과 예수께서 활동하셨는데 예수님은 헤롯을 간사한 여우라고 부르기도 하셨다.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눅 13:31-32).”
세례요한은 ‘헤로디아의 일’로 갇혔다가 죽임을 당했다. 헤로디아는 헤롯 안티바스의 이복 형제인 아리스토블루스의 딸이다. 그녀는 헤롯 빌립, 곧 자신의 삼촌과 결혼하여 살로메를낳았다. 그런데 사바티안 왕인 아레타스의 딸과 이미 결혼한 바 있는 또 다른 삼촌 헤롯 안티바스가 그녀를 유혹하여 남편 빌립을 버리고 불법적인 재혼을 하게 했다. 그런 까닭으로 아레타스의 딸은 본국으로 도망가게 되고 끝내 두 나라 간에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결국 안티바스는 이 전쟁에서 참패하게 된다. 이때가 세례요한을 참수시킨 바로 직후였기 때문에 이 참패의 원인은 세례요한을 살해한 징벌이라고 간주되었다. 본문의 ‘헤로디아의 일’이란 헤롯 안티바스와 헤로디아의 불법적인 결혼에 대한 세례요한의 책망을 가리킨다. 이 일로 헤로디아는 세례요한을 미워하고 죽이고자 하였다.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막 6:19-20).” 이는 바알의 선지자를 죽인 일로 엘리야를 죽이고자 했던 이세벨의 경우와 유사하다.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왕상 19:1-2).” 역사는 이처럼 반복하고 사람들의 악은 나아지지 않는다. 헤롯과 헤로디아는 삼촌과 조카(헤로디아는 헤롯대왕의 또 다른 아들 아리스 토블루스의 딸이다) 사이로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것이다.
천국에 관한 여러 비유의 말씀들이 끝나고 예수님의 3차 갈릴리 사역에서 마주하게 되는 요한의 죽음은 하나의 기점이 된다. 마태복음에서 ‘메시야의 자기 계시’와 ‘제자 훈련’ 그리고 ‘핍박’이 시작되는 세 측면에서 고찰하게 한다. 앞으로 이 ‘핍박’은 구체화된다. 앞서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시고(13:53-58), 세례요한의 순교에 관한 소식이 들려온다(14:1-12). 날로 위기의 상황이 부각되어오는데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온갖 훼방에도 하나님 나라는 계속 증거 되고 확장되어간다. 핍박이 더해질수록 천국 복음은 더욱 더 강화된다. 이는 마치 풍랑이 일어 제자들이 탄 배가 더욱 빠르게 물을 가르며 나아간 것과 같다. 풍랑은 그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걸음으로 평정된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24-27).”
곧 우리의 고난이 우리로 주를 먼저 만나게 한다. 이때도 주께서 우리에게 오신다. 더러는 그 예상할 수 없는 상황으로 ‘유령이라!’ 하고 무서워할 때도 있지만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때마다 주가 먼저 오시고, 주가 먼저 안심하라 하신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배가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 있을 바다 위에서이다. 곧 ‘바다 한 가운데’를 의미하는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요 6:17-18).” 삶에 있어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오시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는 저마다의 어려움으로 풍랑을 헤쳐 간다. 인생은 더러 망망대해(茫茫大海) 같다. 누구는 느닷없는 우울증으로 시달리며 애써 수고하여 얻은 박사학위와 교수로서의 생활이 정지되었다. 누구는 잘 나가던 회사에서 그만두고, 누구는 수년을 공부하며 도전하였던 시험에서 번번이 낙방하였다. 누구의 갑작스런 죽음이나 찾아온 병마로 힘에 겨울 때도 있다. 이렇듯 어둡고 예수는 계시지 않을 때 우리는 점점 더 인생의 풍랑에 시달린다. 곧 ‘바람이 거슬리므로’ 삶이 순탄할 줄 알았는데 어렵게 됐다. 바람은 생의 덧없음을 나타내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기를 동풍으로 함 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렘 18:17).”
곧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시 78:39).
바람은 우리들로 흩어지게 하는 재난이다. “하늘의 사방에서부터 사방 바람을 엘람에 오게 하여 그들을 사방으로 흩으리니 엘람에서 쫓겨난 자가 가지 않는 나라가 없으리라(렘 49:36).” 또는 우리를 미혹하는 교훈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곧 어려운 일에서 벗어나려 저마다의 노력을 할 때, ‘용한 진리’를 찾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누구는 그렇듯 죽기 살기로 선교에 목숨 건다. 누구는 제 몸을 불사르게 내주듯 헌신한다. 누구는 은사 체험을 강조하며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에 현혹된다.
