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19-20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시 77:19-20
예수의 행적과 교훈을 기록하고 있다. 오늘은 천국 시민으로 명심해야 할 핵심을 가르친다. 당시 제자들의 영적, 심리적 상태을 잘 보여준다. 그들의 주요 관심은 정치적 메시야 왕국이었다. 그들은 메시야 왕국에서 영달을 누리며 권세를 떨쳐보고 싶어 했다. 그런 가운데 본문은 천국의 제자 된 자의 삶을 가르치며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엄중하고 단호한 경고의 내용을 마태는 담고 있다. 이에 권징(15-20)과 용서(21-35)의 내용으로 자연스럽게 양분하였다. 그렇게 징계와 용서의 미묘한 관계를 깨닫게 한다.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여야 한다는 포용의 원리를 가르치고(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공동체 내부에 죄악 된 요소가 있을 때는 단호한 징계 조치가 불가피하다는 단절의 원리도 가르친다(15-20).
먼저는 제자들의 관심사에 대해, 예수님의 사역이 막바지로 갈수록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자발적으로 나아가는 희생과 겸비의 모습을 보이는데, 제자들은 이러한 가르침에 부응하지 못하고 ‘누가 더 크냐?’ 하는 문제로 씨름하고 있다. 앞서 예수를 따르는 길은 곧 십자가의 길이라는 교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제자들은 남보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히 제자들 중 세 사람은 예수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17:1).” 베드로는 때로 책망을 받기도 했지만 여전히 제자들 중에 두각을 나타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14:28-29).” 그의 성격이기도 하겠지만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15:15).” 어떤 점에서 순수한 까닭이기도 하겠다. 하여 이 놀라운 고백도 가능하였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그렇게 그는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17:4).”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변화산을 경험했고 그때도 자신의 순수한 열정을 가감 없이 고하였다. 그렇게 해서 다른 제자보다 더 총애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생각은 베드로 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다를 게 없어서,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20:20-23).”
결국 이러한 사실이 다른 제자들의 질투를 불러 일으켜 본문에서도 이를 가지고 논쟁하며 시작한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18:1).” 그런 가운데 본문은 기독교 공동체 생활의 기본 원리에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5-17).” 물론 이 또한 세부적인 내용을 기계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권징의 신중한 방법을 원칙으로 설명하고 계신다.
함부로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지 말 것은 앞서 이미 경계하셨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7:1-2).” 우리가 평소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주님은 잘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3-4).” 남의 허물을 보고 자신의 죄를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되었다. 남을 비난하고 그의 약점을 들어 아니면 말고, 하는 식으로 공격하고 조롱하고 멸시하는 게 다 돈이 되는 세상이다. ‘빅 스피커’라 불리는 요즘 유명한 유튜버들의 행태가 도를 지나쳐서 저의 말 같잖은 말의 공격은 이를 지지하며 후원하는 자들의 머릿수와 비례하여 권력이 된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게 말이라 더욱 조심해야 할 공개발언에서 무작위로 쏟아내는 혀의 가벼운 놀림은 작은 날갯짓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엄청난 바람을 일으켜 여론이 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자신들의 지지세를 구축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소위 댓글부대라 하여 요즘은 말보다 빠른 손으로 이를 퍼 나르고 몇 마디 덧붙이는 글들이 폭력이 되어 살인까지 저지른다. 하여 예수님은 이를 아셨고, 이르시길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8-9).”
우리가 무심히 보고 놀리는 손가락질로 지옥과 천국이 오간다. 요즘은 그런 것까지 언론이라 자처하여 검증도 없고 편향된 것은 물론이고, 찔러나 보듯 한 사람의 사생활을 마구 휘젓는다. 그렇게 해서 누가 자살을 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데도 저들은 그 사이에 엄청난 돈과 권세를 가진다.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피할 정도이니, 그 기세가 등등하다. 이에 말씀은 우리의 허황되고 메마른 심령을 꿰뚫어 보셨다. 하여 ‘어린아이’로 교훈을 삼아 ‘천국 시민의 자격과 사명’에 관한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4).” 하여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10).” 결국은 천국 신민의 자격은 천국에서 큰 자로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데 주안점을 두게 하심으로,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는 자들에 대해 경고 하신다(5-10). 곧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6).” 이와 같은 경고에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가망이 없다.
날로 구호가 거칠어지고 서로를 증오하는 마음이 당장에 전쟁이라도 치를 기세라, 요즘의 거리에 대한 보도나 어떤 사건 사고에 대한 가십거리의 기사 하나도 두렵게 다가온다. 모 프로그램에서 누가 누구를 따돌림 했던 것 같은데, 어떤 의도라기보다 그러다보니 그리 된 것으로 배려의 문제로 넘겨도 될 것 같은데 몇 주째 같은 주제의 내용들이 끝도 없이 재생산되는 실정이다. 그만큼 사람들은 잇몸이 간지러운 강아지 같이 물고 뜯고 마구 흔들어대며 자신들이 하는 짓을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렇게 말을 보태고 뭐라 의견 하나를 더하는 게 폭력이 되고 또 다른 가십거리가 되어 확대 재생산되는 꼴이다.
하여 이어지는 양의 비유가 새롭게 읽힌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2-14).” 저마다의 실수나 잘못은 할 수 있을 텐데, 남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정죄함이 가히 살인적이다.
결국 천국 시민의 자격은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현실의 왕국이 아니다. ‘천국에서 누가 더 크냐?’ 하는 따위의 발상이 이미 자신의 염치를 잃은 것이고 자신의 애통함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과도 거리가 멀다. 분명히 예수님은 앞서서 천국 백성의 자격으로 여덟 가지 복을 제시하신 바 있다. 첫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5:3).” 곧 그 심령이 가난함은 하나님으로 채우고 또 채워도 가난을 면할 수 없는 이 땅의 삶으로, 둘째,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우린 우리의 우둔함으로 죄악 된 것을 슬퍼하고 애통해한다.
