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24:13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시 83:1-2
오늘 본문은 가장 난해하며 두려운 말씀으로 꼽힌다. 더욱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34).” 하신 말씀은 C. S. 루이스의 말처럼 “성경에서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구절”이라 하겠다. 흔히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도들과 불가지론자들은 그리스도와 기독교 및 신약을 반대하는 주요 논증 가운데 하나로 이 본문을 인용하였다. 여기서 ‘이 세대’를 종말적으로 해석한다. 곧 이 세대가 예수님 당시 세대가 아니라 ‘마지막 세대’ 혹은 ‘종말적 세대’를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이 세대’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항상 제자들 당시의 세대를 의미하였다.
가령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마 23:35-36).” 하신 말씀도 바로 그 세대를 가리켜 분명 예루살렘 멸망을 포함한 당시의 세대였다. 이처럼 오늘 본문 24장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고, 초기교회가 삽입한 것도 아니다. 말씀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든지 실제 그 시대로 적용하든지 ‘모든 성경은’ 현재진행형으로 오늘에도 여전히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이 일’의 의미는 본문 전체의 의미를 여는 열쇠다. 역사적으로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다(1-3). 먼저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장엄한 건물을 가리키자, 2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하시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이 모든 ‘것들’에 해당하는 성전의 임박한 파멸을 분명히 하셨다. 이에 ‘우리에게 이르소서.’ 하며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하는 의문을 던진 것이다.
제자들이 우선하여 궁금하였던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의 때이다. 또한 주의 ‘임하심’과 세상의 ‘끝’에 대하여 궁금해하였다. 우선 ‘이 일’은 그리스도 당시의 세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심은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 저마다 자신의 생이 끝나기 전에 영적으로 우리는 이 일을 다 겪는다. 곧 ‘세상 끝’에 있을 세대가 아니라, ‘이 세대’는 모든 세대를 아우른다. 예수께서는 바로 앞 장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화를 선언한 뒤 더 넓은 문맥에서 이 예언의 말씀들을 이어가셨다. 앞서 23장의 문맥은 사회, 정치적 실체로서 국가적인 운명의 선언과 더불어 예수를 거절하는 유대에 대한 정죄를 말한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23:38).” 하심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곧 ‘이 세대’라는 구절을 예수 당시의 세대 곧 기원 후 31년에 그분의 말씀을 전달받은 자들만을 지칭하는 말로 본다면, 성경적 사고에서 한 세대의 길이를 약 40년으로 하여 예루살렘의 멸망이 기원 후 70년으로 정확히 예수님 당시의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일어났던 것도 사실이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멸망하였고, 당시에 거짓 메시아들이 난립하였다. 또한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동조자들이 서로들 메시아라고 주장하였던 것도 사실이다(요세푸스, 유대전쟁사). 또한 전쟁도 당시 이스라엘은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파다했고, 일부 셀롯당의 광신적인 행동이 수시로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자연재해도 극심하여 주후 65년 로마에 퍼진 염병과 지진이 유난히 많았다.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 11:28, 16:26).”
이는 그 후에도 여전하여 오늘에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예언을 들어가보면 먼저는 사람의 미혹을 주의하라 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4).” 이는 곧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5).” 하심은 오늘 날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그뿐인가?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6).” 이는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양극화가 심해지는데 이는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뿐 아니라 종교에서도 그러하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하여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7-8).”
이는 예수님 당시에 스데반의 순교에서 시작하여 로마의 네로 치하의 무서운 박해에 이르기까지 거듭되는 박해로도 이어졌다. 곧 ‘이 세대’는 예수님 당시 한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시작으로,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의 파멸을 포함하여 오늘 날의 파멸에 이르기까지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것이다. 예수님은 누누이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가증스러운 외식을 모든 제자들과 무리 앞에서 공개적으로 지적하셨다. 본문은 그러한 공개적인 경고 뒤에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이다. 즉, 예루살렘의 멸망을 애도하는 것을 끝으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23:37-39).” 하신 말씀에 따른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아름다운 돌로 건축되고 온갖 장식물로 치장되어 그 장관을 자랑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그러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눅 21::5-6).” 하실 때만 해도 믿을 수 없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율법을 친히 완성하사 성전의 화려한 외관을 폐하시고,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마련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1-24).”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이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항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의 멸망을 단호히 선포하신 후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셨다. 본문은 이에 여러 해석과 과도한 의미부여로 난해한 내용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는 오늘에까지 여전하여서 인류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부터 종말의 시기를 살고 있다. 이에 재림의 때가 언제일지 모르고,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는 점점 더 애매하게 여겨질 것을 아시고,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35-36).” 하고 이르신 뒤 노아의 때를 예로 드셨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37-39).” 그때에 방주를 짓는 노아와 그 일가족도, 이를 지켜보는 그 시대의 사람들도 이 일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감감무소식으로 날이 거듭될수록 사람들의 감각은 무뎌지고 모호해진다.
