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하현. 2026. 6. 23. 06:0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 21:42-43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시 80:19

 

 

주가 이루시는 일에 대하여 더러는 회의가 밀려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데 있어 그 느낌이 애매하다. 기대하던 왕으로, 정복자로의 입성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하다. 누구도 그 시간이 예수의 생애에 마지막 한 주간이 될 것이라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예수의 승리의 입성으로 보기에는 다소 어폐(語弊)가 있다. 이를 시작으로(21:1-11), 26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수난을 당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27장에 가서는 마침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인류의 대속을 이루신다. 오늘 이 마지막 한 주간은 생의 위기와 절정에 해당한다. 28장에서 부활하심으로 비로소 승리의 대단원이 막을 내린다. 곧 오늘 우리의 어떤 어려움이 우리로 어떤 결말에 이르게 할지 모른다.

 

우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본문의 ‘고난 주간’ 중 처음 사흘(주일, 월, 화)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셋째 날 화요일, 하루 동안의 이야기는 오늘 본문 21장 18에서부터 26장 16절까지 계속 이어진다. 전후 문맥의 연결로 보아 ‘예수의 메시야’ 사명이 공공연해진다. 이미 예수님은 앞서 16장에서 메시야로서의 신분과 사역을 스스로 공개하신 바 있다(13-20). 그러한 자기 공개는 주님의 공생애에 있어 획기적 전환을 마련하였다. 당시에 제자들에게만 공개되었을 뿐이고 오히려 비밀에 부치도록 함구하게 하셨다.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16:20).” 또한 엿새 후에 예수께서 변화산상에서 영광스러운 형체로 변형되셨는데(17:1-8), 이 또한 오직 같이 갔던 세 제자에게만 공개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절 알리지 말도록 당부하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9).”

 

여기서 보면 확연히 드러나는 게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따로 구별하여 아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 사이에서도 더욱이 소수에게만 알게 하시는 공개의 차등을 말이다. 우리가 서로 하나님을 믿는 데 있어 여럿에 해당하여 멀찍이서 따르는 자들이 있다. 혹은 더 가까이 나아와 주의 곁을 지키는 자들도 있다. 그들 가운데서도 더욱 가까이 하게 하시는 이들도 있다. 말씀을 알게 하실 때도, 그 삶에서 주의 은혜를 체감하는 일에서도 이처럼 그 확신과 기쁨이 서로 다른 차등으로 구별되는 것을 보곤 한다. 몇몇 친구는 교회에서 안수집사로 재정을 담당하기까지 한다. 또 한 친구는 이번 가을에 안수집사로 세움을 받는다. 그런데 때론 막연하여서 그 은혜의 기쁨이 한정된 것 같다. 서로의 입장이 다르고 경험이 다를 수 있어 그러려니 하다가도 여전히 세상을 놓지 못함으로 교회에서 적당한 위치를 넘어서지 않으려는 것을 느끼곤 한다.

 

