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현. 2026. 6. 17. 05:42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5-28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 74:16-17

 

 

모든 게 다 주의 것이다. 낮도 밤도,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이를 마련하시고 경계를 두심이 섭리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필연이다. 우연 같으나 모든 다 주가 정하신 것이다. 이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그러므로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33).” 하심이 그러하다. 이를 따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우리는 어떠하든지 주로 만족하고 충만한 것으로 주의 영광이 된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

 

하여,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9-10).”

 

이를 인정하고 주님 한 분만으로 가장 만족하고 충만해 하는 것이 주를 찬송하는 일이고, 이것으로 주의 영광이 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와 같은 말씀으로 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순응하고 따른다. 수술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할지 몰라 병원으로 갔을 때 의사는 냉정하게 그냥 두고 살라고 했다. 어떻게 나을 수 있는 게 아님으로 힘들면 진통제로 다스리다 그때 가서 수술해도 된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들으면 좌절인데 나는 그래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내게 두신 몸이라, 잘 다스리며 사는 게 일이다. 아픈 것도 일이라고, 나는 늘 그렇게 나를 다독인다. 아이는 자신의 형이 자신과 성이 다르다는 것에 새삼 충격을 받았다. 중학생이 되니까 새삼 자신의 형편과 사정이 남과 다른 것에 놀라웠다. 이를 듣고 아내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줄 수 없어서 속상했다며 토로하였다. 우리는 위로하고 위로 받고 싶어 하나 인정하는 데서 새로운 길도 열린다. 곧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 모든 일을 작정하셨다. 우리가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바로 아는 일이다. 이에,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시 115:3, 135:6).

 

하여 오늘을 살면서 사는 동안의 일들을 받아들임은 주를 의뢰하기 때문이다. 이를 하나님의 섭리라 하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의 섭리(攝理)란 말 그대로 다스림의 이치다. 세상 모든 게 다 그의 편만하신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어찌하여 이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해도 ‘맡은 자가 구할 것은 충성이다.’ 곧 오늘 이 몸도, 처지도, 환경도, 여건도 다 우리에게 맡긴 것이다.

 

그와 같은 시련이 마귀가 시험을 받게 하는 것 같아도 그 일의 주도권이 그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여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신 32:39).” 하심으로 우린 주를 인정한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 그 기준이 무엇인지, 어떤 이유로 그렇듯 서로 다르게 행하시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오늘 여기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에서 놀라운 진리를 배우게 된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와서 소리 질렀다. 예수께서 그 지경을 지나고 계실 때이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소리를 듣고도 예수께서는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신다. 그렇게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였다.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이를 예수께서 못 들으셨을 리 없다. 예수님은 대답하여,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며 야박하게 그냥 가려 하신다. 그러나 여자가 와서 아예 예수의 앞에 절하며 말하였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그러자 예수님은 의도적이고 노골적으로 말씀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는 참으로 야박하고 너무하다. 앞서 전하시던 말씀과도 맞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그리 말씀하심으로 여자의 다음을 보시고자 한 것이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는 참으로 자존심 상하고 수치스러운 몰골이다. 단지 그 처지가 절박하여서 나온 게 아니다. 여자는 예수를 알고 있었다. 앞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예수를 찾았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것으로 ‘주’란 말을 ‘다윗의 자손’이란 말과 결합시킨 것을 보면 ‘주’를 그 이상의 의미로, 즉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로 칭한 것이다.

 

예수의 사역을 보고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12:23).” 저마다 메시야적 사역을 보았다. 이를 여자도 알았고, 앎으로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15:27).” 하고 오늘 그 앞에 절하는 것이다. 곧 여자는 충분히 알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메시야적 소망(所望)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다윗의 약속된 후손으로 오신 분이 예수이신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메시야로 예수를 인정하는 표현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지 못하고 거부하였으나 사마리아 여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들로 경멸하고, 멸시함을 받는 처지에도 알았다. 육체적인 장애나 이방인들도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알고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27-28)." 하심이 그래서 더 귀한 것이다. ‘옳소이다마는’ 하고 주의 말씀을인정하면서 반론한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곧 가나안 여자는 하나님의 질서에 의해 유대인들에 비해 이방인인 자신들이 선택되지 못한 족속이요, 이런 권리를 갖지 못한 자, 즉 개들인 것을 인정했다. 이처럼 자신을 개로서 인정하는 것은 성경에서는 가장 겸손한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사람들은 자신을 극도로 비하시켜 표현할 때 ‘개 같다’는 표현을 쓴다. 욕이면서 자기비하의 표현이다. 심지어는 ‘죽은 개’ 또는 ‘개 같은’이란 말을 성경에서도 사용하였다. 다윗이 사울 앞에서,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삼하 9:8).”

