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현. 2026. 7. 2. 05:43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막 2:9-12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시 89:5

 

 

예수의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이에 따른 단편적인 이야기와 그 주제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다. 여기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먼저 ‘종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핍박’이 서서히 굳혀져가고 있다. 이 내용은 그 흐름상 2장 1절에서부터 3장 6절을 한 단위로 묶는다. 이는 그 수록된 다섯 가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예수를 향한 ‘대적들’ 간의 대립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죄 사함에 대한 논쟁(2:1-12), 죄인과 세리와 함께 앉으신 것에 대한 논쟁(13-17), 금식에 따른 논쟁(18-22), 안식일의 주인에 관한 논쟁(23-28), 안식일에 병고침에 대한 논쟁(3:1-6) 등.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3:6).” 이렇듯 반대급부의 배척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방의 갈릴리를 중심으로,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사 9:1).” 예수님의 사역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기존 종교 세력과의 마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예수의 명성이 높아짐으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을 침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사로잡혀 갔다. 이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막 15:9-10).”

 

게다가 오늘 본문에서 드러나듯이 예수님은 유대교의 외식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신앙의 폐단을 은연중에 절책하셨다. 이에 그들의 반감과 적의가 서서히 불타올랐던 것이다. 예수께 대한 대적들의 비난이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는 것을 알게 한다. 처음에는 대적들이 단지 ‘마음속으로’ 의논하였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6).” 그러다 점점 ‘예수의 제자들’에게 비난을 늘어놓았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

 

그것이 마침내 예수께 직접 비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18, 24).” 이러한 대적들의 훼방과 비난 이면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장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음흉한 궤계가 숨어 있었다.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4:15).”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한 서신에서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0-11).” 또한 베드로 사도 역시 설교에서 이를 경계하였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이는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직전에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했던 바로 그 사탄의 역사이다.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막 1:13).” 물론 이 모든 일의 섭리는 하나님으로 인함이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12).” 이렇듯 집요하게 방해하고 훼방하고 공격하는 것을 토대로 본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는 예수님의 ‘종의 사명’을 암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멸시 당했던 세리 마태를 불러 장차 열두 제자들 중 한 사람으로 세우셨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비천한 자들과 더불어 식사하셨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2:14-15).”

 

이는 죄인을 회개시켜 천국 백성이 되도록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면서 동시에 우리 교회가 담당해야 하는 일이다. 서로가 친하게 잘 지내며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게 목표가 아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건네는 사실은 이러한 ‘죄 사함의 진리’를 선포하고 확장하여 드러내는 일이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5)” 이는 매우 파격적이며 놀라운 일이다. 앞서 그 누구도 죄 사함의 권세를 받은 바 없다. 그러나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스스로 종이 되셨으며 마침내 당신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 마가는 정확하게 짚어서 말씀 중에 기록하였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20).” 곧 예수께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리라는 사실이 은연중에 예고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들 가운데 병 고침과 죄 사함의 간극과 동일함을 살피게 된다. 분명 예수께서는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에 대해 논쟁하자 예수께서 이르시길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하고 되물으신다. 그런 뒤 확실하게 전파하시기를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심이 의도였다. 이를 밝혀 설명하신 후에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하는 말씀을 다시 되뇌게 된다(9-12).

 

분명 상황 속에 숨겨진 의도가 있다. 병 고침과 죄 사함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하고 물으실 때, 나 역시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죽음이나 병듦은 모두 죄의 결과로 인함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의 생각을 아시고 있었다.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과 병마를 치유하는 이적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하는 질문으로 던지셨다. 물론 어느 것도 쉽다고 답할 수 없다. 사람에게 두 가지 모두 똑같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똑같이 쉬운 일이다. 아마도 서기관들에게는 누구도 죄 사함의 성취를 입증할 수 없으므로 죄 사함에 관한 말이 더 쉽게 여겨졌을 것이다. 흔히 우리도 죄를 용서 받는 일은 관념적으로 들리고, 병 고침을 받는 일은 실제의 현상으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 더 어렵게 생각된다.

 

이를 아시고 예수님은 허를 찌르듯 이 사역의 의미를 밝히셨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10).” 앞서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제시한 선택적 질문에 어느 한 쪽도 무책임하게 답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어느 쪽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 말씀을 하실 수 있었다. 사실 예수께서는 먼저 인간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더 어려운 편을 들어 우리들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죄 사함을 앞에 놓으셨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제 사람들이 그가 실제 죄를 사하는 권위와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치유의 기적으로 행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심판의 날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여기서 죄를 사하는 권리와 권능을 갖고 계심을 보이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사하심으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11).”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면서 즐겨 사용하신 표현이 ‘인자’라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메시야적 명칭이자, 타인으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는 인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말이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눅 5:24).” 즉 인자란 인간으로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겸손한 예수의 모습은 물론,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거룩한 권위와 관련이 있다. 이 용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복음서에서 마가가 즐겨 사용한 메시야의 칭호이다.

 

이 ‘인자’라는 개념은 주로 심판주로서 메시야란 의미와 더불어 이 세상의 죄인을 지금 용납하시고, 그 죄를 지금 사유(赦宥)하시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으로서의 메시야를 뜻한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8).” 하심 같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14:62).” 즉 인자는 심판의 시점까지 기다리시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직권으로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다. 하여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비록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여러 질병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다. 이는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죄 자체로 일어나는 결과이다.

