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 20:14-16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시 79:13
하나님의 섭리란 이와 같이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하시며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하심과 같다. 우리의 상식과 의지를 꺾으신다. 우리의 의지란 악한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악하나 주는 선하시다. 어떠하든지 주는 선하심을 인정하는 데서 주의 영광이 충만하시다. 곧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것이다.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인정한 데서 비롯된다.
하여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12).” ‘여기까지’ 하고 하나님이 임의로 허용하시는 것이 섭리다. 이에 하나님의 영광은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20-21).” 비록 그 현실은 잔인하여서 옷을 찢고 머리를 밀고 땅에 엎드릴 때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으로 충만하다. 이를 고백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주를 인정하는 것이다. 곧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22).”
그렇게 우리로 주를 인정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심으로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고 오늘의 섭리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신 2:7).”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교회가 유지되고 존재한다. 나로 이 길을 가게 하신다. 그러하기까지 주의 강권하심으로 그의 능력 가운데 살게 하셨다.
87학번을 건너 뛰고 97학번에서 다시 또 멈췄다가 09학번으로 끌려올 때까지, 그리하여 나는 신대원을 나보다 열여섯 살 아래의 어린 동기들과 같이 공부하였다. 그때 내 나이 또래의 교수들이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주었고, 내가 독립교단으로 목사안수를 받을 때 누가 말하길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하신 말씀으로 축복하였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점에서 나의 묵상이 길어진다. 처음 온 자로서 불평할 수 있겠다. 온전히 자신들은 시간을 다 채웠고 열심을 다했는데, 고작 뒤늦게 와서 한 시간 일하고 자신들과 같이 임금을 받으니 그럴만하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10-12).”
세상 이치로는 맞지 않다. 상식적으로도 옳지 않다. 그러나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물으실 때, 것도 틀린 게 아니다(13). 저들로서는 본래 약속대로 받은 것이니, 주인이 나중 온 자를 같이 주든지 더 주든지 그것으로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 이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14).” 하실 때의 ‘내 뜻이니라.’ 하심이 주의 섭리다. 좀 더 극단적으로 누가 복권을 사서 1등 상금을 받든지 못 받든지,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그것이 ‘내 뜻이니라.’ 하심이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로 ‘천국’을 집중하게 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신 후 잃어버린 낙원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새롭게 건설하시는 천국의 주인이요 왕으로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이는 동시에 우리로 맡게 하신 사명이다.
하여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다.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신 것이다. 그것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듯 기어이 하나님의 나로 주의 길을 가게 하셨다. 어릴 때 아직 철없던 시절에 마음이 뜨거워져 회개할 때에 세례를 받으며 서원하였던 일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늘 그렇듯 주의 강권하심이란 이해 밖의 일이고, 상식 밖의 일이다. 함께 세례를 받았던 예닐곱 명의 아이들도 나와 같이 뜨거운 마음을 느꼈고, 이후 나까지 포함하여 목사가 둘, 사모가 하나, 선교사가 하나 그 가운데서 나왔다. 그 시절 교회 형들 가운데서도 매일 학교 끝나고 교회로 올라와 기도하다 가곤 하였는데 목사가 셋, 신학 교수이며 목사가 하나가 나왔다.
그렇듯 ‘나를, 우리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는 말씀이 내 삶에서 이루어졌다. 자주 말한 것 같이 나의 부친도 뒤늦게 우리 사 남매를 두고 부르심을 받아 그 뜻을 따랐다. 그 시절 가난이 보편적이었으나 정말이지 징글징글하게 가난하였던 것 같은데, 그런 가운데 가는 교회마다 놀라운 역사가 여럿 있었으나 그 가운데 이처럼 주의 사역자들이 배출되는 일이 늘 벌어졌다. 기어이 우리 형제들과 매형까지도 주의 목사로 부르심에 이끌려서 오늘에 이 길을 가고 있으니….
나는 늘 말씀이 내 삶에 증거가 되고 우리의 삶이 말씀을 증명하는 데서 주의 영광이 되는 것에 놀란다. 그와 같이 ‘천국’이라는 핵심적 메시지가 반복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오늘 본문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1-16)와 앞으로의 수난을 예고하고 있다(17-29). 천국의 영광과 안식에 이르는 도정에는 고난과 신령한 싸움이 불가피하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는 필사적인 수고와 인내가 필연적이다. 하여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이를 오늘 우리의 권능으로 의지하며 사는 것이겠다. 다시 말해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13:10).”
