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현. 2026. 6. 18. 05:40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 16:28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 75:7

 

 

앞서 한 번도 스스로를 공개적으로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신 적이 없는데, 오늘 본문은 비로소 제자들에게 당신이 바로 구약에 약속된 다윗 왕권의 계승자이심을 밝힌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이는 마태복음에서 첫 구절로 언급한 바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

 

곧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16:21).” 하여 여자의 후손으로서 온 그 메시야이심을 밝히 드러내셨다. 먼저는 메시야로서의 신분에 대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냈다. 또한 메시야로서의 사역의 내용으로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리셨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사역 초기부터 밝히지 않고 공생애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비로소 드러내셨다는 것과 메시야가 왕이나 정복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것이라 기대했던 통념과 달리 ‘고난의 종’으로 오셨다는 역설적인 내용이 우리를 주목하게 한다.

 

먼저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갈등하는 제자들에 대해 경계하셨다. 이는 당시 세상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한지를 암시한다(1-12). 이후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다루고(13-20), 앞으로 있을 수난에 관해 알리신다(21-28).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인 것을 공개하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수난당해야 할 것과 수난을 당하심으로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완수하는 것임을 강하게 알게 하신다. 이를 인간적으로 인정하기 싫은 마음으로 베드로가 나서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예수님은 즉시로 저를 꾸짖으시며 이 일이 사람의 일이 아닌 것을 알리신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23).”

 

바로 직전에 그처럼 아름다운 신앙 고백을 한 것과 달리,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이를 알고 고백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이 놀라운 축복과 저주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우리 사람은 먼저 눈에 보이는 표적을 먼저 구하고 당장의 먹는 문제로 바란다(1-12). 곧 예수를 적대하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표적을 구하였다.

 

제자들은 선생의 가슴속에 있는 원래의 뜻을 아직 헤아리지 못한 채 이 문제를 떡의 차원으로 이해했다. 즉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인 차원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셨던 것을 저들은 바로 알지 못했다. 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6-8).” 하시는 소동에서 알 수 있다. 즉 서로 다른 관점의 차이가 이처럼 영적인 이해와 해석을 따르지 못한다. 오늘 우리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 일은 종교 지도자들과의 갈등에 대해 경계하심을 굳이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계시하는 데 그 앞에 말씀하심도 다 이유가 있다.

 

즉 당시 지도자들은 표적을 구하여(12:38-45) 이런저런 이유로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님은 갈등을 빚어왔다. 저들이 표적을 구하는 방법으로 예수를 시험한 것도 여러 번이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13:54-55).” 곧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의 갈등이 이 부분을 고비로 파국으로 치달았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57-58).”

 

이렇듯 저들과의 갈등은 고조되어 저들은 예수를 살해의 저의를 노출하기도 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21:12-13).” 이러한 행보에 저들은 심히 분하여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23).” 그렇게 저들은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22:15).” 그럴 때면 예수님도 저들을 강하게 나무라셨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23:33).” 하시며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35).”

 

그러자 저들에게 예수는 골칫덩이가 됐다.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26:3-4).” 그리하여 오늘 본문의 이 사건, 누룩에 대한 경고는 앞으로 있을 예수의 수난(受難)을 예고하는 셈이다. 또한 가까이에서는 온통 ‘떡을 구하는 자들’이었다. 떡을 매개로 한 예수와 제자들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제자들의 관심이 아직까지도 현세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사건도 외면적으로는 종교 지도자들의 악영향을 누룩에 빗대어 교훈하신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곧 제자들의 관심도 영적 차원의 문제보다 육적 차원의 문제에 쏠려 있었다.

 

그런 가운데 사람들의 이해와 제자의 고백은 그래도 차원이 달랐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하고 대답하였다(13, 14). 그러자 예수님이 진짜 알고 싶으셨던,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셨고 이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고 답하였다(15, 16). 이는 매우 놀랍고 귀한 축복의 대답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곧 오늘 우리가 나의 구주를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인정함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곧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마치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어 중간 결산 같다. 이제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수난 사건을 위해 제자들을 준비시켜야 하는데, 그에 앞서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통해 예수님은 비로소 당신의 존재를 정확히 알게 하시게 되는 것이다(21-28). 곧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21).” 하시며 자신의 길을 알리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4).” 제자들로 그 길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신다. 곧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

 

이는 우리가 예수를 따라 산다는 일은 십자가의 수난과 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죽고자함으로 사는 길이었다.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가르치던 예수께서 바로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저들로 인정하게 하신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은 모든 인류에 대해 그 직분을 알게 하고, 그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저들로 알게 하려 하심이었다. 곧 이 하늘의 증거는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3:17).” 우리가 앎으로 고백하고, 고백함으로 증명하는 삶이 따라야 할 것이다.