 

아흔이 넘은 연로하신 장모와 늙으신 모친을 보면서도 그렇지만 이제 나이 환갑이 되면서 보니까 모두가 실은 여러 병마(病魔)를 안고 살아야 했다. 젊을 때는 회복도 빠르고 별로 큰 어려움이 없이 이와 같은 현실이 와 닿지 않았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은 물론 주변에는 항상 병마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에 따른 소요와 갈등과 고통은 끝이 없다. 별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아이는 외국여행에서 산 선글라스안경을 가지고 몇 주째 시름이다. 이걸 왜 일반 안경으로 개조하고 싶은 것인지, 그러는데 드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그럴 수 있는 형태의 것도 아니다. 하나로 붙은 것이라 렌즈만 도려낼 수도 없다. 굳이 왜 그래야 하나 싶은데, 어제도 성경공부 오면서 서너 군데 안경점에 들러서 그런 사실을 묻고 어찌 방법이 없는가, 하고 찾았던가보다. 그리고는 예민하게 굴었다. 스스로도 ‘아픈 아이’라고 하니 뭐라 한다고 될 일이 아니고….

 

내 곁의 육체적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이들도 많지만 이와 같이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도 많다. 말 그대로 병마(病魔)다. 병(病)은 말 그대로 아프고 힘든 질병이다. 거기에 귀신 마(魔)가 붙었다. 곧 병을 일으키는 마귀라 할 것이다. 마귀 마(魔)를 붙인 것은 그 의미가 새롭다. 집으로 오는 아이 같은 경우도 지능이 떨어지고 성격은 강박적이다. 엊그제도 학교에서 부모 호출이 있었던 모양이다. 수업에 지장이 있을 정도이니 어떤 조치를 부모에게 요구하는 내용의 권유였다. 단지 주의를 주고 말 성질이 아니다. 그런데 그 부모도 이제 나이가 많은 탓에 늦둥이로 본 아이를 두고 자주 싸우는 모양이다. 형이 있는데 재혼하며 데려온 성인인 아들이다. 엊그제 저가 동생을 때렸던 모양이다. 본인은 서른이 다 된 상태로 게임에 빠져 두문불출 사회활동을 끊은지 오래다.

 

이러한 현상은 죄의 결과이고 이를 함축하는 병마로 ‘중풍병자’를 생각하게 된다. 스스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죄의 속성이 그렇다. 중독 같아서 스스로도 문제의식은 있다. 아이가 스스로를 ‘아픈 아이’라고 하면서 이를 방어기제로 사용하면서 스스로를 정당화할 정도로 영악하다. 집으로 오는 아이도 이를 알면서부터 스스로 자포자기하듯 방치하며 점점 나이가 든다. 소위 정상이라고 하면서 버젓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며 사는 사람들도 다를 게 없다. 저마다 자기 확신으로 굳어져 마비가 된 중풍병자들 같다. 이에 오늘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곧 서기관들이 아니라 중풍병자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한다. 먼저는 그를 들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고 직접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하신 말씀이,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5).”

 

먼저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기적은 믿음으로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현명함과 열심이 바로 그 있는 믿음에서 나온 것을 보셨다. 그런데 여기서 ‘저희’란 단지 침구를 메고 온 네 명의 동료만이 아니라, 중풍병자까지를 포함한 다섯 명을 함께 지칭한다. 이 사건을 통해 중풍병자의 믿음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그들의 권유에 저가 응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중요하다. 열에 아홉은 그 당사자가 싫다고 해서 손도 못 쓴다. 어느 모친이 아이 일로 호소했다. 나는 저를 보고자 했다. 아이는 결국 오지 않았다. 그런 식이라, 당사자가 직접 와서 자신의 문제를 주변 이야기처럼 할 때 저 자신의 일로 직면하게 하려 하면 또 열에 아홉은 그만 온다. 그러니 오늘 이 중풍병자의 동의가 곧 믿음의 하나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그 환자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허락하셨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환자가 필요로 했던 바가 죄의 용서가 아니라 중풍병의 치료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근본적인 문제를 먼저 건드리고, 그 결과 ‘어떤 특별한 죄’, 사실 모든 죄는 특별하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사실에서 모든 죄가 그러하다. 고통은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떠남으로 기인되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1-2).” 하여 오늘 본문은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를 죄의 인식에서 출발하게 한다. 병 고침은 한시적인 것이지만 영혼의 죄 사함은 영원하다. 육신의 질병이 직접적인 죄의 결과는 아니라도, 죄의 결과로 병과 죽음이 시작되었다.

 

나의 육신과 정신의 고통이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간절하게 바라고 의지하게 하는 것이 그리하여 복이다. 바울도 이를 알았고,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는 놀라운 승화의 자리로 나아갔던 것이다. 어디가 아플 때, 힘들어서 안정제를 찾아야 할 때, 나는 그것으로 주 앞에 나온다. 이른 새벽 무거운 몸을 이끌고 교회로 오는 원동력도 나의 병마(病魔)가 주는 역설이다. 하여 오늘도,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셀라)

(시 89:1-4).

 

하여 우리를 창조하셨고, 찬양 받으시길 원하심으로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이 들리우셨나이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13-14).

 

그리하여,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5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