오늘 이 예언은 고난 주간 중 셋째 날인 화요일에 주어진 것이다. 더욱이 마태복음 5대 강화 중 마지막 강화로, 이는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행하셨기 때문에 ‘감람산 강화’라고도 한다.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3).” 이처럼 우리는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에 관해 오늘 본문의 말씀을 굳이 어느 특정 역사에 연관 지어 해석하려 할 필요가 없다. 나는 저마다의 생에서 이와 같은 사실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누군 끝내 죽을 때까지 의심하고 거역하여 믿지 않지만 누구는 이내 노아가 되어 방주를 짓거나, 오늘의 사람의 교훈과 미혹하는 여러 부분들을 경계한다. 어째서 누구는 이렇고 누구는 저런지, 이에 대한 답은 예정과 택함의 영역으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곧 하나님의 섭리에 해당한다.
실제 예루살렘 성전이 언제 멸망했든지, 전쟁과 기근, 난리와 소문이 어떻게 확산되어 사람을 미혹하게 하였는지… 이후 오늘 날에도 진행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결국 ‘그 날과 그 시’는 누구도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36).” 따라서 우리는 항상 종말론적 긴장을 늦추지 않되, 막연한 두려움으로 온갖 것에 부화뇌동할 필요도 없다. 즉 오늘 이 말씀은 어떤 비밀스러운 현상을 알려주시려 했다기보다 ‘종말’을 맞이하며 살아야 하는, 승천 후에 남게 될 성도들의 굳건한 믿음의 동기를 부여하시고자 하심이다. 고로 우리 성도는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고(4), 끝까지 견뎌(13), 영광스러운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 이는 앞선 세대가 그러했듯이 오늘도 여전하다.
요즘은 매일 어머니와 통화하는데 서로 자주 아버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이 안 난다. 더욱이 내가 어릴 때 기억하고 있는 일들마다 아버지의 전투적인 목회 현장이어서, 나는 그 자체로 성령의 체험이고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가끔 생각하면 나보다 직접적으로 목회 현장을 관통하여 살아온 사람이 또 있을까? 네 살 때쯤 아버지는 말도 안 되는 사업 실패와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였고, 이후 모든 목회 현장은 필사적이었고 전투적이었다. 그러다보니 우리 사남매의 자녀들의 생활 역시 같이 휩쓸러 갔던 것인데, 그때의 가난이나 우연 속에 감추어진 필연들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들이 많다. 오늘에 이르러는 모든 게 다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인정함과 깨달음이 따른다.
나의 생후 6개월의 소아마비와 네 살 때의 천호동 일대 대홍수와 예닐곱 번의 초등학교 전학과 새로운 교회는 하나로 이어진다. 초등학교 졸업식날 수술했던 여수 애양원병원 나환자촌에서의 수술과 6개월의 생활로 이어졌던 이후 의정부 안쪽 나환자촌 교회로의 목회 현장은 물 흐르듯 연결되고 이어졌다. 이렇듯 어머니의 기억을 듣다 보면 아, 그때 그래서였구나! 하는 일화 속의 숨은 뜻을 이제야 아는 것 같은 놀라움도 있다. 왜 갑자기 서울 종암동에서의 교회를 나와 의정부 안쪽 나환자촌 교회로 갔는지, 앞전에 소록도를 지원했던 일과 내가 수술하고 6개월간 있던 애양원 생활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후 3, 4년 후 인천으로 개척도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상황이 숨어 있었고, 하나님의 강권하심은 때론 억울하게, 때론 쫓기듯 내몰아가시기를 반복했다. 만일 그렇지 않았으면 그곳에 그대로 안주하였을 텐데…. 하나님의 섭리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각도에서 다방면으로 역사하시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역사적으로 한정지어 해석하려 하거나 그 의미를 축소, 왜곡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일은 예수님 당시 세대에 이루어졌으며 오늘에도 여전히 그 세대는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32-51절) 마지막 날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각각 말세의 징조와 마지막 때의 대환난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여전히 참고 기다림으로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33).” 하여 오늘도 문 밖에 서신 예수를 기다리며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 점점 더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10-12).” 교회를 멀리하고 떠나는 게 당연한 현실이 되어가는 가운데 오늘의 이 모든 사실은 말씀에 이미 있었고, 말씀은 여전히 사실로 증명되고 있었다. 하여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17-18).” 있는 그대로 오늘을 사는 동안,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그들이 주의 백성을 치려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시 83:1-4).
오늘 이 모든 현상의 날들 가운데서,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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