동생은 촉법소년법에 의해 아이의 악의적인 거짓말과 그 모친의 헛된 욕심으로 3, 4년을 시달리며 1심과 2심을 거쳐 집행유해 2년과 교육 몇 시간과 앞으로 몇 년간 청소년 사역이 법적으로 막혔다. 그 일로 시달리며 신장이 망가지고 몸이 쇠약해져서 병들기까지 했다. 부친의 사망과 다음 중에 이어지는 무슨 교육 시간을 이수해야 하는 상황은 끔찍했다. 슬픔을 억누르며 억울함을 안고 교육에 임하였고, 그런 가운데서도 성령의 역사는 놀라운 반전을 이루셨다. 곧 그 교육장에 억지로 온 스물 댓 명의 인사들 가운데 대부분이 자기 자식에게 고소당하고, 또는 이웃이나 친구의 신고로 잡혀온 것이었다. 모두가 자식들 일로 말이다. 그야말로 부모들이 실의에 빠져 수치스러워했고 부끄러워하였다. 차마 어디다 억울함을 호소한들 자식을 욕하는 일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 교육이 끝나고 강사로 왔던 교수가 제안을 했고 동생의 사역 제 2막은 상한 심령의 부모들을 상담하고 양육하는 일이 되었다. 의기소침해 있던 동생은 다시 건강을 회복하려 운동을 하면서 공부한다. 아이들을 상대하는 일이 법적으로(?) 금지된 마당인데 그 부모들을 상대하는 일로 저의 청소년 사역은 부모 사역으로 역발상으로 전환되어 새로 시작되었다. 이렇듯 내 곁의 사역자들은 그 사연이 하나 같이 주의 영광이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증명하는 현자로서 맡은 바 그 사명을 다한다. 교회 안에 사택을 두고 일생을 상가 건물에서 생활하며 서른 명 남짓한 가정의 성도들을 한 영혼 한 영혼 돌보며 양육하는 일에 전념인 경우, 그런 가운데 또 그 가정마다 아이들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문제들이 있어서 그 부모들인 성도들이 날마다 교회에 모여 눈물로 기도한다. 누구는 다 버리고 미얀마로 가서 인형극을 가지고 선교활동을 하느라 일생을 헌신하고 있다.
그렇듯 저마다의 사역에 전념하는 이들은 누가 먼저 됐고 나중 됐고, 누가 더 받고 덜 받고 하는 따위로 씨름하지 않는다. 이는 곧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하심이 내겐 늘 규범이 되어 옳은 길로 인도한다. 사람을 보고, 교회를 넓히거나 확장하려, 교단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려, 지역사회에서 헛기침 좀 하려 애쓰지 않는다. 곧 오늘 본문 29-34절에서 천국의 왕 되신 예수의 무한한 긍휼과 자비를 보여주고 있다. “맹인 두 사람이 …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하여 저마다의 사연을 뒤로 하고 예수를 따른다. 이는 우리로 장기적 안목을 열게 한다. 훗날에 제자들이 성령의 조명으로 예수의 말씀을 새로이 깨닫게 된 날, 오늘의 이와 같은 현장의 소식은 그 의미마다 천국이 숨겨져 있다.
이 비유에 내포된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로 그의 섭리에 순응하고,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19-20).” 하고 전하는 것은,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7-18).” 더러는 이 일이 우리로 걸려 넘어지게 한다.
할 때에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눅 7:23).” 만일 동생이 그렇듯 더는 사역을 그만두고 더는 아이들이 지겨워서 멀리하였다면 어땠을까? 그때 내가 공황까지 겹치면서 더는 신대원을 포기하였더라면, 혹시 목사 고시를 두 번째 떨어지고 ‘인성검사’에서 우울과 자살 충동이 높게 나왔다며 면접관이 만류할 때 그만두었다면 어찌 됐을까? 그때마다 놀랍지? 친구 동생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50일 전에 글방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병원으로 온 것부터가 기적이었다.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겨 남은 생을 정리하려던 것이 복수가 갑자기 차올라서 긴급으로 온 것이고, 하필 우리 글방 교회와는 5분 거리여서 나로서는 그동안 멀다고 안 가본 것인데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매일 만나게 된 50일간의 시간은 나로 하여금 기어이 주의 길을 가게 하였다. 천국에 대한 불확실한 마음과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힘들어하던 저를, 범불안증으로 안정제를 먹으며 사역을 감당하는 내게 보내셨는데… 성령의 강권하심이란, 어쩌다 매일 오전 글방으로 가는 길에 들러 같이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에베소서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오늘의 모든 게 예정과 섭리 가운데 일인 것을 같이 읽고 나누고 기도하다 저의 임종을 내 손으로 마주하며 예배를 인도할 때의 그 두려운 감격에 대하여 나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란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워서, 그 뒤로 목사가 되고 오늘까지도 조현과 불안과 우울과 강박과 조울을 안고 찾아오는 이들을, 여전히 나는 안정제를 먹으면서 상대한다. 그들 앞에 주의 이름을 걸고 같이 앉아 기도하고 저의 사연을 듣다가 나는 주의 말씀을 전한다. 그렇듯 우리의 약함으로 강하게 하심인데,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갈 4:13-14).”
그렇듯 나의 약함으로 저들이 찾아오고 말을 걸고 자신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고백한다. 어쩌다 같이 나란히 진정되지 않는 가슴으로 안정제를 먹어가면서… 가끔은 이상하고 놀랍고 신기하고 시끄럽고 희한한 일이어서,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5-16).” 하시는 오늘 말씀으로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심으로 나는 오늘도 용기를 낸다. 나는 주의 것이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면 어떠한들 어떻겠나?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하심인데, 오히려 주 앞에 감사와 영광을 올리며…….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시 79:9).
주 앞에 엎드려,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11).
저들을 중보하는 것도,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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