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막 1:16-20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시 88:13
주의 길을 가는 것이란 이처럼 버리고 포기하고,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는 일이다. 더불어 잘 어울리고 사람들로 각광받는 주의 길이란 사뭇 이상하다. 온전히 주를 따름에 대해, 왜 예수님을 종으로 바라보며 이와 같이 본문을 시작하는지 묵상하게 된다. 각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구체적인 목적이 다소간 차이를 보인다. 마태는 왕으로서 구약의 예언을 기반으로 하여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나타낸다. 마가는 고통당한 종으로, 누가는 인류를 구원하는 구주 예수의 인성을 중점으로 다룬다.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로 그의 신성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처럼 왕, 종, 인간, 하나님의 아들로 그려지는 예수는 사자, 소, 인간, 독수리로 그려지기도 한다.
오늘 본문의 마가는 우선 그 문장이 간결하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예수의 족보로 시작하였는데, 누가복음은 격식을 갖춘 서문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1-4).”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기록으로 예수님을 위대한 교사, 예언의 성취자, 유대인의 왕, 메시아로 제시했다. 누가는 이방인의 관점에서 이방인을 위한 시점으로 복음을 기록했다. 그는 예수님을 인자와 구세주, 인류의 친구로 제시하고 있다. 구원의 보편성은 누가복음이 강조하는 주제이다. 심오한 사상가였던 요한의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말씀이요, 창조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을 위해 기록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행동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춰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이와 같은 선언은 마가가 본서를 기록할 때 죽음을 각오해야만 고백할 수 있었던 신앙고백이었다. 이 간단한 구절은 상투적 표현이 아니다. 철저한 목적의식 하에 마가가 자신의 복음서의 서론으로 자신의 책의 첫 머리에 배치시킨 것이다. 이 문구는 본문을 주도하고 전체내용으로 확산되었다.
연관되는 인물로 세례요한의 사역을 조명하며 마가는 사도행전 1장 21절에서도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곧 복음의 출발점이 ‘요한의 세례로부터’라는 표현에서 착안하여 세례요한에 관한 내용을 앞에 전면으로 배치하였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복음의 계시가 시작됨을 알리기 위한 의도적 표현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곧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복음의 주요 주제이다(1:11, 3:11, 5:7, 9:7, 12:6, 13:32, 14:36, 61, 15:39). 이 칭호는 본서의 서두와 마지막 부분을 장식한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15:39).” 그만큼 ‘하나님의 아들’이란, 마가가 구약의 신학적 배경과 당시 로마 문화의 배경을 절묘하게 융합시킨 표현으로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두 관점에서 동시적으로 고찰하게 한다.
먼저 구약에서 이 용어는, 보통 명사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천사적 존재’로 그려진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 6:1-4).”
특히 욥기에서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욥 1:6, 2:1).” 이것은 또는 선택된 백성 전체를 가리켰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신 14:1).”그리고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들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들 중에 아름다운 기업인 이 귀한 땅을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렘 3:19).”
또한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호 1:10, 11:1).” 이처럼 고유 명사로 사용되었을 경우 유일한 메시아의 칭호로 예수께서는 성삼위 중 제 2위가 되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시인은,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 2:7).
한편 로마인들은 위대한 인간이나 영웅을 보통 인간과는 다른 ‘신의 아들’이라 간주하였다. 따라서 이 용어는 유일신 메시아 사상이 정립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일단 무리 없이 예수를 소개할 수 있는 이중적 용어였고, 이를 마가는 의도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목적격으로 이해하기보다 주격으로 놓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것으로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마가가 의도하는 바는 수신자들인 로마의 성도들이다. 이 복음의 근원이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자 했는데, 실제 복음서 곳곳에는 그들이 복음의 역사적 근원에 대해 무심했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나타나 있다. 그러한 사실의 결론으로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임을 확증하려 한다. 이 이름은 예수의 사명의 요체를 밝히며, 인성을 강조하는 명칭으로,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 이미 천사가 마리아에게 일러준 것이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란 ‘기름붓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시아’가 연유되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 4:25).” 이는 분명 직접적 호칭이 아니라 그리스도적 성격을 지닌 그 분의 거룩한 직임을 강조한 것이다. 통상적으로 예수의 메시아성, 그분의 신성을 나타내는 예수의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복음>이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의미했으나, 점차 ‘좋은 소식’ 그 자체를 뜻을 좁혔다.
특히 신약에서 이 말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축약된다. 마가는 바로 이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새로운 문학 양식, 즉 ‘복음’이란 유형을 창안한 것이다. 따라서 마가가 쓴 복음서의 주 내용이 선포로 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런 사실에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선포’라는 바로 그 ‘복음’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복음서로 불리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의 사실은 복음의 근본이다. ‘시작’이 되고, 마가의 이 복된 메시지 속에 사도적인 선교가 지속됨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시작>이라함은 마가복음 제일 첫 말로 제시되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 하고 포문을 열었다. 여기 ‘시작’에 해당하는 의미는 창세기 1장 1절과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란 말과 비교해 볼 때, 우주를 창조한 바로 그분이 인간의 역사도 수행해 나가고 계심을 알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우주의 시작에 동참한 예수께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를 시작하신 것이다. 즉 ‘복음’이란 말과 이 ‘시작’이라는 말을 연결시킴으로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특별한 의미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곧 단순한 시작의 전개가 아닌 영적 차원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마가복음의 개요를 살펴보다 나는 본문으로 읽고, 머물게 되는 지점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나타는 저들의 태도였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16-20).”