반면 오늘 예수께서 직접 ‘내가 왕이요, 메시야이다.’ 하고 언급하시지는 않지만, 행동과 비유로써 이미 당신이 메시야적 신분을 가지고 온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계신다. 이제 그 공생애의 절정에 이르는 가운데, 십자가의 수난을 불과 일주일 정도 남겨놓은 시점이라,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고 도리어 적극적으로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고자 하셨다. 구체적으로, 오늘 1-11절에서는 ‘왕이신 예수’를, 12-17절에서는 ‘성전의 주인으로의 예수’를, 그리고 42-44절에서는 ‘모퉁이의 머릿돌로서 곧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예수에 대해 적대적인 대립 양상으로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격렬하게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다. 그런 가운데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음을 알고 계신 예수는 이제 대적들과 정면으로 부딪치려 작정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당당한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1-11). 다음 날은 성전을 더럽히는 것에 분노하시며 숙정(肅正)을 통해 부패한 종교로서의 교회를 신랄하게 질책하신다(12-17). 이어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해 저주하심으로 형식적인 신앙을 공박하셨다(18-22). 이어 그리스도의 권위의 출처를 묻는 자들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져 말문을 막아버리신다(23-27). 더는 그런 논박에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어 두 개의 비유로 진리를 핍박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리한 책망을 가하신다(28-32, 33-46). 이러한 노골적인 책망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깨달음이 없었고 더욱이 완고하여져서 예수를 대적하는 일에 더욱 더 가열 차게 열을 올린다. 예수께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죄상을 직접적으로 폭로하기 시작하신다. 그들은 틈만 나면 예수를 훼방하고 시험하였고(15:1, 16:1, 19:3), 이제 그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음모를 급속도로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운데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살피게 된다. 주를 아예 안 믿고 거부하거나 다른 종교를 믿음으로 배척하는 것에 반해, 믿는다고 하면서도 애매한 입장으로 그 신앙을 견지하려는 자들이 여럿이다. 저마다 자신들의 판단과 기준으로 성경을 알고 교회를 다니고 사람들과 어울린다. 일일이 나는 저들의 입장을 반박하거나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매년 ‘선교여행’을 기획하여 떠나는 이들이 있다. 실제 현지에서 선교하는 이들로서는 난감하기도 하다. 저들의 후원과 헌금을 무시할 수 없어 마다할 수는 없는데 그 시간 동안은 자신이 가이드가 되어 저들을 관광지로 안내하는 게 일이다. 어떤 필요한 물품을 전달할 때도 고맙기는 하지만 현지의 교인들을 불편하게도 한다는 것이다. 심한 경우 강한 모멸감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는 얘길 들은 것이라 내가 뭐라 하기는 그렇고, 한동안 모 특수장애학교시설의 보육원에서 아이들과 허물없이 지낼 때가 있었다. 그때도 보면 여러 교회나 지역사회 모 단체나 기관, 정치인들이 찾아오고는 했다. 물론 그럴 때면 알 수 없는 금액의 후원금과 함께 물품이 기증됐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이 동원되어 그 뒤 배경을 이루고 사진을 찍어야 했다. 얼결에 나도 몇 차례 그 아이들 사이에서 사진을 찍고는 하였는데, 대체로 그걸 그처럼 혐오스럽게 여기던 아이들이 여럿이었다. 물론 참 고마운 일이지만 배려란 있는 자나 가진 자를 위한 게 아니다. 그때 아무개는 아이들 손에 쥐어주며 일일이 악수라고 사진 찍는 인사를 뒤로 하고 받은 물건을 내동댕이치는 경우도 여러 번이었다. 결국 그를 비롯하여 스스로 거동이 가능하거나 어디 기거할 상황이 되는 아이들은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가기도 하였다.

 

어떤 선을 행하는 데 있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 하신 예수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하는 일이란 그만큼 묘연한 일인 것 같다. 저마다는 그러한 미담을 훈장으로 달고 산다. 누구와 대화하다 왜 그 먼 곳까지 선교지를 방문하려는지 물었다. 그것도 각자 값을 지불하여 왕복비행기 값만 수백이라, 그 친구는 아들까지 해서 아내와 셋이 다녀오는데 비행기 요금만 천만 원이 다 된다.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던 것이다. 선교지의 사정을 견학하고 조금이나마 함께 참여하고자 하는 것인지, 일주일 남짓한 일정에서 고작 하루 이틀을 제외하면 솔직히 관광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일정이다. 겸사겸사 그렇다는 것인데, 듣다보면 교인들 사이에서도 그 돈이 없어서 참여 못하는 이들도 있고, 그나마 형편이 되니까 그렇듯 참여하는 것인데 그걸 굳이 교회에서 주도하여 선교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게 옳은 것인지….

 

뭐라 반박하려는 게 아니라, 예수를 그처럼 배격하고 죽이려고까지 작정하는 이들의 심사와 오버랩 되는 것은 왜일까?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1).” 하실 때, 갈릴리와 베레아 지경에서 전도사역을 마치신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3대 절기 중 하나인 유월절에 참석하기 위해,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3차에 걸쳐 자신도 이미 예고하신 수난과 죽임을 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다 벳바게에 이르셨다. 이곳은 소경의 눈을 고치신(20:29-34) 곳이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 약 24Km 떨어진 곳으로 당시 성인 남자가 하룻 동안에 걸어갈 수 있는 정도였으나 예수께서는 해발 900m의 이 군사도로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베다니에 도착하여 하루 밤을 보내신 후 그 다음날, 즉 일요일에 다시 감람산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벳바게에 도착하셨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낼 예루살렘에 가까이 옴에 따라 예수의 메시야 되심은 사람들에게 더욱더 전파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끝내는 고난의 십자가를 향한 것임을 알고 계셨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 길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대속의 길이었다. 감람산은 해발 800m에 위치해 있고, 네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어 이 감람산(혹은 올리브산)은 성전이 위치하고 있는 언덕보다 약 90m 정도 높고, 시온 언덕보다 약 30m 정도 높아서 동쪽으로는 요단 계곡과 사해의 웅장한 모습을, 남쪽으로는 넓은 유대 광야를, 그리고 서쪽으로는 예루살렘성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요 통행로 즉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목에 위치하였다. 특히 감람산은 메시야의 길에 대망의 관문이었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슥 14:4-5).”

