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하현. 2026. 6. 24. 05:5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4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

시 81:6-7

 

 

우리로 힘에 겨워 주를 부를 때 주는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가 기뻐서 주 앞에 감사할 때 하나님은 그것으로 또한 영광을 받으신다. 곧 우리가 하나님으로만 충만하고 만족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가득하시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공공연하게 대적들의 시험에 응하시고 답하신다. 비유로 말씀하시고 천국을 전파하시는 데 거리낌이 없으시다. 복음이 점층적으로 심화되는 만큼 적들의 핍박도 그 움직임이 더욱 간교하여져서 어떻게든 말의 허물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간다. 대적들의 질문이 교묘해지고, 더불어 예수님의 대답은 적극적이다. 대적들의 간계를 간파함과 더불어 진리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일에 치중하신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간교한 질문 속에 내포된 옥가미를 주는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21:23).” 오늘도 이와 같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22:18).” 그러한 질문에 간교한 의도가 있다.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하고 물으신 후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하고 역으로 물으시고,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19-22).” 저들로 할 말이 없게 하신다.

 

이처럼 주님의 놀라운 지혜를 볼 수 있다. 이들은 교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미묘한 딜레마를 내포하는 문제를 골라 질문하였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17).” 이러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한들 걸리게 돼 있다. 더욱이 저들은 예수의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 아첨의 말로 질문을 시작하였다.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16).” 이를 곧이곧대로 듣기에는 위험하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24).”

 

이는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며 예수께 접근했던 때와는 다른 전략이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21:23).” 저들의 간교한 의중을 그때마다 주님은 꿰뚫어보셨다. 그래서 수비적인 자세에서 질문에 답하신 것이 아니라, 진리를 선포하는 자로서 그 자세를 굽히지 않으셨다. 대적들의 사악한 의도를 공박하는 자세로 일관하셨다. 이렇듯 대적들과 질의응답 과정에서(15-40) ‘다윗의 주’로서의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내시는 것도 놀랍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42-46).”

 

‘다윗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하는 부분은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2-3).” 곧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주가 되는 사실을 밝히신다. 먼저 예수와 바리새인들 그리고 대부분의 유대인들 사이에 시편이 ‘메시야 예언’이라는 점과 그것이 다윗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시편을 지었다는 사실에는 일치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그 조상인 다윗에 의해 이미 성령이 깨닫게 하심으로, ‘주’로 불리워졌음을 지적하심으로 스스로 메시야의 초월성을 강조하신다. 곧 조상인 다윗의 입의 증거로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과 저의 주가 되심을 입증하고 계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유대의 지도층으로부터 책잡힌 유일한 항목은 예수께서 신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6-17).” 저들은 이와 같은 주장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하였다. 곧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8:56-57).” 당연히 이 말씀의 깊이를 저들은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10:24-26).” 이에 저들은 격분하여 어떻게든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들도 예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 모든 가르침과 기적이 가능했다고 인정하였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그러나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10:33).” 이는 유일신 야훼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방 문화와 정치 질서 속에 사는 그들에게 있어 우상숭배와 신격화는 그들이 가장 민감하게 느끼고 반응하는 문제였다. 결코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초월성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해했으며 그 이유로 죽이려고 했다. 그들은 오늘까지도 인간적인 용사, 다윗의 전투적인 용맹을 물려받은 한 자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되 하나님의 아들 혹은 하나님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메시야가 굉장한 능력과 권세로 일하여 그의 존재와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기대까지 있었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요 12:34).” 하지만 영원한 선재를 주장하거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8:58).” 또는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부르고, 그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라는 주장에는 인정할 수 없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8:54).” 하심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10:30).” 하심에는 격분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바,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마 22:2-5).” 심지어는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6).” 이어서 오늘 말씀의 시험과 저들의 저의를 앞서 염두에 두고 이르시는 것이었다. 하여 저들의 질문은 ‘다윗의 수많은 자손들 가운데서 누가 그리스도이냐?’ 하는 데서 예수로 올무에 걸리게 하려 했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만으로 어찌 그리스도가 되겠느냐?’ 하고 따지려는 것인데, 오히려 ‘그리스도는 바로 다윗의 주이시다.’ 하는 것이니 저희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참담함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모습을 환히 보게 된다. 하나님은 ‘종들을 보내어’ 오늘도 말씀으로 이끄신다. 어제도 한 아이가 왔다. 인연으로는 글방에서부터라 족히 20년이 되는 세월이었다. 주안역 어디를 공사하러 왔다가 인사를 온 것이다. 저에게 교회는 안중에 없고 여전히 글방으로, 선생으로 나를 대하는 게 익숙하였다. 저 역시 갑자기 우울이 오고 공황이 끼쳐 병원에 입원까지 했을 때가 있다. 잠시나마 마음을 가져와 같이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그러다 좀 나아졌고, 말로만 듣던 ‘보이스피싱’을 당해 3천을 날리고 난 뒤로 그 마음은 돌아섰다. 어제도 하는 말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말로 나의 이런저런 권면을 외면했다.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늘 본문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2).” 하고 화두를 던졌다. 대개 부자들의 잔치는 날짜를 정하고 종들을 보내어 미리 손님을 청해둔다. 당일에 준비를 마치면 다시 종들이 가서 초대한 이들을 인도하여 오는 것이 관습이다.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고 왕이 내 소청을 허락하시며 내 요구를 시행하시기를 좋게 여기시면 내가 왕과 하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오소서 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하니라(에 5:8).” 하여 “아직 말이 그치지 아니하여서 왕의 내시들이 이르러 하만을 데리고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빨리 나아가니라(6:14).”