우선 저들은 ‘갈릴리 해변’에 일하다 시몬과 안드레가 만났다. 갈릴리 바다는 보통의 담수호 중의 하나이나 성경에서 흔히 바다로 불리는 것은 다른 곳에서 ‘게네사렛 호수’(눅 5:1) 또는 ‘디베랴 바다’(요 6:1, 23, 21:1)로도 불린 것과 같다. 이 바다는 길이 약 20km, 너비 약 10km, 수면은 해발 -240m 정도이며, 가장 깊은 곳이 약 50m가량 된다고 한다. 이곳에는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어업이 번창했고, 이 바다 서쪽과 북쪽 해변에는 많은 읍과 어촌들이 밀집해 있었다. 그곳에서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처음으로 예수의 부르심을 받았다.
무심히 ‘지나가시다가’ 갈릴리 어부 출신 형제인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신 것처럼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것은 어부의 직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이 형제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기 시작한 것은 요단강에서 이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바로 이 메시아라고 가르쳐 준 세례 요한으로 말미암은 것이다(요 1:35-39). 세례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모세와 선지자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소개하였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따라서 두 형제는 그때부터 예수를 따라다녔으며 인격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인격적 관심의 결과는 그들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세우심을 받게 된 계기가 된다.
그런데 그들은 부르심에 응할 때 ‘그물 던지는 것’으로 눈길을 끈다. ‘그물’은 예수께서 비유 중에 흔히 거론하셨던 큰 그물, 즉 ‘예인망’이 아니라 손 그물, ‘투망’을 가리킨다. 마가는 안드레 형제의 모습을 매우 생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손 그물로 생업에 열중하고 있는 도중에 예수께서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고, 현장은 긴박감을 더하며 “나를 따라 오너라.” 하시는 말씀으로 꽉 채워진다. 곧 예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가 이때까지 살아왔던 그러한 방향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방향, ‘이리로’, ‘이 새로운 방향으로’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다. 또한 이 부르심은 <무엇이 되게 하리라> 하는 목적이 전제되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17).”
즉 예수의 부르심은 허황되고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부르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위대한 주역으로 그 역할을 맡기시리라는 약속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부름에 응답하기만 하면 그들은 복음 전파와 구원 사역의 위업을 맡게 될 것이었다. 사실 이 부분은 주의 종으로 목회자로 사는 자들마다 각각의 특색이 다 있다. 누구는 죽을 지경에서, 누구는 실패로 더는 회생의 기회가 없을 때도 있었지만 누구는 묵묵히 성실하고 맡은 바 자신의 일에 충성할 때도 있었다. 이때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표현하는 주님의 부르심은 부름 받은 그들을 위한 것이기 보다 오히려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부르심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신 것은 사람들을 임박한 심판으로부터 구해내야 하는 긴급한 임무를 맡기시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저마다 제 코가 석 자일 때 말이다.
그런 가운데서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았다는 것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공통점이다. 내가 아는 한 그러하다. 나 역시 당시 가장 가까이 의지하고 좋아했던 선생은 극구 만류하며 심지어는 나에게 ‘현실도피주의자’라고 했다. 당장 모면한 현실을 외면하려 종교인이 되려 한다고 했다. 그것으로 한동안 회의하고 갈등했던 것 같다. 모두가 생의 한복판에서 절박하게 살아 있을 때, 이 표현,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심은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요구다. 저마다 자기 연명도 어려운 처지였다. 누구는 심지어 죽으려고까지 했다. 그만큼 절박하고 긴박한 상황에서 ‘종말론적인 사고’로의 전환이 계기가 되었다. 과거의 모든 삶을 청산하고 주님을 따라 나섰던 이들의 공통분모가 바로 이 종말이다. 어쩌면 생의 끝자락에서 생의 시작을 보게 하시는 것이다.
이에 ‘그물’은 배와 더불어 그들의 생존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다. 이에 ‘부르시니, 따랐다.’ 그동안 의지하고, 업으로 삼고 살았던 생의 터전을 ‘버려두고’ 말이다. 곧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기 위해 ‘떠남의 결단’이 먼저 요구된다. 아브라함도 그러했듯이(창 12:1-3), 이와 같은 떠남을 통해 하나님의 더 크신 풍성한 은혜를 만날 수 있었다.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그렇듯 생을 포기하고 도피하고 비겁하게 비춰질 수 있는 결단이다. 심지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은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20).” 이 어찌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순종인가?
나 역시 이렇듯 불가항력적인 순종으로 붙들렸다. 몇 번을 거절하고 주저하자, 공황에, 파업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몸의 통증으로, 억지로, 울면서, 안 하면 안 되는가? 하는데도 끌려갔던 것 같다. 곧 우리의 은혜란 이처럼 불가항력적이다. 오늘 특히 이 부분에서 묵상을 더하다,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시 88:1-2).
오늘도 기도로 시편을 되새긴다. 실제 주를 따르다,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7-9).
모르겠다, 오늘의 나는 분명 그러하다. 한데,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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