 

그래서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24:3).” 하여 감람산이 세상 종말에 있어 그리스도의 재림이 예언되는 장소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벳바게는 베다니와 함께 언급되고 있는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날 밤에 이미 베다니에서 기숙하셨으므로(요 12:1, 12) 이곳은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한 마을이 분명하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인근 마을로 감람산 동편, 이곳에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나귀 새끼를 끌고 오게 하셨다. 이 두 제자가 베드로와 요한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눅 22:8).” 혹은 야고보와 요한, 혹은 고침을 받고 예수를 따랐던 여리고의 두 소경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어 나귀를 끌어 오게 하신 이유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2).” 이에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대로 나귀를 구하러 갔을 때 이미 준비된 나귀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이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장래 일을 예견하신 예수의 신성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거리상으로는 예루살렘까지 약 3Km가 넘지 않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 걸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예수시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려고 한다. 곧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이 예언의 말씀을 이루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 21:3-5).” 곧 이를 통하여서도 예수께서는 바로 자신이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더욱 확실히 깨닫게 하려 하심이다.

 

그런데 ‘나귀와 나귀 새끼’ 이 두 마리를 언급하고 있는 마태의 본문은 스가랴 9장 9절에는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로 표현되고 있고, 마가와 누가도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고 표현하여 ‘한 마리의 나귀’만을 언급하고 있다. 모든 복음서 기자는 예수가 나귀 새끼를 탄 것을 증거하고 있으므로 마태의 본문에서 ‘어미 나귀’는 아직 아무도 탄 사람이 없는 그 ‘나귀 새끼’가 순순히 따라오게 하기 위한 용도로 언급되었을 것을 알 수 있다. 곧 나귀와 나귀 새끼에 대한 마태의 표현에 관해, 나귀는 오랫동안 율법의 멍에를 메고 온 유대 백성들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나귀 새끼는 이러한 멍에를 메지 않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이방인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나귀는 모세를 통한 신정정치를, 나귀 새끼는 예수 이후의 그리스도의 신성으로 형성된 어린 교회를 상징한다.

 

또한 나귀는 예수께서 자신이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었고(창 49:10-12, 민 24:17, 사 9:6, 11:1, 미 5:2),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대망해온 메시야이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메시야 예언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으로 나귀가 그 의미를 상징한다. 죄의 굴레를 지고 살았던 어미 나귀를 뒤로 하고, 아직 굴레를 메지 않은 어린 나귀의 등에 앉으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그렇듯 상징적이다. 초라한 짐승이나 동시에 평화와 겸손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마가와 누가는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것이라 표현함으로 ‘순결한 품격’을 동시에 암시하였다. 따라서 나귀를 타신 메시야는 ‘순결한 평강’과 ‘겸손과 섬김의 왕’으로 우리 안에 입성하신다. 곧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는 데서 오늘 우리의 사명을 새삼 더 눈여겨보게 된다. 할 때에 ‘즉시 보내리라.’ 하시는 데서, 이 또한 우리의 이해로는 상상할 수 없는 우리 안의 순종과 헌신을 묵상하게 한다.

 

그렇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1-11),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이 시작되었다. 또한 이어서 성전을 과감하게 정돈하시며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12-13).” 뒤이어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맞물려서 기록하고 있는 것도 놀랍다(12-22). 곧 타락과 형식주의는 같은 줄기를 타고 자란다. 곧 종교의 타락과 상업주의에 대한 강한 메시지이다. 교회 문화의 상업화는 예배의 진정성을 상실하게 한다. 곧 영적 암매(暗昧)를 부채질한다. 결국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지경에 이른다(15:14). 또한 형식과 위선의 신앙을 저격하신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되 능력은 없는 자들로 넘쳐나는 시절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들 그러고 살고, 그리 믿는 자들과 함께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에 이어 예수께서 두 아들을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있다(23-32). 형식적 껍질만 남은 신앙에는 영적인 생명력을 바랄 수 없다. 여러 유대 지도자들이 논쟁을 부추긴다. 그럴 때 예수님은 허탄한 논쟁과 어리석은 변론에서 벗어나 지혜로 비유를 대신하신다. 비유로 하시는 것은 불필요한 변론을 피하시려는 의도이고, 더 깊은 진리를 알리시기 위한 것이다. 하여 악한 농부의 비유(33-46)와 앞서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암매(暗昧)와 타락 상태를 지적하신다. 42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로 비유하심도 그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42-44).”

 

여기서 ‘돌’은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사 8:14-15).” 악한 농부의 비유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질타의 의미였고,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을 암시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39).” 이를 저들도 알아들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45-46).”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께서 모든 성도에게 영생을 보장해주시는 구원자이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이에 오늘도 주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 80:3).

 

하고 주께 구한다. 더러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6-7).

 

주밖에 우리로 오늘을 승리하게 하실 이가 없음으로,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4-15).

 

이 교회를 주 앞에 내어놓으며,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