회심과 회개는 일치하여, 셋째,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 온유함은 남의 허물을 보고 자신을 돌아보아 더욱 더 주 앞에 겸비하는 자세이다. 넷째, 하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 더욱 더 주를 바라고 말씀으로 목마른 자로 주를 더욱 알고자 하는데, 그럼 그럴수록 자신이 받은 은혜와 긍휼하심을 앎으로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7).” 누가 어떠하다 해서 뭐라 함부로 정죄하거나 평가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자신이 저마다 더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여섯째, 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 마음의 청결은 곧 자신을 돌아보아 쉼 없이 회개하고 돌보아서 깨끗이 하는 것이다.
일곱째, 그러하여 저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 어떤 욕심도 변명도 애써 인정받고자 하는 일체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렇게 하여 여덟 번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0).” 설령 억울하고 힘든 일이 닥쳐온다 해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을 것은, 주가 나의 노여움으로 찬송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 남은 노여움을 주가 허락하지 않으심으로 주께 맡긴다. 하여,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이를 망각하는 영혼은 강퍅하여서 마치 굶주린 짐승 같이 때를 기다리며 먹잇감을 찾는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에 따른 제도적인 어떤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인권을 운운하여 촉법소년범을 내세우는 시절에 부모와 선생의 이상은 사라진지 오래다. 초등학교 교사인 친구는 이 일로 인해 점점 더 기계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처지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서로 거부하여 교감이 될 나이에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을 맡았다. 앞서 한 선생은 심한 우울증으로 휴직을 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이유는 어린 아이가 실수를 했고, 수업 중에 잠깐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씻기고, 여분의 체육복으로 갈아입혔을 뿐인데… 그 부모가 성적모멸감을 줬다느니, 아이들 앞에서 자기 자식의 명예를 실추시켜 자존감을 잃게 했다느니 하면서 그해 내내 진정서를 내고 고소를 하고 선생을 들들 볶은 모양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어릴 적 선생에게 막무가내로 맞고 지내던 시절이 오히려 낫다 싶다. 그땐 그래도 ‘스승의 은혜’란 게 있었다. 집에 와 부모에게 일러도 그때만 해도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았다. 요즘은 말도 안 되는 소리겠으나… 그런 가운데 한 집 건너 한 아이가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아내에게 오는 아이도 심한 조울과 심리의 난조를 보인다. 학교에서 여러 번 특수학교 권유를 들었다. 대체로 아이들은 산만하고 점점 더 자기중심적이다. 뜻대로 안 되면 상대를 아주 짓이긴다. 아이의 말에 어떤 미안함도 찔림도 없다. 온라인상의 전쟁 게임 같은 현실이다. 부모가 성경공부를 하고 신앙으로 키운다고 하는데도 한 집 건너 그 모양이라, 앞으로 소아정신과나 노인요양시설이 전망이 있다고들 한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5-17).” 자주 상담을 할 때면 들어주고 호응하고 저에게 공감할 때나 좋아하지, 행여 권면을 위해 문제를 조명하고 저를 객관화하려 하면 금세 우리의 관계는 무너진다. 급기야 자신이 원하는 답이 아닐 경우 졸지에 상담자로서 나는 내담자로서 저의 표적이 된다. 목사로 대하고 저이는 믿는 자로, 신앙 안에서 같이 기도하고 말씀으로 접근한다고 했는데도… 권고를 죄를 건드는 일이라, 열에 아홉은 공격적으로 방어하기 일쑤다. 무조건 자기편을 들어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 가끔 벽에 부딪쳐 급기여 연락도 없이 끊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
그래서도 주어진 이 사명이 귀하다. 내게 왜 안정제를 먹어야 하는 심약한 마음을 그대로 두시는지 알겠다. 나는 누구와 상담하다, 저의 사연에 내가 헉, 하고 힘에 겨우면 스스럼없이 안정제를 그의 앞에서 먹는다. 앞서 저에게 나의 사정을 알리는 것도 숨길 게 없다. 나의 약함이 드러날 때 저의 약함을 스스로 수치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 그야말로 목사인 내가 심약하여 안정제를 의존하는 사람이란 것보다 수치스러운 게 또 있겠나? 기꺼이 나는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저에게 감추지 않는다. 이는 어떤 전략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먼저 주의 도우심으로 살고자 하는 까닭이다. 이것까지도 숨기지 않는다. 가끔은 그러다 같이 주체하지 못하고 서로 가진 안정제를 먹는다! 어떤 이는 이렇듯 남 앞에서 당당하게 먹어본 게 처음이라고 했다. 무슨 두통약 먹듯이 말이다.
그게 부끄럽지 않은 것은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곧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는 내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래서도 나는 직업적으로 상담일을 하지 않는다. 상담이랍시고 작정하고 대화를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으로 같이 기도하고 같이 성경으로 그 답을 들으려고 한다. 이는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것 같이,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나야말로 내 생이 누군가의 기도로 오늘에까지 이르른 것을 잘 안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고 계심으로 나는 늘 사랑에 빚진 자로 산다. 덕도 없고 성격은 모나고 천성은 게으른 영혼인데도 주가 나로 주의 길을 가게 하심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오늘 이 모든 말씀 하나하나가 천국 백성으로 오늘을 사는 데 따른 길라잡이가 된다. 하여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시 77:1).
이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3-4).
그러나,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12-14a).
이에,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하심을 붙들 때,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9).” 하심으로, 답이 없을 것 같은 흔적도 없는 길 위에서도 ‘곧은 길’을 가는 것은….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19-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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