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하현. 2026. 6. 25. 05:3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 23:11-12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시 82:8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악의적인 질문 공세에 예수님은 지혜롭게 답하였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역으로 질문하심으로 그들의 입을 막으신 것이 여러 번이다. 이제 예수님은 둘러선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교만과 거짓 교훈들을 호되게 나무라시며 경계시키신다. 저들은 논쟁을 일삼았다(21:23-22:46). 이 논쟁의 최종 결론으로,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22:41-46).”

 

이러한 결과는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하는 질문에 대한 핵심적인 답변이 있은 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기독론’을 구축하는 고백으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있어 바리새인들은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죄는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23:2, 3).” 하시는 오늘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곧 저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의 총체였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5-7).”

 

어쩌면 우린 저마다 누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데 있어 사람을 의식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곧 혼자 있을 때나 남들 앞에 있을 때, 가족들과 있을 때나 남들 앞에 보일 때가 같은 사람이 귀하다. 일관되게 그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한 삶으로 드려지는 것이 귀한 일이다. 그런 가운데 당시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모함하고 핍박하는 자들로 초대 교회사에서 여럿 순교의 피를 얼룩지게 하였다. 당시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행 6:10-11).” 저들은 공공연하게 모의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12-13).”

 

곧 저들이 싫어하던 것은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14-15).” 이에 대해 민감하였다.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7:1).” 그들은 어둠에 속한 까닭에 진리의 빛을 본성적으로 배척하였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우리도 본래는 그러하였다. 실제 우리도 다를 바 없었다. 어제는 아이와 같이 이러한 내용으로 성경공부를 하였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우리로 주의하게 하심은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7).”

 

곧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하면서 실상은 열심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과 같이 살았던 게 사실이다. 오늘은 고난 주간이라 할 수 있는 셋째 날 화요일에 주어진 말씀이다. 성전에서 마지막 말씀에 해당한다. 본문은 신명기 32장 1-43절의 말씀과 그 내용이나 구성이 비슷하다. 보다 폭넓은 이해를 도모하는데, 우선은 경고의 대상을 분명히 이르신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종교 지도자들을 경고 대상으로 삼으셨다. 특히 그들을 겨냥하신 데에는 첫째, 그들은 스스로 그릇된 길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타락과 멸망의 길로 인도하였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13, 15).” 그들은 교만하여 스스로 지도자로 자처하기를 좋아하였다. 일반 백성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 하였다. 그들은 마치 누룩과도 같은 존재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16:6).”

 

둘째, 그들은 종교적 열정이 남달랐기 때문에 거짓되고 왜곡된 진리에 몰두하여 참된 진리를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나섰다. 저들에 대한 주님의 경고는 오늘날 교회에도 경종을 울리고 있다. 사회의 여러 부패 중 종교적 부패는 가장 신랄한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종교적 양심은 그 사회를 지탱하는 뿌리이자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적 부패가 그 사회 지도층의 부패를 더욱 추악하게 한다. 결국 신천지를 중심으로 이단들 가운데 정치권과 결탁하여 세를 불리고 권역을 나누어 행사하는 세력이 거침이 없었다. 이는 공공연한 사실이면서 동시에 정치권에서는 끝까지 시치미 떼는 일이기도 하다. 서로가 결탁함으로,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이스라엘의 배반과 하나님의 심판을 주제로 한 ‘모세의 노래’ 같다(신 32:1-43). 이 노래는 ‘타락과 심판’으로 점철되어 이스라엘의 암울한 미래사를 노래한다. 이 노래의 근본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이 노래는 엄한 질책으로 시작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긍휼과 동정이 책망 가운데 두드러지고, 최종 회복과 멸망을 선포하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문에서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상을 거칠게 몰아붙이며 일곱 차례에 걸쳐 ‘화(禍)를 선포하셨다.’ 죄악의 도성이 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면서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한탄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37).” 이와 같은 애도는 영적 암매(暗昧)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셨던 구세주의 애절한 심정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앞에서 서기관들을 위시하여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지적하고 ‘섬김의 도’를 가르치신다(1-12). 그런 뒤 본론에서는 매우 엄정하고 신랄한 어투로써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죄악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곧 ‘화 있을진저’로 시작하는 일곱 가지의 경고가 열거되었다(13-36). 그리고 결론에서는 멸망할 죄악의 도성 예루살렘에 대한 주님의 애절한 탄식을 보여준다(37-39). 먼저 종교 지도자들의 폐단(1-12)은 그들의 언행이 불일치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3).” 서기관들은 율법 해석서만 50권이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해석들 중에 너무 엄격하여 일반 백성들에게 큰 짐으로 작용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에 대해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4).”

 

저들은 위선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가르친 바를 스스로는 지키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 날에도 다를 게 없고, 나 자신도 설교나 성경공부나 묵상이나 누구를 권면할 때의 나와 생활인으로서의 내가 다르다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가령 요즘은 에베소서를 가지고 성경공부도 하고 주일 설교로도 준비하여 자주 묵상하고 전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은 ‘내가 주로만 만족하는 것’이라 하면서 실상 나는 그렇지 못한 것을 자주 느낀다. 어제도 결국 여러 곳에 주사를 맞으면서 이렇게(?) 사는 게 지겨워서 울먹였고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라 염려로 가득 찡그렸던 하루였다. 내 몸 하나 추스르고 건사하는 일이 고된 것이라, 어디가 아픈 일은 참으로 미안한 일이 되어간다. 그러니 아내에게는 불친절하고 혼자서도 꿀꿀하기 일쑤여서 가끔은 누굴 권면하다, 성경으로 가르치다 내가 부끄러워 그렇지 못한 나의 고백으로 대신할 때가 있다.

