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하현. 2026. 6. 19. 05:36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20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예수님의 사역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고난 받는 메시야로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사건이라면 오늘 본문의 변화산의 모습이겠다. 변화산은 장차 수난에 대한 예고가 있고,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16:21)” 다음 또 2차 수난을 말씀하시기 전에 일어났다.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궁극적으로 승리로 알게 하려 하신다. 그러나 이에 따른 수난을 듣고 불안에 휩싸였던 제자들에게 ‘담대한 용기와 위로’를 주고자 주님은 저들을 이끌고 변화산으로 오르셨다. 변화산 사건으로 이어지는 순서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 및 부활로 이어지는 27-28장의 순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구속사적 의미라,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의 임박한 죽음에 관해 이야기했다는 점을 더욱 확실히 한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눅 9:30-31).”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의도적으로 제자 몇에게 보이셨다. 당시 제자들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불신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마 17:17).” 이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졸고 있던 제자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26:43).”

 

곧 우리의 연약함에 대하여 그리고 영적으로 아둔할 때의 무감각한 상태에 대하여 이를 인정하게 된다. 우린 현실의 문제를 바로 파악하지 못한다. 영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도 육적으로나 이해하려 한다. 심지어 곧 십자가의 수난이 있을 터이나 저들은 당장의 피곤함으로 졸고 있을 뿐 기도의 중심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불안에 떠는 제자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 내용이다(1-13). 그리고 다시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맞추어 조명하고 있다(22-23). 그런 가운데 당시 제자들은 물론, 그리스도의 제자 된 모든 성도들이 실제 부딪쳐오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 명심해야할 교훈들이 그 사이마다 이어져 있다(14-21, 24-27).

 

특히 오늘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다섯 가지의 사건 중에 하나인 변화산상에서의 일이다. 먼저 예수님의 다섯 가지 영적인 사건으로는 성육신하심으로 사람이 되어 태어나신 것, 변모하여 그 모습이 황홀한 상태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신 사건, 심판자이신 이가 몸소 수난을 겪으시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사건, 죽은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보이시는 사건, 그리고 다시 오리라 약속하시며 승천하시는 사건이다. 그 가운데 이 변화산상애서의 사건은 공관복음 모두에 수록되어 있다(막 9:2-8, 눅 9:28-36). 이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후 엿새가 지난날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모세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를 데리고 시내산에 오른 사실과 유사하다(출 24:1). 또한 예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는 모습은,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7:2).” 시내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이 꺼풀에 비친 광채를 연상시킨 것과 같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출 34:29).” 그러나 모세와 달리 예수의 얼굴의 광채는 반사된 영광의 빛이 아니라 예수 자신으로부터 발산되는 빛이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이시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자주 강조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를 바울은 보다 구체적으로 설교하여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곧 오늘 여기 변화산상에서의 사건은 발생 순서가 뚜렸다. 먼저는 예수의 변모하심이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2).” 이는 곧 있을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의 길에 대한 가르침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당혹과 불안을 안겨주었다. 이에 베드로가 나서서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16:22).” 이에 대해 예수님도 격하게 반응하시며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23).”

 

그런 와중에 예수의 변화된 모습은 제자들의 불안을 해소해 줄만한 놀라운 체험이었다. 물론 당시로서 세 제자들이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그 영광스런 광경의 참된 의의를 깨달을 수 없었다 해도 말이다. 그것은 재림의 순간에 확연히 펼쳐질 천상의 영광이요, 부활의 영광으로 훗날 베드로와 초대 교회에 큰 힘으로 작용한 중대한 체험이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

 

곧 우리가 주의 길을 가는 동안 이와 같은 경험은 다소 황홀경에 이르게 할 정도이다. 눈물로 주를 찬송하며 기도할 때나 주 앞에 회개하고 엎드렸을 때 알 수 없는 그 마음의 뜨거운 확신과 기쁨은 어찌 말로다 표현하기가 힘들다. 청소년 시절 처음 그와 같은 무아지경을 경험한 것은 세례 받을 때였다. 그때 섬기던 교회는 나환자촌에 있는 시골의 예배당이었고, 당시 내 또래의 아이들이 예닐곱 명이었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례를 준비하는 동안 저녁마다 교회에 모였고, 서로가 설교를 받아 적은 것을 들고 이를 돌아가며 말하고 기도하다 울었다. 고작 그때 우리 나이가 열네 살이었나?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그처럼 모여 서로가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다 울기도 하며 뜨거운 마음을 느꼈는지… 세례 당일 우리 모두는 너무 울며 자신들의 죄를 고하고 세례를 받는 것에 감격하여 서로를 당혹스럽게도 하였다. 수련회 때나 어느 기도원에서 산책하다, 기도하다, 문득 그러한 경험으로 난감한 경험도 여러 번이다.

