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 19:21-22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시 78:38-39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동쪽에 있는 베레아를 경유하여 남쪽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하셨다. 마태, 마가와 달리 누가는 예수께서 갈릴리를 떤난 직후에 사마리아를 통과한 것까지도 묘사하고 있다(눅 9:51-56). 누가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달리 후기 유대 사역에서 베레아 사역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결혼관을 논하신다. 이어 어느 부자 청년과 선에 대하여 대화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질의응답 형식으로 대화하시듯 하였다. 이 대화에는 예수를 음해하려는 자들의 의도도 숨겨져 있었다.
제자들이 있었지만, 서로가 영적으로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우회적으로 답변하신다. 질문의 영적 무지를 스스로 알게 하시려고 유도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가운데 핍박의 분위가가 고조되고 있었다. 예수의 능력과 기사를 직접, 간접으로 체험한 무리들이 예수를 추종하자, 정치 종교적으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예수를 경계하고 죽일 것을 꾀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예수께서 공공연히 자신을 메시야로 드러내시면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5-16).” 한층 더 경계와 핍박의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바리새인들이 음흉한 의도로 질문하였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19:3).” 이때는 예수의 소문이 헤롯과 예루살렘의 교권주의자들에게 전해져 있었다.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14:1).” 그래서 저들은 산헤드린에서 사람을 급파하여 진상을 조사하는 바리새인들을 구성하였다. 저들은 사마리아를 제외한 전 지역과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그를 시험하고 비방했으며, 모해할 요소를 찾았다. 그리고 오늘 그들은 예루살렘 종교회의와 로마 당국에 고소할 거리를 찾아 신학적인 논쟁을 의도적으로 도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 머물고 있는 베레아 지역은 땅이 비옥하고 경제력이 타 지역보다 상당히 높은 곳으로 유대 교권주의의 영향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곳이다. 더욱이 그 지역 주민들은 예수님의 선교 활동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래서 더 그곳에까지 와서 적대 행위를 일삼을 뿐 아니라, 무리를 충동질하여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려 하였다. 특히 본문에서 그들의 현재 위치가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이혼과 부정한 결혼의 문제로 세례 요한이 처형된 곳과 멀지 않은 것으로 그들이 제기한 이혼 문제는, 헤롯왕에게도 민감한 문제였고 잘하면 빌미를 잡아 예수께 올무를 씌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신학적 논쟁거리를 제시함으로 예수를 정치적으로 곤경에 몰아넣으려는 계책이었다.
이에 ‘시험하여’란 표현을 사용한다. 예수님은 앞서 사탄의 시험당하거나 후에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헤롯당에 의해 여러 차례 메시야의 권위를 시험당하였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가부가 묻는 방식이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옳다’ 하여도 문제가 되고, ‘그르다’ 하여도 문제가 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양자택일의 흑백논리의 오류에 빠져들지 않고 논제의 본질을 그대로 파헤치심으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시도하셨다. 그들의 시험은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유대 사상에 주류를 이루는 랍비 학파인 힐렐과 샴마이는 특히 이혼 문제로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 두 학파는 모두 다 이혼을 인정하였는데 물론 남편이 아내를 버린 경우의 이혼만을 인정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불가하였다. 이들의 이혼에 대한 생각은 신명기 24장 1절을 근거로 하였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곧 ‘수치가 되는 일’이라는 말에 그 근거를 두고 있지만 그들은 이 수치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즉 샴마이 학파는 수치를 간음과 갈이 엄청난 정도의 것으로 해석했는데, 물론 성경 본문은 수치가 반드시 간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간음에 대한 일반적인 형벌은 죽음이었지 이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22:22).” 마찬가지로 수치 되는 일이 아내의 간통에 대한 의심과 동일시 될 수 없다. 이는 아내가 간통한 사실을 밝히고 싶을 경우 저주를 내리게 하는 쓴물을 아내에게 마시게 하는 의식이 있었다. 