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하현. 2026. 6. 29. 05:54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마 27:50-53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 86:11

 

 

십자가의 도는 부활로 완성되고 승천으로 꽃을 피운다. 그가 죽으심으로 성소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었다. 성소에는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휘장과 성소와 안뜰을 나누는 휘장이 각각 있었다. 여기서 휘장이 찢어진 것은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1년에 단 1회만 열고 들어갔다.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9:7-8).”

 

이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것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분명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담겨있다. 하나님의 임재 장소인 처소로, 지성소를 드리우고 있던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로 단절되었던 불완전한 교제의 흔적이라 하겠다. 이 휘장이 찢어짐은 대속 제물이신 예수의 찢겨진 육체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길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이로써 그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대속(代贖)의 죽음을 의지하고 담대히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혈통적 선민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옛 언약의 신비가 벗겨지는 동시에 구속의 온전한 성취를 이루었다. 이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하신 말씀이 응하여,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19-20).” 하심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9:6-8).” 하심에 대한 완성이 된다.

 

이에 ‘땅이 진동하여 비위가 터지고’ 하였다. 이것은 마태복음만의 독특한 표현이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짐과 동시에 땅이 무너진 것이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이에 백부장의 탄성이 옳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 27:54).” 이 모든 사건은 예수의 죽음 직후에 일어난 사실이다. 마태는 지진 그 자체를 성전의 휘장이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는 사건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과 영광을 보았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레와 지진과 큰 소리와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인즉 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 곧 아리엘과 그 요새를 쳐서 그를 곤고하게 하는 모든 자는 꿈 같이, 밤의 환상 같이 되리니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 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사 29:6-8).” 하신 것과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이방이 능히 당하지 못하느니라(렘 10:10).” 하심을 알고 이를 연결지은 것이다. 곧 이 지진과 바위의 갈라짐은 당신의 독생자의 죽으심으로 인한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시 18:7).

 

이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그들 위에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에 분토 같이 되었도다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느니라(사 5:25).” 하신 데 따른 현상으로 묘사하고 진술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을 믿음으로 수용하는 자에게는 새 언약과 새 창조의 하나님으로서 임재를 나태난다. 그러나 끝까지 불신하는 자에게는 진노와 영원한 심판의 주로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암시한다.

 

또한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이 구절 역시 마태복음만의 독특한 기록이다. 앞부분에서의 지진의 결과로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커다란 돌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을 마태는 관찰하였고 서술하였다. 이는 팔레스틴의 무덤들이 천연 동굴이나 바위를 쪼개어 만든 인공 동굴에 시체를 안치(安置)하고, 그 출구에 큰 돌을 굴려놓아 봉함으로 의식적 부정을 방지하고 야수에게서 시체가 도난당하지 않게 한 사실에 비춰 생각하면 단순한 상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에 지던 성도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수많은 의혹을 가지지만 실제적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다. 실로 이 사건은 메시야가 오실 때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이것이 실현된 것이다. 이것이 동시에 예수의 재림 때에 있을 모든 성도의 부활을 예증해주고 있다. 물론 본문의 이 사건은 53절에도 증언하는 바, 예수의 부활 이후에 일어난 것이다.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53).”

 

곧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강조하고자 했던 마태의 의도에 따라 기록된 것이다. 실제 성경에서 본 사건 이전에도 몇 번의 기사가 소개되었던 적이 있다.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왕하 4:32-35).” 이와 같이 복음서에서도 예수께서 죽었던 자를 여러 번 살리신 적이 있다.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마 9:23-25).”

 

또한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눅 7:14-16).” 심지어 무덤에 있던 죽었던 나사로도 살리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43-44).”

 

이 모두는 한결같이 자연적인 몸으로의 부활이었다. 부활 사건을 두고 여러 의문과 해설이 분분하겠으나,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3).” 하는 바울 사도의 설교와 같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현상은 얼마든지 일어날 것이다. 곧 예수 재림의 때에 모든 성도의 육체의 부활도 같이 있을 텐데, 어떤 죽음으로 어떻게 처리되었든지 본래에 이를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완성될 것을 믿는다. 이 믿음이 있은 후에 우리 가족은 부모님을 위시하여 모두 장기기증 이후에 시신기증도 이루어졌다. 곧 나의 아버지의 시신은 여전히 모 대학병원 안치실에 보관되어 사용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저마다 선입견과 막연한 전통을 따라 시신을 장례하겠으나 우리로서는 이 진리를 알고 더는 연연해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우린 발인과 화장 또는 토장을 생략하였다.

 

곧 우리의 이 부활 사건은 단지 육체의 죽었던 자들이 소생한 사건 이상의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의 부활이 다시 땅 위에 살게 하려는 것이기보다 예수의 부활과 그 능력을 중명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하려는 의도인 것을 안다. 곧 우리의 부활의 육신도 영화(榮華)의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 더 살며 연명하는 정도의 부활이 아니다. 이로써 가장 난해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 부분을 묵상하는 것은 죽었던 자의 몸이 무덤에서 일어나 예수 부활 후 무덤에서 나온 것은 첫째,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 승리가 성도들에게 가져다주는 생명력 넘치는 영향을 주목하게 한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의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8).” 하는 바울의 설교에서도 드러난다.

