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현. 2026. 6. 30. 05:45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셀라)

시 87:1-3

 

 

앞서 성경의 여러 예언들은 거듭 이 수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예언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은 초대 교회 사도들의 메시지의 핵심이었다.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1-32).” 이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하여 우리의 신앙이 구축되게 하는 근원적인 토대가 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능멸하는 때에 제자들도 회의에 빠져 옛날로 돌아가고 몇몇은 모여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이때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1).”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식일이 다 지나가고 안식 후 첫 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으로 갔다. ‘이제 안식일이 완전히 지난 후에’ 그리한 것이다. 이는 다른 복음서와 일치되는 표현이다(막 16:1-2, 눅 24:1, 요 20:1). 저녁 해질 때(오후 6시경)를 기준으로 하루가 끝나고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으로 보면 깊은 밤을 다 지나고 있는 시점이었다. 곧 오늘 날로 말하면 주일의 문턱에 이미 들어선 때였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초대교회 신도들은 전통적으로 부활의 이 날을 기념했고, 점점 안식일이 아닌 주일예배로 발전했다.

 

길고 무거웠던 율법의 시대는 마감되고 부활의 주를 중심으로 하는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첫 날 미명(未明)에, 즉 안식일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을 기념하는 날이었고, 주일은 예수께서 이 세상을 다시금 새롭게 재 창조하신 날로 오늘 날 우리가 주일을 성수(聖守)하는 것이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곧 ‘안식 후 첫 날’이라는 표현은 안식일을 한 주간의 출발점으로 생각하던 유대인들의 전통적 개념에 따른 것이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주일 곧 일요일을 한 주일의 시발점으로 여기게 되었다. ‘미명’은 말 그대로 날이 새다, 밝아오다 하는 뜻이다. 그 의미는 하루 24시간이 시작되는 해질 때를 뜻하는데, 본문은 그러한 유대어법과 거리가 멀다. 이를 정확히 하기 위해 마가복음에서는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16:2).” 하고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다. 즉 해 돋는 때에, 저녁이 아닌, 깊은 밤도 아닌 아침 시각을 분명히 보여 주는 기록이다.

 

그때의 현상을 오늘 본문은 이어서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마 28:2).” 하고 이를 묘사하였다. 한때는 예수의 권세와 능력에 압도당해 예수를 받들며 추종하던 유대 군중들이었다.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4-26).” 이와 같은 열광이 남긴 것은 허무와 두려움뿐이었다. 그렇게 저들은 예수를 십자가의 극형에 처하도록 한 목소리로 외쳤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마 27:23).” 이렇듯 오히려 로마의 총독이 의아하여 되물을 정도였다.

 

더욱이 기세등등하여,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27-31).” 로마 총독이야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 해도 어떻게 유대인으로 구약의 말씀으로 메시야를 기다리며 예수를 지척에서 보고 듣고 느꼈으면서도 이럴 수 있는지… 우리의 한계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좋을 땐 간 쓸개 다 빼줄 듯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이 좋아하다, 금세 또 그 감정은 자신들의 유익을 따라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릴 적 여러 교회에서 목회하였던 부친으로 인해 나는 일찍 사람들의 이러한 속성을 직접 겪으면서 자랐다. 대부분이 처음에는 경계하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듯하다, 하나둘 틀어지면 모든 게 무너지는 것은 순간의 일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늘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배면에 깔려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매일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데, 어릴 때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교회에서 왜 그처럼 갑자기 떠나왔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나환자촌 교회로 처음에는 배척하다 어느 순간부터 부친에 대한 환대와 열광은 뜨거웠다. 일반교회와 청소년, 청년들의 교류를 늘리고 연합하여 수련회나 부흥회를 열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두 의견이 대립했지만 다음 세대를 위해서는 좋은 거였다. 그러다 택시와 아버지 차가 교통사고가 났고, 큰 피해는 없어서 서로가 합의하여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그런 걸 저들 특유의 시위와 막무가내로 보상을 요구하며 택시회사를 찾아갔고, 그 일의 주동자였던 몇몇이 보상금으로 받은 것을 서로 나눈 모양이었다. 결국 택시회사측은 고소를 했고, 그 일에 연류 된 당사자들은 나환자촌에서 쫓겨날 판이었다. 결국 부친이 그 모든 일을 뒤집어쓰고 일주일 만에 일을 무마하고 쫓겨나듯 인천으로 개척을 한 것이었다. 엊그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새삼 놀라웠고, 그때 한참 사춘기로 이해할 수 없는 이사와 전학으로 힘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렇듯 예수에 열광하던 저들 역시 한순간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원성과 함께 심지어는 조롱하고 업신여기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유대인은 외쳤고(23), 로마 군병들은 예수를 모욕과 희롱하였다(27-31). 심지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 마저, 저들은 유대인이었을 텐데 예수를 욕 하였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44).” 이 모든 모욕과 핍박보다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46).” 여기서 또한 예수께서 겪으셨을 고독과 소외를 생각하면 가히 절대적이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무죄하신 분으로, 주변을 휩싸고 있는 죄악의 어두움은 더욱 캄캄하게 느껴진다. 이에 본문에서는 예수를 흠모하며 당신의 고난을 안타까이 바라보는 자들에 관한 기록이 새삼 눈물겹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28:8-10).”

