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40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시 84:5-7
작은 자에게, 작은 일로 한 것이 주께 하듯 할 때에 더는 작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것은 이처럼, 이 시간, 이 보잘것없는 일일지라도 주의 뜻으로 합한 게 된다. 앞서 종말의 징조에 관한 예언을 통해(24장) 주의 재림의 확실성과 돌발성이 강조되었다. 오늘은 이어 그의 재림을 예비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와 ‘달란트 비유’와 ‘임금 앞에 선 좌우편의 사람들’로 비유하여 그 합당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설교하신다. 이 세 가지 비유는 감람산 강화의 연속이라 하겠다. 앞장의 세 비유들을 보충하고 그 내용을 더욱 심화시킨다.
열 처녀 비유로는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마음을(1-13), 달란트 비유로는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의 구체적 삶의 열매를(14-30), 그렇듯 재림의 때에 있을 심판에 대해(31-46) 오늘 말씀은 점층적으로 설명을 이어간다. 이처럼 시간적으로 전개하여 점층적 순서로 이어지는 내용은, 마찬가지로 24장 32-51절의 내용 또한 다소 구분이 모호한 점도 있지만 대략 본장의 이러한 순서와 구도로 되어 있었다. 먼저 재림의 때를 가리켜,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24:31).” 하신 후에,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가르치셨다.
먼저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이 모든 일’ 앞서 때가 악함으로 일어나게 될 여러 징조들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하심으로 주의 때가 가까움을 밝히셨다(32-33). 이 일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하심 같이 실제 그 상황은 동시대 제자들이 살아 있을 때도 일어났고 이후에도 여전히 일어나면서 오늘에까지 우리로 알게 하신다(34). 이에 주님은 이르시길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5).” 그러나 우리가 안이하고 나태하며 설마, 하고 방심하는 것은 ‘그 날과 그 때’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천사도 아들도 알지 못하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 아시는 일인데도 저마다 이단들은 속단하거나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다(36).
이를 알리시며 비유로 하신 말씀은 ‘노아의 때와 같이’ 하심으로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곧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37-39). 그러니 가끔은 갈 데까지 가 봐야 안다는 말처럼 어리석고 두려운 일도 없다. 그만큼 서로가 모를 일이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40-41).” 아, 이 일이 얼마나 황당한가?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42).”
이와 같은 ‘부활 신앙’과 ‘재림 신앙’은 하나로 연결되어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여전히 ‘십자가의 신앙’으로 고통당하는 이가 있는가? 저는 돌이켜 주 앞에 섰고 회심하여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죄를 고하고 아뢰며 울부짖는다. 그러면서도 오늘의 현상에 급급하다. 그날에 대한 약속도 오늘의 결과로 삼아 요구하는 바가 일시적이고 한정적이다. 가령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시하여 주가 살아계실 때 따르던 많은 이들이 결국 다들 옛 생활로 돌아갔다. 더러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고 떠났고 더러는 망연자실하여 허공을 바라만 보았고, 데마는 세상으로 돌아가거나 유다는 스스로 목을 메어 죽었다. 그러다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여 이를 목격하고, 듣고, 보고 하는 부활의 신앙이 있어서야 저들은 성령을 받고 새롭게 되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더하여 우리에게는 재림 신앙이 요구된다.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43-44).” 앞서 24장의 내용도 그런 것이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45-46).” 끝까지 견딤으로 재림 신앙은 완성된다. 나의 이 사소함으로 우리가 새 힘을 얻는다. 그럴 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47).” 오늘 이 자리, 이 시간을 나는 그리 여긴다. 내게 맡기신 것이다. 늘 마음 한편으로는 너무 하는 게 없는 것 같아 송구할 따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 새벽 눈을 뜬다. 교회로 올라와 말씀 앞에 앉힌다. 나의 하루 중에 내가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우선순위에 속한다.