따라서 수치 되는 일은 바로 간음은 아니라 하더라도 아내의 순결 문제 등 같은 상대 남편에게도 큰 충격이 되는 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율법의 근본 취지를 고려한다면 수치스러운 일이란 남편이 아내에게 떳떳하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요구할 만한 충분하고 객관적인 사유를 가리키는 말이다. 힐렐 학파는 수치의 의미를 확대 해석하여, 실제 죄든 아니면 상상 속의 범죄이든 모든 종류의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서 지극히 사소한 잘못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음식이 상한 일이라든지, 남편이 자기 아내보다 더 좋아하는 여인이 생겼다든지 또는 더 이상 애정이 생기지 않는 것 등의 부당한 일에 의해서도 남편의 이혼 요구가 있는 경우 아내는 이혼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늘 여기 예수님 앞에 가지고 나온 문제는 단순히 이혼 여부에 관한 게 아니라, 이처럼 미묘한 해석과 입장 차이와 그에 따른 예수의 입장에 따라 곤란한 지경에 놓이게 할 예민한 것이기도 하였다. 곧 힐렐의 해석에 동의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에서 샴마이 학파도 그렇고, 만일 예수께서 힐렐 학파의 주장을 따른다고 한다면 그의 대적자들은 샴마이 학파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예수가 도덕적으로 엄격하지 않은 ‘자유주의자’라고 공격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엄격한 샴마이 학파의 편을 들면 그들은 ‘죄인들에 대한 예수 자신의 친절과 자비 행위는 바로 위선’이라고 선전하려 들 것이다. 거기에 헤롯의 경우가 사람들 뇌리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자칫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확산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정황을 살펴보면 참으로 악은 참 부지런한 것 같다. 정직보다 거짓이 더 바쁘고 할 일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끝에 가서 예수의 말씀 속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맞게 되는 핍박의 불가피성도 그런 의미에서 이루어졌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19:29).” 한편 예수와 유대 지도자들의 관계가 도저히 서로 양립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제자들의 관심과 주의를 궁극적이며 종말론적인 희망에 집중시키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28).”
이렇듯 앞서 이혼 문제로 촉발된 상황은 그저 가벼운 문제로 배우려고 하는 의도로 던져진 게 아니었다.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상황으로 미뤄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하는 자들에게 보장된 희망과 하나님의 은혜에 더 크게 무게가 주어진다. 은혜라는 단어가 본장에서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러한 사건과 상황 저변에 깔린 사람들의 악함과 복잡 미묘한 사욕이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은 그렇듯 가정에 관한 교훈이며(1-15), 영생의 조건에 관한 가르침이다(16-30). 더 세부적으로 예수께서 결혼 제도의 본래 의미를 설교하심으로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깨뜨리신 것과(3-12), 이어 가정이라는 주제에서 착안하여 ‘어린아이’도 신앙 공동체 안에서 귀히 여길 것을 가르치신 내용(18:2-14)으로 연결된다(19:13-15). 그리고 부자 청년에 관한 내용(16-22)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물질에 대한 애착을 떨칠 수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를 발단으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성도들의 헌신을 교훈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23-30).
16절 이하부터 앞의 내용(1-15)과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어린아이 교훈(13-15)은 가정에 관한 교훈이라는 측면에서 앞의 내용(1-12)을 직접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는 겸손한 자를 암시한다. 우리의 영적인 자세, 전심(全心)으로 주를 바라는 것으로 부자 청년의 소재는 상대적인 대조를 이룬다(16-22). 저는 나름 선을 구하는 삶을 살았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은 것을 순수하게 이해해도 그렇다. 사회적 기본 구성이랄 수 있는 가정을 주제로 하다(9-15), 일만 악의 뿌리라 하시는 물질에 대한 배금주의를 배격하라는 주제(23-24)는 공생애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우리의 생활에 적잖은 무게로 다가와야 옳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개신교 성도들 가운데 부자가 많다는 통계가 있는데 이는 바울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하는 말씀과도 연결 짓곤 한다. 곧 열심을 다해 돈을 벌어 부를 축적하고 사는 것이 성경적으로 어떠한가? 하는 부분을 오늘 이 부자 청년의 예로 답을 찾을 수 있겠다. 곧 ‘영생의 조건’에 대해서도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16-22). 여기 청년은 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8:18).” 하는 누가의 진술로 보아서, 저는 재물도 많았고, 종교적 의무감도 철저하였고, 율법 의식도 충실하던 자였으며 심지어는 직업적으로도 안정적인 관리였다.