 

여기서 보면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5-7).” 이에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이를 알리려고 돌아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무덤에서의 사건과 천사의 메시지를 전해들을 때의 그 ‘혼합된 심리 상태’를 짐작하게 한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 16:8).” 이러한 놀람, 두려움의 감정은 오늘 본문에서 무서움과 큰 기쁨이라는 모순된 감정으로 대비되어 표현된다.

 

또한 천사의 임재를 위시한 초자연적인 사건 앞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고, 한편으로 예수의 부활 소식에 ‘큰 기쁨’을 느끼는 것 역시 놀라울 따름이다. 곧 이 모든 사건이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자각할 때, 두려움은 한없는 기쁨이 된다. 이 기쁨은 동시에 두렵기도 하다. 이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이 하나가 되면서 진정한 신앙의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겠다. 이 또한 가만히 돌아보며 나의 짧은 생애와 아버지의 사역 위에 겹쳐있는 시간들은 그 자체로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이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때의 잦은 전학과 터무니없는 가난으로 옥상에서의 가건물 생활과 나환자촌으로 이사와 같은 극단적인 환경의 변화는 어린나이에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자라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 변덕스러운 관계와 그때마다 억울하게 여겨졌던 어떤 상황과 사건들을 생각하면,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18-20).”

 

하시는 오늘 이 명령의 말씀이 오늘 날 우리 성도 모두의 지상명령인 것을 알게 된다. 곧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하심으로 예수께서는 이러한 권세로 가르치셨고,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7:29).” 병을 고치셨다(8:1-13). 죄인을 용서하셨고,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9:2).” 등등 이러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를 근거로 하여,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하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부활로 인해 십자가 사건 이전에 가졌던 권세와 비교할 수 없는 권세가 예수께 주어졌다는 것이 더욱 확실한 때이다.

 

이 말씀은 신적 권위가 있는 것이고,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24:35).”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시고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9:6).” 부활 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우주의 모든 권세가 있는 분으로서 ‘이 권세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속하지 않는다. 이를 바울은 후에 설교하면서,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7-28).”

 

즉 아버지의 모든 권세는 아들을 통해서만 행사된다. 예수는 중보자적 왕이신 하나님으로만 불려야 한다. 이러한 권세는 그분의 지극한 겸비에 대한 것으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

 

이처럼 바울의 설교에 오늘 본문의 역사적 배경과 의의가 모두 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가서’ 곧 오늘 우리에게 부여된 생활반경에서 ‘너희는 제자를 삼아’ 곧 ‘가서’, 능동적이며 지속적으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이는 그 어떤 차별도 없이 ‘모든 족속’으로 예수의 제자를 만들라는 것이다. 제자란 그리스도의 권세 있는 교훈으로 멍에를 메야 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9-30).” 곧 제자란 예수의 가르침, 성경을 듣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자들이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12:50).” 이것은 곧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하신 것을 명심해야 한다. 동성애니 이성애니 무슨 차별 따위에 연연하지 않음으로 모두가 죄인인 것으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시 87: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죄인인 것을 인정함으로 주 앞에 나아올 때, 곧 오직 예수만을 바라며 그의 이름으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셀라)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3, 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