오늘도 바람에 떠밀려 가는 배는 마귀가 가져다주는 시험으로 시달린다. 세상 권력에 대한 미련이, 삶에 대한 지나친 애착이, 자신의 출세와 성공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우리 영혼을 향해 불어 오는 성령을 거스른다. 그때에 필연적인 것은 ‘고난을 당하더라.’ 이는 시금석으로 시험하는 것과 같다. 여기 제자들이 풍랑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급격한 위기에 봉착한 것 같이 우리도 신앙으로 산다지만 그렇듯 괴로울 때가 있다. 이때, ‘밤 사경에’ 곧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에, 가장 끔찍하게 피로하고 졸리고 곤할 때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셨다. 세찬 바람과 거친 물결과 지구의 중력을 모두 파기하시며 예수께서 찾아오신다. 우리의 상식과 어떤 판단을 초월하고 예수께서 찾아오신다. 이를 직접 그 생의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은 안다.
나는 그때 돌이켜 신대원을 갔고 울면서도 학업을 끝까지 마치고, 여러 번 낙방하면서도 목사가 되었다. 나로서는 점점 더 물러설 자리가 없을 때 오히려 예수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누구는 그렇게 해서 죽을 것처럼 힘에 겨운 육신의 연약함으로도 기독교 대안학교를 시작했다. 누구는 아이의 악의적인 고소로 시달리다 억울하지만 수천만 원의 합의금으로, 법적으로 그렇다는 집행유해 선고를 받고도 붕괴된 가정들을 세우고자 부모 상담을 시작하려 한다. 그야말로 제 한 몸 건사하며 살기조차 어려운 처지에도 목회를 쉬지 않는 내 곁의 사역자들로 나는 놀란다. 더러는 무모하여 베드로의 도발 같이 여겨진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28).”
어떻게 그런 지경에 저런 시도를 할까 싶을 때, 예수님은 이를 허락하신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29-30).” 누구도 그 삶이, 목회가 수월하거나 순탄할 리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31-32).” 예수가 계심으로 우린 더러 무모하고, 꾸중을 듣고, 물에 빠져들기도 하다, 예수가 계시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를 알고 믿는다. 이때에 저절로 나오는 감탄은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33).” 즉 누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나의 경우 더는 물러설 곳이 없을 때 비로소 이런 마음으로 고백이 나왔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지만 목사 고시에서 두 번 떨어졌는데, 모든 과목은 통과하고 논술에서 한 번, 심리검사에서 한 번…. 논술은 그야말로 우습게 여겼던 과목이다. 거의 대부분을 아이들 논술을 가르치며 살던 사람이라, 중간에 대학을 편입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특히 편입논술은 자리도 몇 개 없고 경쟁도 높아서 그야말로 바늘구멍이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우리 글방에서는 척척 붙어서 한동안 다른 수업보다 고가의 수강료로 정평이 나 있던 터였다. 그러니 다른 과목은 다 붙고 어쩌면 보란 듯 논술에서 한 번, 다음 해에는 인성검사에서 한 번 떨어졌으니 것도 희한한 일이다. 다음 번 심리검사에서도 떨어져야 할 거였다. 면접교수이며 목사님은 나더러 굳이 이 길을 왜 하려하는가? 하고 물을 정도였다.
그러니 오늘 베드로의 심정이랄까?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28).” 호기롭게 될 줄 알았다. 앞에 주님도 계셨다. 그의 믿음이 대단한 줄 알았다. 그러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30).” 내 꼴이 딱 그랬다. 우린 저마다 자신의 믿음으로 보기 좋게 걸려 넘어지거나, 그렇게 ‘따귀 맞은 영혼으로’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다. 베드로의 오늘이 훗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하는 고백으로까지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아니었을까?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실 때의 이 놀라운 감격을 아는 사람은 안다! 안심하라 하심은 ‘담대하라’, ‘용기를 내라’ 하는 뜻이다. ‘두려워 말라.’ 하심이다. 그리고 덧붙여 ‘나는 나다.’ 하시는 것이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오늘 우리가 당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은 안심하라, 하시며 ‘나는 나다.’ 하시며 즉시로 손을 내미신다. 하여,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2-3).
사는 동안에 세상을 보고, 풍랑에 설 때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을 보면,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4-9).
다들 그렇듯 잘만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어서 홀로 지치고 괴로울 때,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6-17).
하여 나는 오늘도 기를 쓰고 성소로 나온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1-25).
오늘도 주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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