 

더구나 왕자의 혼인은 나라의 큰 행사로 이런 절차들이 아주 엄밀하고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오늘 이 종들을 ‘구약의 선지자들’로 이해할 수도 있다. 천국의 임박함을 처음 선포한 세례요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종들은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나라와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했던 선조들과 선지자들 같이 오늘 날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다. 세례 요한의 천국 초대장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는 것이었(마 3:2). 천국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세례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신랑의 친구로서 자기에게 큰 기쁨이 있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 3:29).” 곧 메시야 예수를 신랑으로 소개하였다.

 

그런데 ‘청한 사람들’에 대해 한 번 초청으로 단회적인 게 아니다. 다시 종들을 보내 그 시점까지 계속 유효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고, 그것이 오늘에 이르러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우리들에게까지 유효하게 주어지고 있다. 이는 결코 취소되거나 잊히지 않았다가 때가 되면 실제로 시작되고 초청이 온 종들을 통해 알려지게 한다. 그렇듯 세상도 왕궁의 행사에 백성들을 대표하여 고관대작들이 초청을 받고 참석한다.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막 6:21).” 마찬가지로 천국의 약속과 초대의 말씀도 이와 같은 비유로 전해졌다.

 

그런데 초청된 자들이 ‘오기를 싫어하거늘’ 그들이 왕의 초대를 끝끝내 원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마 22:3).” 저마다의 사연과 사정이 다 있다. 이를 우린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기곤 하는데 ‘그럴 수 있다고 그래도 되는 것은 없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경우라 해도 그렇듯 어쩔 수 없는 것은 없다. 하여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4).” 이는 마치 사정을 하듯 권면하고 또 청하는 일과 같다.

 

어제도 누구에게 그렇듯 말하였다. 예배에 나오기 힘들면 줌으로라도 들어와서 같이 예배드리자, 교회를 이뤄가자… 할 때면 어떤 이는 아이들이 좀 더 크고 나면, 남편이 좀 더 누그러지면, 지금 하는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면… 심지어는 믿어도 기독교는 싫다거나 ‘이 교회’는 싫다거나 하는 식으로 대놓고 거절할 때도 있다. 정중한 거절이나 그것이나 거절은 거절이라, 미루는 것도 사양은 사양이다.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5).” 하면서 저마다의 이유가 다 있다. 심지어는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6).” 대놓고 싫다면서 악의적으로 적대시하는 경우도 있다. 지극히 완고한 마음으로 거절하는 것이나, 가기를 싫다고 대놓고 거절하는 경우나, 아예 모욕하고 죽이려고 하는 경우나 그 결과는 모두 싫다는 데 있다.

 

이에 주님은 오늘의 이 말씀으로 중요한 사실을 증거하신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 곧 ‘청함을 받은 자 택함을 입은 자’의 경우를 따로 나누어 생각하게 하신다. 초청을 받아들이고 예복을 입은 자들은 ‘택함을 입은 자들’이다. 그러나 손님이 가득하여 잔치를 맛본 사람이 소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 모두를 초청하신 것 같이 오늘에 이르러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이 초청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가 거절하여 택함을 입지 못한 비극적인 현실을 맞았다. 저들은 여전히 메시야를 기다린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으로 하나 되신 이로 볼 수 없다.

 

여기서 ‘택함을 입었다’는 것은 이제 잔치를 맛볼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4:24).” 즉 부르심을 받고, 주시는 예복을 입는 것까지가 택함이다. 청함은 그러하겠는가? 하고 초대를 받은 것이다. 인간 편에서는 다 받는 것이다. 선택의 교리는 그 핵심이 여기에서 나온다. 결국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를 알 수 없고 예수께로 갈 수 없다. 그와 같이 베드로의 고백도 주신 것이지 저의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6:17).”

 

우리가 오늘 주 앞에 나오는 것도 그리 하게 하심이지, 우리 의지로나 누구의 강요나 설득으로가 아니다.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요 6:65).” 곧 오게 하여 주심으로 우리가 온 것이다. 이 시간 주 앞에 앉게 하여 주심으로 말씀 앞으로 앉은 것이다. 누가 교회로 찾아온 것도, 같이 대화를 나눈 것도, 그 결과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그리하심으로 그리 된 것이라, 나는 전하고 권할 뿐이다. ‘택정함을 이루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사역이다.’ 많은 사람들이 택함을 입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적고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결국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 교만이 그토록 크기 때문이다. 이는 더 거슬러 올라가 이미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하여,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시 81:1-2).

 

이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하시는 말씀에서 새삼 나의 오늘 이 은총의 날을 사랑한다. 어디가 자꾸 아프다. 거의 매일 진통제를 먹거나 못 견디는 날에는 주사를 맞고 온다. 새벽에 교회로 나올 때는 이른 시간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일어나서 온 몸이 다 뻐근하고 아파서 걸어오는 게 어려워서다. 이렇듯 앉았다 섰다 하면서 글을 쓰면서 나는 주 앞에, 아프고 힘들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오늘 하루로 감사하는 일이어서,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6).

 

오늘도 주가 주시는 은혜로 살기를,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

(7).

 

그리하여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그리하면 내가 속히 그들의 원수를 누르고

내 손을 돌려 그들의 대적들을 치리니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는 그에게

복종하는 체할지라도

그들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되리라

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

(13-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