오늘 본문의 비유들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발견된다. 누가복음은 12:35-40의 비유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1-13)’ 대신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나오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동일하다. 그리고 달란트 비유는 누가복음 19:11-27의 ‘열 므나 비유’와 아주 흡사한 내용으로 전개된다. 세부적인 사항에 있어 다소 차이가 있지만 내용을 개괄적으로 볼 때는 같다. 우리는 오늘 이 세 비유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먼저는 그 강조하는 바가 세 비유 모두 한결같이 주의 재림의 때에 칭찬과 축복을 받을 무리와 저주와 멸망을 당할 무리로 뚜렷이 나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세 번째 비유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한 이 세 비유는 모두 칭찬이나 축복보다 저주와 멸망을 경고하는 데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 즉 이 비유들은 주의 재림의 약속을 멸시하고 세상 풍조에 휘말려 들어감으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도외시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말세지말(末世之末)에 오늘 우리는 이러한 부정적인 결과로 더 관심을 두고 나를 지켜낸다. 그 어느 시대보다 유혹하는 것들이 교묘하게 포장되었고 과장되었다. 적당히 그래도 되는 것 같은, 신앙과 세상이 애매하게 혼용되었다.
그러다보니 여느 종파 가운데 뚜렷하게 모든 것을 포용하고 혼합하는 종교들이 득세한다. 타종교와의 화합이나 사회참여로 선을 추구하는 일상의 선행들의 사람들의 호감을 산다. 저마다 청년들을 모으려고 별의 별 행사를 다 진행하는데 더욱이 해외 봉사나 파견 등을 스펙으로 내세워서 후원하는 쪽으로 많은 젊들이들이 기운다. 곧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부여된 귀중한 사명을 역설적으로 세상과 화합하고 서로 잘 어울리는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끝이 가까울수록 공의는 교묘하게 짓밟히고 사랑은 점점 대체되고 식어져 갈 것이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24:12).”
이와 같은 암울함을 강조하면 저마다 부정적으로 여긴다. 누가 내게 했던 말도 나와 대화하면 꼭 이상하게 자신이 잘못 사는 것 같고, 혼나는 것 같고, 욕을 먹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 게 아니라도 해도 내가 자신을 야단치는 것 같다고 하니 나로서도 난감할 따름이다. 하긴 저의 나이도 쉰이 다 되었으니 뭐라 하는 것이면 좋아할 리 없겠지만 주일을 지키는 일이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일이나, 교회를, 예배를 선택하고 참여하는 일에 대해 성경을 중심으로 말함인데… 너무 고지식하다고 한다. 마치 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한가? 하고 물으면 그저 기분 나쁘다는 것인데, 그러니 되는 대로 형편에 따라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나가고 사람을 대하는 일에 있어서 어찌 보고만 있겠나? 뭐라 말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이유다.
사람은 다수를 따라 살려고 하는 속성이 있다. 다수가 쫓는 길에는 악으로 달려가는 길이 태반이다.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만 봐도 자기들 좋은 것으로 자기를 위해 한다. 어두움을 화려하게 더하여 낮보다 밤을 선호하는 격이다. 진리의 등불을 발하는 거룩한 사업에는 심드렁하다. 사람들의 환호와 주목 받는 생이 되고자 더욱 심혈을 기울이는 게 세상 이치다. 이에 따른 경고가 오늘 비유들의 핵심이다. 곧 그 경고의 대상은 적극적으로 악행을 일삼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이루지 않은 자들이다. 미련한 다섯 처녀의 경우 저들도 신랑을 맞으려고 밤이 늦도록 기다렸다. 곧 나름은 신앙으로 믿음을 가지고 한다고 한다. 다만 기름을 준비하는 일에 태만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그럴 수 있지’ 하고 허용하는 수준의 정도이다. 뭐 그리 대단히 잘못한 게 아니다. 그야말로 그럴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러나 결과는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다.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8, 10).”