 

그런 가운데 여자는 한 술 더 떠서,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나이다.’ 하고 주의 긍휼하심을 원하였다. 당시 지역에서 식사하는 주인 곁에 부스러기를 얻어먹기 위해 개들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특히 그 지역에서 식사법을 보면 주로 손으로 찢어 먹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히 음식 부스러기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나안 여인은 사실 자신이 개처럼 취급을 받는 이방인으로 메시야가 베푸시는 구원과 은혜의 식탁에 참예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최소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을 입을 수 있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이에 바울은 훗날에 설교하였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롬 3:29).”

 

곧 우리가 차별하고 섣불리 죄인으로 정죄하는 자들에 대하여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마치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을 어떤 특권인양 스스로를 높여서는 안 될 일이다. 오늘 주님은 이를 만천하에 드러내시려고 일부러 의도적이셨다. 이에 예수께서 저를 부르신다. “여자야!” 이는 헬라어 성경에 ‘여자야’라는 말 앞에 감탄사 ‘오’가 붙는다. 호격과 드물게 사용되는 ‘오’는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는 감탄사다. 예수의 놀람과 감탄이 그대로 표현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오, 여자여!’ 하고 말이다.

 

이어서 저에게 이르심은 “네 믿음이 크도다!” 하고 저를 인정하심이었다. 여기서 믿음이란 그녀의 신뢰, 확신, 겸손과 인내까지 모두 포함한 말이다.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께 칭찬을 받은 두 번째 이방인이었다. 첫 번째로는 군대장교로 백부장에게,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8:10).” 이처럼 이방인 백부장의 이야기와 본문의 이야기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두 경우 모두 이방인에게(백 부장의 하인, 가나안 여자의 딸) 있어 예수의 병 고침의 능력이 베풀어졌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두 경우 모두 이방인 자신의 큰 믿음이 예수께 칭찬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중에 특히 당시의 종교지도자라는 자들은 예수를 배척하고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만한 것이 없으며, 오늘 여기 이방 여인의 믿음보다 큰 이가 없던 것이다. 하여 “네 믿음이 크도다.” 하고 주가 인정하는 사례들이다. 또한 세 번째로는 이 두 경우 모두 예수의 병 치료는 병자를 현장에서 만나지 않은 채 멀리서도, 말씀으로도 얼마든지 고치실 수 있다는 순수한 확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대적으로 떠오르는 사건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께서 가까이 계시지 않았음으로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다고 여기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였고,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요 11:21, 32).”

 

그렇듯 이방인들이어서 더욱 순수했던 것일까? 거리가 멀어도 말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이방인 백부장과 가나안 여자는 유대인들이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배척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이방인들로 그를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약적 개념이 신약적 개념으로 옮기워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유대인으로 국한 되었으나 신약에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전 세계 사람 누구라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사실을 새롭게 정립시킨다. 후에 제자들은 이를 받아들였고 하여 아시아로 이방 전 세계로 복음을 들고 달려가게 되었다.

 

오늘 주님은 여자의 믿음에 감탄하시고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심으로 백부장과 같이 말씀으로 이 일을 이루셨다. 여자의 첫 번째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시다, 두 번째 말에 냉정한 말로 그녀를 무시하셨고, 세 번째 말에 칭찬과 함께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신 예수님의 의도적인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한다. 곧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 마음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이 놀라운 진리 앞에 새삼 놀라워한다. 하고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11).” 이 안에 참 진리가 있다.

 

오늘 본문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조차 부정한 메시야를 참 메시야로 인식한 그녀의 지혜와 믿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셨다. 이로써 선민이라 자부하던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여 회개를 촉구하신다. 유대인들이 거부한 구원의 축복은 결국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가서 이방인들도 그와 같이 축복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방인 여자의 소원을 외면하셨고, 이내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고 인정하셨다. 이는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다. 전적으로 예수의 판단에 의해 결정된 일이다. 여기서 ‘소원대로’ 이루어지라 하심은 원하는 만큼, 인내로 극복한 합당한 보상으로 예수님의 강한 의지가 이와 같은 말씀에 내포되어 있다.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앞서 유대의 전통을 가지고 논쟁하는 장면이 나왔다(1-9).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2).” 이런 일로 갑론을박할 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8).” 하심으로 저들의 본심을 알고 계셨다. 하심으로 저들에 대해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14).” 하고 그 결과를 짐짓 우려하고 계셨다. 이어서 가나안 이방 여자와의 대화와 그 믿음을 칭찬하신 후에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36).” 저들 민족을 먹이시었다.

 

더러는,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시 74:9).

 

현실이 암담하고 어려울 때,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12).

 

하고 주를 인정하는 믿음으로 서야 한다. 이는,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16-17).

 

그러므로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21-22).

 

우리는 주를 신뢰하며 구한다.

 

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

(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