 

하여,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먼저는 자기 부정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주의 길을 갈 수 없다. 또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 주를 위해 죽고자 할 때 비로소 사는 길이었다. 문득 생각이 드는 것은 내 곁에 이런 자들이 몇몇 있었다. 마치 앞서서 저들은 내게 두 길을 보여주었던 예표 같다. 학창시절 교회 전도사로 아직 신학을 공부하던 목사 지망생들로 한 분은 자신을 전부를 걸었다. 좋은 학벌에 괜찮은 사역지를 마다하고 강도사 시험 후 나환자촌 교회로 들어가서 일생을 다하고 있는 이가 있다.

 

또 한 사람은 저 역시 목사의 아들로 일찍이 부르심에 응하였으나 제 살 궁리로 늘 고민이 많았다. 결국 저는 경험을 쌓는다는 명분으로 어디 레스토랑에서 서빙도 하고, 주중에는 택시 운전도 하다 결국은 사역자로서의 길을 포기하였다. 나는 당시 이 사람을 더 따랐고 많은 부분에서 공감을 했던 것 같다. 서로가 자주 만났고, 내가 대학을 가고 연애를 하는 동안에도 서로는 교회와 상관없이 친밀하게 지냈던 것 같다. 이후 저는 결국 사역을 접었는지, 소식을 알지 못하지만 그때 저의 방황은 스스로 살고자 하는 데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물론 나는 저 둘과 다 어울렸고, 그때의 기억으로 오늘 이 말씀 앞에 설 때 그 의미가 더욱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 이를 알기까지 나 역시 참으로 긴 시간을 돌아서 온 것 같다.

 

이내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라, 하나님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심으로 꺾으셨고 굴복시키셨다. 이후 죽고자 할 때 살게 하셨다. 주께 맡김으로 알아서 하시라, 할 때 정말이지 주께서 다 알아서 하셨다. 나는 종종 나의 지나온 시간들이 생동감 넘치게 성경의 현실인 것 같다. 말씀이 곧 나의 삶의 기록처럼 여겨진다. 어느 순간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고백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을 때에 알았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스스로 떡을 구하지 않는 삶이다. 오히려 내 영혼에 누룩을 주의하게 된다. 신대원을 다니면서 미친 듯이 신앙서적과 성경을 읽었고 들었다. 그때 알게 된 믿음의 영웅들이 오늘도 내 영혼에 영향을 끼친다. 오늘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단지 저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나는 베드로의 입장에서, 그는 역사상 최초로 예수를 처음으로 ‘당신이 메시야’이시라 고백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러한 고백에 따른 축복은 특별하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 하심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저의 이름으로 성전을 짓고 저로 초대 교황으로 삼은 것은 옥에 티라 하겠다. 설마 베드로의 뜻이었겠나만 우리 사람이 이처럼 몽매하다. 아울러 오늘에 저들의 권위가 참으로 어처구니없어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19).” 하심을 어떤 특권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렇듯 바로 알지 못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20).” 오늘도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다르지 않다.

 

마치 믿음의 권세를 이 땅의 것으로 착각하는 위인들이 허다하다. 스스로가 얻은 공로나 보상으로 여기며 그것을 특권인양 누리거나 휘두르는 사람들 말이다. 철통같은 경호를 받으며 다니는 목사들이나 무리지어 목소리를 높이면서 온갖 이권이나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그러하다. 왜 스스로들 자기들의 신념에 교회를 팔고 예수의 이름을 갈취하는지 모르겠다. 저들로 인해 사람들의 인식은 그 어느 때보다 교회에 대해 부정적이다. 말세의 때라 더더욱 그렇겠지만 ‘베드로의 고백’이 내용에 있지 않고 인간 베드로에게 더 집중되면서 로마 가톨릭의 교황권 교리가 가장 큰 폐단이고, 오늘 날 개신교도들의 종교 활동이 정치 활동에 사로잡힌 이유와 흡사하다. 오늘 이 말씀(17-19)을 근거로 예수의 축복을 오해하여 교황권을 베드로로 가상하고 그를 승계한 자가 교황으로 이어져 오는 일은 매우 불행한 현실이다.

 

17절에 명시하듯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은 바, 그의 신앙 고백으로 예수께서 메시야가 되신 게 아니며, 베드로가 인간적 지혜로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구속사의 위대한 전환점에서 제자들의 무지와 인본주의적 생각을 책망하셨듯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그의 인격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새삼 깊이 되새기게 된다. 곧 오늘 나로 이 사역을 감당하게 하심도 같다. 이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4).” 하심도,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 하심도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하여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27).” 그리하여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28).” 그렇듯 자신을 죽임으로 자신이 주로 인하여 사는 사람들이다. 더 나은 사역지를 찾아갈 수 있으나 여전히 개척교회로 교회 안에서 살림하며 일생을 한 영혼으로 씨름하는 이나, 나환촌의 교회에서 일생을 마치며 그 사명을 감당하는 이들로 나는 본을 삼는다. 오늘도 한 영혼으로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본다. 어제는 그렇듯 누구와 성경공부를 하다 저의 어쩔 수 없는 갈등으로 한참으로 씨름하며 말씀으로 가르쳤던 일도 그 때문이다. 곧 날마다 이 일은일어나고 있다.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여 오늘도 주 앞에 구하기를,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시 75:1-2).

 

고로,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6-7).

 

하여,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