 

그 외에 어떤 상황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의 도우심이나 극적인 구조와 모면으로 안도하면서 흘리던 감격의 눈물도 그와 같은 게 아닐까? 말씀을 묵상하다, 누구의 이야기를 듣거나 말하다, 우리가 같이 기도하다,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이란 이처럼 예고 없이 문득 우리 안에 충만하여 눈물로나 감격을 표현할 수 있을 뿐 달리 말로는 어찌 설명이 어려운 때가 있다. 늘 자주 언급하지만 나의 유년과 청소년 성장시절, 어떤 가난과 지독한 외로움 가운데, 느닷없는 신학부 편입이나 다시 그로부터 십 년이 흘러 신대원으로 끌려왔을 때의 당혹스러움 같은… 현실적으로나 육적으로는 극한 어려움의 시절이었는데, 알 수 없는 어떤 의지가 강하게 나를 붙드셨던 걸 기억한다. 가령 신대원을 시작하면서 공황이 왔을 때 두려움으로 주체할 수 없는 몸을 이끌고 정신과로 갔다. 대기인원이 많아 순서를 기다릴 때, 나는 지나치게 떨고 있었고 그와 같은 두려움을 호소하자 진료 전에 안정제를 하나 주었을 때 이를 떨리던 손으로 받아 삼켰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난감하였고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여기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에 함께 있었다.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3).” 저들은 각각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스라엘에 있어 크게 존경과 신망을 받는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본문의 초점은 그들의 위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를 증거 하는 그들의 역할에 맞추어져 있다. 나는 이들을 생각하면 항상 그때마다 나를 도운 사람들을 생각한다. 세례 받을 때 여전도사님은 서울에 있던 이라, 토요일에만 내려와서 사택에서 하루를 자고 주일을 지키고 다시 서울로 갔다. 늘 우리와 같이 성경공부를 한다거나 기도회를 이끌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마다 위로가 용기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신학학부를 편입하게 된 계기로 어떤 이의 끈질긴 권유와 심지어 큰 금액의 학비나 생활비 지원의 손길은 기이하다. 늘 생각해도 우리가 서로 그럴 사이가 아니다. 만남도 어느 통신 모임에서 동호회 회원으로 어쩌다 내 글을 읽고 감동하여 그렇다는데 그것도 정도가 지나쳐서 수차례 거절하는데도 저는 결국 나를 설득하였고, 등록금과 일체 생활비까지 후원하며 3학년으로 편입하여 학부 4학기, 신학대학원 1학기 등록금을 그때마다 기꺼이 보냈었다. 물론 내가 더는 내 길이 아닌 듯하다며 거절하고 학기 중에 그만두면서 손길이 끊겼지만. 그때 또 부친이 개척한 교회가 부도로 넘어가고 덩달아 그 부채에 갇혔다가 풀려났을 때 월세도 얻기 어려운 돈으로 우리 네 식구가 나앉게 됐을 때 뜻하지 않은 손길이 당시 2천5백의 보증금을 선뜻 내주며 도왔던 일도 기이하다. 저들 부부 역시 자주 어울리던 사이이기는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도울 정도로 우리 사이가 각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듯 내 생애 곳곳마다 나의 변화산상은 뚜렷하였고, 그때마다 예수와 함께 나에게도 모세와 엘리야 같은 이들이 존재하였다. 더 어릴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만큼 주의 변화산상에서 위로와 격려의 손길로 살아가는 이가 또 있을까? 신기하지만 그때마다 같이하였던 이들이 모두가 주의 길을 간다. 초등학교 5-6학년 때 옥상 무허가건물에서 생활하던 개척교회나 후에 어느 예배당 마당에서 자야 했던 가난한 시절에 그 교횔 함께 하였던 형들이 모두 목사가 되고 신학교 교수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다. 나와 함께 세례를 받았던 예닐곱 명의 아이들 가운데 목사가 둘, 선교사가 하나, 사모가 하나 나왔다. 신기하지? 저마다 어디서 무얼하고 사는지도 모를 이들도 어쩌다 소식을 들으면 모두 다 여전히 내겐 모세와 엘리야 같은 든든한 인물들이다.

 

하여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산 위에서 계속 거하고자 하였다. 그 심정이 어떤 것인지 알겠다. 나 역시 그 시절, 그때는 미처 몰랐었던 일들까지… 언젠가 우리가 주의 나라에서 만났을 때 지금과 같이 이 감격과 영광으로 서로 손잡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될 것을 믿는다. 그렇다고 현실이 매번 변화산상 같이 황홀한 지경에 머물 수는 없다. 거기 머물고 세상을 등지고 살고 싶을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끌고 산을 내려가게 하셨다. 현실은 냉혹하고 추하다. 그 황홀했던 순간은 잠깐이고 당면하는 현실은 귀신 들린 이의 하소연으로 왁자지껄하였다.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14-15).”

 

우리 앞에 놓인 삶이란 이처럼 지긋지긋하고 요란스럽다. 하여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16-17).” 결국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예수 앞에 나가야 한다.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18).” 우리는 이와 같은 현실에 산다. 당면하는 현실에서 번번이 실패한다. 좌절하기 일쑤고 힘에 겨워 허덕거린다. 이는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20).” 어찌 우린 안 될까? 왜 나는 늘 같은 문제로 실망하고 낙심하고 다시 또 주 앞에 끌려오듯 나올까?

 

더러 우리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대단하게 여기며 마치 뭐나 있는 것 같이 굴 때가 많지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이를 부정하고 싶겠지만 우린 금방 또 넘어지고 같은 죄악으로 신음한다. 이에 주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아, 내 믿음의 정도가 고작 겨자씨 한 알만도 못한 것을 마치 무슨 천하보다 크고 강한 줄 알고 시건방을 떨며 살기 일쑤다 보니,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이와 같은 기적 같은 일이, 실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리 곁에 일어났다. 주가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곧 이리저리 옮겨지고 못할 게 없는 존재가 되었다.

 

 

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

(시 76:5-6).

 

세상 둘도 없을 것 같은 권력으로 사는 것 같으나, 잠시라.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셀라)

(7-9).

 

그러므로 우리 안의 어떤 서러움, 앙금, 분노와 슬픔 따위도,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10).

 

그리하여,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