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마 26:12-13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시 85:6-7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본격적인 수난이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야기의 진행이 상당히 빠르다. 긴박감을 더하고 위기감이 감돈다. 예수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에 관한 내용이 매우 상세하게 서술되고 있다. 앞에서와 같이 본문의 내용도 사복음서에 모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막 14장, 눅 22:1-62, 요 13:1-18:27). 본문은 각 단락에 대한 내용이 하나하나 그 이해와 묵상을 달리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여인의 향유 이야기에서 저가 받은 복이 얼마나 귀한가를 되새기게 된다.
우선은 가룟 유다의 변절을 암시하는 말씀이 나온다(1-5, 14-16). 그리고 뒤이어 베다니 나병환자인 시몬의 집에서 있었던 향유 이야기다(6-13). 이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하루 전 날 베다니에서 안식을 보내실 때에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내용을 수록한 까닭은 ‘예수의 죽음’과 그에 따른 준비에 대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이어 최후의 만찬이랄 수 있는 자리와 그 자리에서의 대화가 수록되었다(17-29).
곧 십자가 처형을 하루 앞두고 목요일 저녁 6시경… 이어서 베드로의 장담(31-35)과 예수께서 함께 감람산으로 떠나시는 이야기(30),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시는 내용(36-46)과 그날 밤 목요일 한밤중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파송한 무리들에 의해 체포당하시는 내용(47-56), 체포당한 후 산페드린 공회에 넘겨지고(57-68), 이후로 27장 26절까지 예수께서 심문 당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심문 과정 가운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69-75). 때는 금요일 새벽에 일어난 내용이다. 금요일 새벽에 속히 처리된 재판 과정을 거쳐 이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막 15:25),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34-37).
이처럼 급속히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한 여인의 이상 행동을 눈여겨본다. 다른 일들에 비해 매우 차분하고 조용하여 사사로운 듯 읽힌다. 앞서 예수께서 은 삼십에 팔릴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슥 11:12).” 이에 성취되어,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마 26:15).” 이에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에 또한 주목하게 한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27:9).”
이 일은 예수께서 함께 떡을 떼며 가장 가까이 지내던 자들 중 하나인 가룟 유다에게 배신당하는 사실과 대비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26, 48).” 이는 시편 41편 9절의 성취이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이 일은 예수님도 사람으로 입고 사는 동안 될 수 있으면 지나가기를 원했던 사실이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이사야도 예언한 바,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사 51:22).” 바로 이 ‘분노의 큰 잔’과 다름 아니다. 또한 산헤드린 공회에서 대제사장이 변명을 요구했을 때 예수께서 잠잠하신 것,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63).”
이와 같은 곤욕과 괴로움을 앞두고, 그 입을 열지 아니하고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잠잠하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더욱이 온갖 능욕을 당하실 것인데,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마 26:67).” 이 또한 성경에 이름과 같이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 곧 이러한 소란과 고통과 괴로움을 앞두고 한 여인의 조용한 향유 이야기는 매우 정적이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마 26:6-7).”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이 일은 그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사복음서 모두가 소개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막 14:3-9, 눅 7:37-39, 요 12:1-8). 그 중 요한복음의 경우는 이를 마치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집에서 일어난 것을 알려준다. 요한은 나사로의 가족들이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마태와 마가는 ‘베다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시간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으로 동일한 사건인 것 정도만 밝혀준다. 사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베다니에서 안식하실 때(21:1-11)인 유월절 엿새 전에(요 12:1)에 일어난 일이다. 다만 오늘 본문은 시간 순서를 의도하는 바, 이곳에 수록한 까닭이 있다.
곧 예수의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목요일과 금요일 사이의 요란하고 어수선하고 기습적이고 다급했던 상황 속에다가 이 이야기를 넣은 의도가 궁금하게 만든다. 이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의의를 마태는 놓치기 싫었던 것이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 26:12).” 누가복음에서는 사건, 장소, 시간, 인물 등의 차이 때문에 같은 사건으로 보기가 좀 애매하다. 시몬이라는 이름이 일치하는 것으로 동일한 사건으로 추측할 뿐이다. ‘나병환자 시몬’이라는 점에서도 예수님은 당대의 종교 의식에 개의치 않고 저의 집에 들어가 식사하였다는 것도 묵상의 깊이를 더한다. 추측하면 앞전에 시몬은 예수로부터 병 고침을 받았을 것이고, 그 답례로 이 같은 잔치를 마련한 것으로도 보인다. 따라서 나병환자 시몬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그에게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이름으로 불릴 때마다 예수의 은총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렸을 것이다.
종종 우리의 간증이 그러하듯 전에는 수치와 부끄러움일 수 있는 일이 이제는 주의 사랑을 증거 하는 데 증거가 되고 이를 증명하는 단서가 되곤 한다. 나 역시 혼자서 생각할 때나 누구에게 말할 때도 예전에는 노여움이었을 슬픔이나 부끄러웠을 일들이 더는 숨길 게 아니라 드러내어 주를 기리는 찬송이 됨을 느낀다. 곧 시인의 노래와 같이,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이처럼 나병환자 시몬은 나병환자라 붙는 이름 앞의 정관사를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곧 창녀, 세리, 소경, 손 마른 자 등 예수께서 함께 어울려 스스럼없이 지내셨던 이들이 전에 그 일로 주께 영광이 되는 것이었다. 이는 사도가 된 후에도 세리란 명칭으로 불린 오늘 복음서의 저자 마태의 경우와 같다.