 

둘째, 예수께서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생생히 증거하기 위한 마태의 서술과 묘사이다. 이 또한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2-24).” 이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음부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곧,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엡 4:8-9).”

 

한편 본문의 ‘성도들’은 교회의 한 전설에 따라 구약 시대의 위인들(심지어 욥도 여기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4-5).” 그러므로 사실 우리는 그에 대한 확실한 자료도 지식도 없기 때문에 단정 지을 수 없지만 분명 구약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거나 중간기 시대에 영적인 영웅들로 성경의 순교자들이 분명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있다. 하여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보다 구체적으로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사 4:3-4).” 하심과 같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단 7:18).” 그리고 이 성도들을 더욱 확장하여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그 소망하는 바가 성취된 자들’이라 보는 것이 좋을 듯도 하다. 그렇게 저들은 ‘예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왔다.’ 실제의 무덤일수도, 무덤 같던 삶의 질고에서일수도… 우리가 이를 다 입증하거나 확실하게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인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부활’이란 예수께서 무덤에서 일어나 그들을 부활시켰음을 뜻할 수도 있고, 예수 자신이 부활 하신 것을 확장하여 묘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부활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으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2-24).”

 

이는 곧 영적으로는 물론 물질적으로 우리의 부활은 기정사실임을 확실히 보여준다. 예수께서 먼저 부활하신 후 그 부활의 영향력에 의거해서 저희가 무덤에서 일어난 것은 모두 사실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은 그렇게 성도의 부활 장면을 이 부분에 배치하여 서술하고 있는 것은 정확한 시간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이 가져다주는 생명력 넘치는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시간 순서 그 이상의 현상으로 이 표현을 앞당겨 왔던 것이다. 이어서 부활한 성도들은 거룩한 성 곧 예루살렘 실제 나타나서 활동하였다는 행적은 추적하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을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을 찾아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겔 37:12).”

 

여기서 나는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어떻게 당시 증명되어 나타났는지를 상상하다 우리 육신의 죽음 너머에 있을 부활의 산 증거로 이를 묵상한다. 곧 자주 듣는 것 가운데 죽음에 대한 두려운 마음과 그에 따른 의심과 갈등이다. 내 곁의 나이 드신 분들은 물론이고 젊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객기처럼 막연하게 여겨 대수롭지 않은 듯 삼는 경우를 자주 본다. 더러는 죽음이 우릴 두렵게 하는 것은 사실이고, 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모든 산 자의 필연적인 기초대사와 같은 것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부활신앙은 관념적인 이상이나 막연한 신앙으로가 아니라, 이를 능가하는 현실적인 과정이다. 모든 죽음이 슬픈 것은 단절 때문인데 이는 결국 일시적일 뿐이다. 나로서는 아버지의 죽음과 딸애의 결혼이 한 달 사이에 일어나서 그 의미도 새로웠다. 더욱이 어머니와 매일 통화하면서 거의 매번 아버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되풀이 되어 나오면서 오히려 죽음에 대한 실감이 무뎌졌다. 옅어진 감정은 힘없이 부서진다. 그런 가운데 나의 아버지가 걸어갔던 주의 길은 더욱 뚜렷하고 선명하게 드러난다.

 

오늘 본문의 여러 말씀 가운데 이 부분에서 묵상이 깊었던 것은 이런저런 이유로 나를 포함하여 찾아오는 이들이 모두 죽음을 두고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다 같은 스스로의 회개로 자살의 방식으로 죽음을 맞은 이도 있다. 다른 믿음의 사람들처럼 톱에 쓸리고, 불에 타서 죽는 순교의 죽음들도 있다. 나이 들어 병들고, 사고 나서 운명을 달리하는 죽음도 있다. 어떠하든지 주의 부활은 재림의 때에 모든 죽었던 육체들로 부활을 이루게 할 것이다. 더하여 어떤 육체는 영생으로의 영화로, 어떤 육체는 영벌로서의 영화로 그 길은 갈릴 것이다. 오늘 여기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과 부활이 한 눈에 들어오면서 정작 그 모든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급기야는 부활로 완성되어 승천으로 꽃을 피우며 곧 재림으로 이어질 것이다.

 

십자가란 성도에게 친숙하고 포괄적인 의미다. 모든 죄악에 따른 저주를 대신 대속(代贖)의 십자가이고,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죽기까지 낮아지심을 실천해 보인 겸비의 십자가이고,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하나님과 성도의 수직적 관계에서 성도간의 수평적 화해의 십자가이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18).” 자기를 부인하는 헌신의 십자가이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이로써 부활을 사모하며,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시 86:1, 4).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11).

 

이는,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