또한 한 달란트 받은 종도 그렇게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다.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저는 주인이 맡긴 ‘그 돈을’ 땅에 묻어두고 아무 일도 행치 않음으로 잘 보관하였다. 그 결과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났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24, 30).” 또한 염소의 무리로 분리된 자들도 사실 별 거 아니라면 별 거 아닌데, 흔히 우리도 다들 그러고 살듯 작은 일, 별 거 아닌 데서 관심을 줄인 것뿐인데 그 결과 영영한 불에 던지움을 받은 된 것은 좀 너무한 듯도 하다. 고작 형제들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다.
여기서 저들의 항변으로 우리 믿는 자라는 사람들의 원성을 들어볼 수 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 이 판단은 너무 억울하듯 하다. 나름 한다고 하고, 믿는다고 믿으며 살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저들은 항변해본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42-43).” 저들 입장으로는 나름 해외선교도 다녀오고 교회에서 성가대니 뭐니 하며 여러 봉사도 행하고, 때마다 나름은 물심양면으로 섬긴다고 섬겼다. 억울할 만하다.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하고 되물자(44),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45-46).” 아, 이런! 어쩌면 사소하고 별 거 아닌, 그럴 수도 있는 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일이야 직분 맡은 자들이 혹은 나보다 좀 여가 시간이 있는 사람들이 할 일이고, 우리는 보다 큰 일, 남들에게 더욱 내세울 수 있는 일을, 교회를 위하여 또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 모임과 회의와 큰 결정을 하면서 살았는데 이럴 수 있는가? 싶다….
오늘 성경은 우리를 다소 무안하게 한다. 우리가 소극적으로 하였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겼던 것을 재림의 때에 그것으로 판단한다고? 그래서 이번에 내란죄로 재판을 받는 이나 이를 지지하는 이들은 한 나라의 국정자로 그럴 수 있는 일로, 사람도 다친 게 아니고, 경고하려는 것이었을 뿐인데, 그와 같은 결정을 뭘 그리 대단한 중범죄로 다룬다는 것인가? 하고 연일 억울하고 분한 것과 같은 것이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 일은 사소하여 ‘하지 않으려’는 무사안일주의의 하나였을 뿐이다. 기름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이나 받은 달란트를 잘 보관하여 돌려주었을 뿐이고, 겨우 저 별 것 아닌 사람들을 소홀히 여겼다 해서 어찌 이런 결정을 내린단 말인가? 여기서 우린 두려움이 든다. 부작위(不作爲)의 죄가 얼마나 엄중하게 다스려지는지 두렵기까지 하다. 곧 미지근하였을 뿐이지 비어 있었던 게 아니었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게 있을 뿐이지, 열 처녀와 나란히 같이 시작했다. 그런데 겨우 차던지, 덥던지 하지 않았다고 해서? 겨우? 이 정도 일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5-16).”
이어서 오늘 시편의 간구가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선 이 시는 고라 자손의 시이다. 저희 조상 고라는 다단과 아비람과 함께 아론과 모세에 맞서다가 땅이 입을 벌려 죽임을 당했다.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민 16:1).” 여기서 주목한 게 ‘당을 짓고’ 한 것이다. 사람이 무리지어 뜻을 같이 할 때 이런 폐단이 온다. 우리는 스스로 순수하게 주의 이름으로 모일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이 아니다.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도 순수하게는 더 높이, 하나님께 닿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해도 무리지어 그 마음은 고조된 것도 그 때문이다. 고라는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2).” 하여 결과는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32-33).” 이 일을 교훈 삼아 그 후예들은 성전을 섬기며 더욱 주 앞에 겸손하여졌다. 이에 오늘도 고백하기를,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84:1-2, 10-11).
오늘도 말씀에서 세 가지 비유의 단면이랄 수 있는 대수롭지 않고 사소할 수 있는 일로 멸망당하는 이들을 보며,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5-7).
모두가 더 크고 넓은 길로 갈 때에, 주가 바라시는 한 가지,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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