여기서 또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무명의 한 여자이다. 물론 요한은 이를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로 놓고,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하여 이 여인이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의 동생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본문과 마가복음은 이 여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있다. 마태와 마가가 이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당시에 생존해 있던 마리아와 그녀의 가족들을 유대인의 핍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었나싶다. 그것이 아니면 여인을 은연중 경시하는 이스라엘의 문화를 반영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러 해석이나 의미가 분분한 가운데 분명한 것은 ‘매우 귀한 향유’를 가져다 예수께 부었다는 것이다. 마태는 그 향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말하지 않고 다만 ‘매우 귀한 것’이라 표현한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7).” 이와 평행 구절에서 마가는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막 14:3).” 하고 이 향유가 ‘나드향’이었다는 것으로 밝힌다. 나드향은 인도산 식물 나드의 뿌리 부위에서 얻어지는 휘발성이 강한 향이다. 매우 귀하고 값이 비싸서 주로 왕과 같은 자들에게 바쳐지는 물건이었다.
요한은 이 향유 한 옥합의 가격이 ‘300 데나리온’이나 되었다고 한다. ‘300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 한 사람이 일 년간 벌어야 하는 소득이다. 요한은 일부러 계산에 밝고 재물에 욕심이 많은 유다를 강조하기 위해 구체적인 액수를 밝혔다. 반면 마태는 여인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매우 귀한 것’으로 여인의 행위의 가치를 높이고 있을 뿐이다. 옥합은 매우 값비싼 기름이나 향을 넣어두기 위해 사용되는, 둥글고 목이 긴 모양의 병이다. 이를 예수께서 식사하시는 중에 그 머리에 부어 닦았다. 식사 도중에 그 잔치의 가장 귀한 분께 이 향유를 부음으로 그를 더욱 영화롭게 하는 것은 유대의 전통적인 관습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한편 요한은 이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고 한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곧 예수의 발에 기름을 부었다고 하나 이는 사실 기름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부어 몸 전체에 흐르도록 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을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그들 나름 바라본 시점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발이든, 머리이든 그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기름을 부은 대상이 예수이시고, 그와 같이 기름부음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쯤은 이제 우리가 다 안다.
이와 같이 향유를 붓는 것은 여러 의미를 가진다. 먼저는 거룩하게 하는 예식으로 향유를 붓는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창 28:18).” 또는 구별하여 제사장들의 의식적 성별에 사용되었다. “또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 거룩하게 하고(레 8:12).” 그리고 선지자로 세울 때 기름을 붓는다.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 19:16).” 물론 왕으로 세울 때도 기름을 붓는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삼상 10:1).” 뿐만 아니라 오늘처럼 손님을 환대하는 데도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
이를 예수님은 장례법에 따라 시신에 바른 것으로 의미를 두시고,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 26:12).” 이와 같이 요한도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 19:40).” 하고 설명하였다. 곧 이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장면은 위에서 열거한 머리에 기름을 붓는 예식 가운데 왕의 취임식을 시사하고,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그 모든 의미를 다 내포하고 있다.
오늘 예수의 기름부음 받음은 역설적으로도 다윗의 임명식의 모든 국면을 극적으로 뒤엎어 버린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기름부음을 받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루살렘과 그곳 ‘성전 밖’에 ‘한 평범한 가정, 오히려 나병환자의 집에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또한 예수의 즉위식은 왕이나 사제가 임명을 받을 때의 그 화려함과 축하가 아니라, 식탁에서 사제나 대제사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익명의 여인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더욱이 예수의 기름부음은 사람들의 갈채와 축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난을 받는다(8). 또한 그의 장례를 위한 준비 작업으로 받으셨다(12).
이를 두고 예수님은 ‘내게 좋은 일’이라 하신다.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0).” 이는 그저 ‘선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쁘게 받으실만한, <영원히 기억>’으로 인정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여인이 받은 축복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13).” 이에 오늘 나는 여러 상황과 그 의미가 더 깊은 여러 단락의 이야기 가운데 문득 이 여인의 행위와 결과에 주목한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이르시길,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오늘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셨다. 얼핏 들으면 사소한 일 같으나 이 이야기가 성경의 한 중심이 되고, 복음이 전하여질 때마다 이 여인의 행위와 사역이 전파되는 영광이 되게 하셨다. 곧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2).” 곧 우리가 이 땅을 사는 가장 확실한 목적이고 무엇보다 귀중한 사역이다.
어디에서든지, 온 세상에 복된 소식 곧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자의 행위도 전하여져 자자손손 기억될 것이라는 의미다. 요즘 매일 어머니와 통화할 때면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지난날을 이야기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맡았던 교회와 그때의 사람들과 사건과 그 일로 일어났던 하나님의 역사가 동시에 같이 들려지고는 한다. 곧 이러한 견해를 따라 ‘복음’이라는 것은 예수께서 증거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인데,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어디서든지 이 여인과 이 여인의 행위가 기억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누군가 내 이야기로, 나에게 일어난 일로 주를 찬송하고 찬송이 되게 하시는 역사가 복이 있음을 알게 한다. 그저 평범한, 그래서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은, 우리 생활의 사소한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이 증거가 되는 것이다.
곧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시 85:1-2).
이와 같은 일이 오늘 우리 삶에도 일어나서,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
…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4, 6-7).
오늘도 이를 찬송하면서 주 앞에 앉아,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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