따라서 예수께 처음 나아와 여쭌 그의 질문 속에는 ‘상당한 자신감’이 엿보인다. 오늘 날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 성실한 인간의 표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저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며 새로운 진리를 선포하는 예수로부터도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식의 인정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청년의 질문에 대답하기보다, 저의 잘못된 생각을 책망하거나 지적하기보다, 그의 물음에 내포된 오류를 드러냄으로 스스로가 그것을 깨닫도록 하는 기법의 대화로 이끌어가셨다. 청년은 나름 율법적으로 자신만만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영생의 조건으로 자신은 그러한 계명을 준수하고 살았다고 자부하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7).”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영생의 문제로 바로 접근하며 선을 추구하고 있는 의도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청년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를 다 지키었노라고 떳떳하게 답했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하는 역설적인 물음은 나름 자신만만한 태도로 요즘 젊은이들을 상대하는 듯하다(20). 사실 그는 율법의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측면에서 충실하였을 뿐 아니라, 이에 관리로 일찍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정녕 율법이 지향하는 바가 사랑이며 온전한 의미에서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저는 모르고 있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롬 13:9).” 할 때 이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0).”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도는 우리의 전적인 타락과 무능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으로, 이를 깨달을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할 수밖에 없다. 곧 우리를 주의 사랑으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蒙學先生)에 불과하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따라서 예수께서 그의 마음의 허점을 찌르는 강력한 도전을 주셨는데,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결국 저는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인색하였던 것으로,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 할 때, 나는 종종 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청년은 그렇게 돌아가서 결국은 오지 않았을까? 아니면 정말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를 따랐을까? 그게 참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 곁의 여러 부자 신자들을 본다. 저들은 나름 잘 나누고, 선을 추구하며 기꺼이 자기의 것을 내어주기도 한다. 물론 그러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결국 자신들의 부는 그대로 유지하고 이를 위해 더 열심을 다해 산다.
자기 돈으로 교회를 시작하였다가 어떤 이유로든 그 교회를 다른 교회에 팔아넘기는 목회자를 여럿 보았다. 물론 저의 입장에서 자신의 전부를 털어서 시작했으니 일정 부분 자신의 것으로 여겨 그리하는 것이겠으나, 그것으로 교회가 시험 드는 경우도 여러 곳 보았다. 오늘 이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영생의 유일한 조건이 무엇인지 우리로 알게 하신다. 곧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6).” 그러므로 우리로도, 영생을 추구하는 자에게 요구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살고자 하는 헌신이다. 여기서 암시하는 주제가 있다.
우선은 완전한 포기다. 정작 청년은 영생의 은혜 가운데 들어가기 위해 근심하는 데 머무르다 근심하며 갔다. 자신의 무지와 무능과 자격 없음을 시인하지 못했다. 이는 적당한 자기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우리의 믿을만한 구석이 걸림이 된다. 또 하나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이 어려웠다. 청년은 ‘나름’ 하나님을 사랑하며 율법적, 계명으로 충실하게 살았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라는 말씀에는 뒷걸음질을 쳤다. 바울은 그래서 탐욕이 우상 숭배라 하였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끝으로 청년에게 이웃 사랑은 십계명을 전제로 나름 율법적으로 사는 게 남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일보다 수월하였다. 곧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일 때,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그러니 오늘 날 같이 점점 더 자본의 시대에 적당한 기부나 헌신으로 족한 것이지 자신의 전부를 팔아 나누고 예수를 따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돈돈거리며 사는 게 어디 세상뿐이던가? 교회도 점점 돈 없이는 어렵다. 하여 오늘 시편의 기도로 주 앞에 엎드린다.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시 78:1-3).
말씀이 주는 것으로, 오늘도 ‘청년’과 같이 근심하다 돌아가는 성도들은 어떠한지?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
(11).
오늘 우리가 주를 영접하고 주의 뜻에 산다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질 뿐인데,
그들이 그들의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18-19).
하긴, 오늘도 사는 일이 돈 없이는 어려운 일이라 ‘하나님이 어찌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우리의 식탁을 차리시겠나?’ 싶은 것이라, 근심하고 걱정한다. 하여,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38-39).
오늘도 주의 긍휼하심으로 살고 있는 것을,
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도다
(68-69).
그리하여,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7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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