 

또한 저들의 문제는 외식(外飾)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지적하셨다.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이행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이 네 곳의 성경을 양피지에 적어 놓고 살았다(출 13:3-10, 11-16, 신 6:4-9, 11:13-21). 유대인들은 이 경문을 조그마한 상자에 넣고 끈을 달아 이마에 두르거나 손목에 매고 다녔다. 훗날에는 자신의 경건을 자랑할 목적으로 일부러 경문을 크게 만들 어서 달고 다녔다. ‘옷술’은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기억하며 지키도록 하기 위해 의복의 옷단 귀에 술을 달게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민 15:38).”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옷술을 종교적 지위의 표시로 경건의 외양으로 악용하였다. 오늘 주님은 이를 지적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5-7).”

 

무엇보다 저들은 교만하였다. 이 교만은 일반 백성 위에 군림하여 존대받기를 원했던 까닭에 스스로 지키지도 않는 온갖 엄중한 계명들을 장황하게 설교하였으며, 경문과 옷술을 보란듯이 크게 만들어 과시하였던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지도자의 합당한 자세를 가르치셨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8-9).” 여기서 두 가지, 먼저는 높임을 받고자 하는 자세를 경계해야 한다. 다음은 하나님으로 다른 그 누구보다 우선하거나 높이면 안 된다. 오직 주만 만족하는 삶으로 살아야 한다. 이에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10).” 저마다 어떤 위치를 얻고자 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겠다.

 

그러나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12).” 곧 이 자세는 한 마디로 겸손이란 말로 요약된다. 겸손에 관한 주제는 예수님의 교훈 가운데 일관되게 나타나고, 공생애를 마감하는 시점에도 집중적으로 강조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18:4).” 하심도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 더욱이 겸손은 자라가는 아이 같이 점점 더 깊어져서 경건에 이르게 하는 발판이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그 삶이 겸손하여서 더욱 더 주의 도우심으로만 살게 하려 하심이다. 이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20:26-27).”

 

저마다 입만 살아서 미사여구를 늘어놓기는 잘하나 정작 그 삶이 따라가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 가운데 친히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낮은 대접을 받으며 살던 사람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과 같이, 심지어는 죄인들과 병자들을 섬기시다 십자가상에서 죽음으로 내어주시기까지 하신 주님의 섬김의 도는 우리가 애써 따라야 하는 실천적 모범의 길이다. 곧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아니하는 결과는 불순종의 삶을 낳는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그렇다고 선조들의 유전이나 인습을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경향도 옳지 않다.

 

오늘 날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읽고 헌금을 내는 등 종교적 의무는 다하면서 그 삶은 세상을 추구하고 바라며 사는 일이 자연스럽다. 내 곁에는 대부분이 믿는 사람들인데 더러는 저들이 추구하는 삶의 한계가 세상에 안 믿는 자들의 것과 다를 게 없어 의아할 때가 많다. 교회를 선택하고 그 안에서 추구하려는 것도 세상적인 친목과 안전을 꾀하려는 것이 우선이라, 너무 사교적이거나 혹은 이 땅의 관계로 결집되기 일쑤다. 결탁하여 서로 부정한 방법으로 끌어주고 이끌고, 사회에서 특정 세력이 되어 하나의 카르텔을 형성하는 일도 흔한 일이다. 서로 모여 기도하는 모임이나 예배가 정치적인 목적이나 지역사회의 안녕을 도모하는 데 집중되는 것도 흔히 본다.

 

오늘 본문에서 ‘다섯 가지 화 있을진저’에 대하여,

 

첫째, 너무 그 문턱이 높아서 자신들도 지키지 못할 것을 천국의 조건으로 삼는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13).”

둘째, 한 영혼을 마치 어떤 집단의 이익으로 소모하려는 것 같이 덩달아 악으로 이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15).”

셋째, 성경을 너무 모르고 겉핥기로 해석하여,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16).”

넷째, 형식과 규례에 열중하다 정작 의와 긍휼을 버렸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23).”

다섯째, 대놓고 탐욕과 방탕을 일삼아 교회와 주의 영광을 어지럽힌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25).”

 

이런 자들에 대하여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24).” 하심 같이 사소한 것으로 남을 판단하면서 정작 돌이킬 수 없는 죄악으로 정죄함을 받는다. 이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36).” 두려운 일이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37).” 주님은 오늘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아보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29).” 우리로는 주를 더욱 간절히 바라고 구하며 찾게 하시려고 오늘도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주 앞에 엎드리게 하신다. 그러니,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시 82:2-4).

 

우리의 실천하는 삶을 요구하신다. 세상은 어차피 그런 곳이라,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5).

 

이를 뭐라 할 게 아니라, 자신을 더욱 돌아보아서 우리의 신분과 오늘을 허락하시는 이유를 망각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6-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