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막 3:28-30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시 90:3-4
이쯤 나이가 들고 보니까 모든 시절이 꿈만 같다. 이를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하는 시인의 고백이 이것일까? 그 시절, 사람들이 예수를 알지 못하고 심지어는 미쳤다, 하는 것과 같이 오늘에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더욱이 AI시대라 하여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날을 꿈꾸는 세상이라, 이와 같은 말씀은 케케묵은 옛 이야기가 같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이 안이하게 변해간다. 누구와 대화하다 핸드폰 AI에 성경을 묻고 그에 따른 설명으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게 낯설지만은 않았다. 하긴 설교 한 편, 논문 한 권이 뚝딱, 하고 생성되는 시절이라 자칫, 저마다의 신앙도 AI를 의지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오늘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되고 초기부터 큰 권능으로 병자들을 고치신 사건들이 기록되었다. 이에 예수의 소문을 들은 자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이런 단편적 기사들은 같은 시기에 한꺼번에 그리고 연속적으로 일어났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일련의 연속된 기사들로 배열한 데에는 마가의 독특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본문에서 마가는 부각하고자 하는 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예수에 대한 핍박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서로 간 대립구도가 형성된다. 하여 ‘이방의 갈릴리’를 중심으로 하는 예수의 사역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기존 종교 세력과의 마찰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는 날이 갈수록 예수의 명성이 사람들 사이에서 드높아져 갔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은 정치적, 종교적 위협을 느끼고 조바심에 사로잡혀 갔다. 또한 저들의 외식주의와 형식주의가 신앙의 폐단이라는 데서 은연중에 예수에 대한 반감과 적의가 불타올랐던 것이겠다. 본문은 이에 예수께 대한 비난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가족들마저 예수가 미쳤다 하는 소리에 찾아 나서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30).”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28-30).”
여기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심은 예수께서 당신의 진실하신 품성과 약속을 보증으로 말씀하시는 공식적인 언어로, ‘아멘-진실로-’ 하고 시작하시는 중차대한 메시지를 전하실 때 특징적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이를 찾아보니 마태복음에서 31회, 누가복음에서 6회, ‘요한복음 25회’ 마가복음에서 13회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그만큼 비중있고 중요한 말씀이란 것을 알게 된다. 곧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여기서 ‘사람의 모든 죄’와 ‘성령을 훼방하는 죄’ 엄연하게 구분하셨다. ‘사람’은 ‘사람의 아들들’이란 의미로 ‘인자(人子)’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모든 죄’는 문자적으로 ‘모든 죄악 된 행위’를 뜻하나 사람으로서 ‘그럴 수 있는 일’을 구별하게 한다. 그런데 ‘훼방’은 ‘모든 죄’의 한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서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상대방의 일에 적극적인 장애를 초래하는 의도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는 바로 이 같이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개개의 죄악조차 궁극적으로는 용서가 가능하다고 하시는 것이다. 곧 ‘사하심을 얻되’라는 말이 미래의 시상임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으로 예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과 또 ‘모든 죄를 사하시는 능력’을 지니고 인류의 구원을 위한 구속자로 오셨다. 그러므로 본인의 사역과 죄의 상관관계로 그 용서의 범위를 무한대로 확장하셨다. 곧 이를 바울은 측량기법의 언어를 사용하여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하고 그 모든 용서의 범주에서 측량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사랑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였다. 다시 말해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는 없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에 해당함으로, 용서가 불가능한 범주의 죄에 대해 오늘 말씀은 단정적으로 정의한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29).” 사실 이 부분은 매우 난해하고 어지럽다. 어떤 죄를 의미하는지 생각을 더하게 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통해 ‘인간의 모든 죄는 예수의 십자가 아래 용서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럼에도 본문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영원히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모든 죄가 무조건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회개해야만 구원을 얻는 것이란 사실을 근본적으로 붙들어야 하겠다. 그런 가운데 성령을 훼방하는, 모독하는 것은 결국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으로 의도적이고 자기인식으로 거절하는 것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겠다. 그 또한 자유의지로 자신이 선택하는 길일 테니까 말이다. 또한 성부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자는 구속 사업을 실천하시고, 성령은 이를 성도들에게 적용하셨다. 따라서 인간은 ‘성령의 감동 감화’를 통해 구원을 받는 데 있어, 이를 부인하면 ‘회개’를 통한 구원의 길이 영원히 막히게 된다는 것은 본인이 그리 굳게 닫아버린 결과이다.
즉 ‘인자’는 모르고 부인할 수 있을지라도 성령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은 고의적인 일이고 또 회개를 거부하는 일이어서 더는 강제할 수 없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사 63:10).” 구약의 시절에도 더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있었다. 문득 드는 생각이 나 역시 주를 멀리하고 거부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더 즐겨하며 죄에 빠져 살면서도 주께 구하였다. 갈 데까지 다서 결국은 자살 충동으로 끝장을 보려 했을 때도 나도 모르게 주님, 살려주세요! 하는 외침과 함께 용서해주세요! 하는,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는 도움을 청하는 외마디 외침이 있었다. 억지로 돌이켜 붙들려 와서 신대원을 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것 같지만 그러는 동안에 나의 기저 배면에는 주의 뜻을 알고자 하는, 바라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곧 회개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내면의 항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 결정적 순간에도 주를 속이려 하여,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하심인데,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 곧 우리 안에 알 수 없는 어떤 의지, 구애하는 마음, 호소, 인정, 받아들임에 대하여,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하신 데 그 의미가 분명히 나타난다.
이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잔치에 초대 받고 거절하였던 사람들이 아닐까?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 14:18-20).” 이는 결국 다 자기 의지로 내린 결정일 텐데, 그럴만한 사정과 이유가 있었다고 하나 이 의지의 동인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심지어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6-27).”
그러므로 자기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였는지에 대해 매우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두려움은 그 안에 두려운 대상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정작 부인하는 자들은 두려워할 수도 없다. 천국을 사모하지 않는 자는 지옥도 그리 무서울 게 없다. 죄의 일시적 경향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속적이고 고의적인 행위로 발생하는 일종의 고질적이고 뿌리 깊은 영혼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그야말로 씨알도 안 먹히는 사람이 있다. 뭐라 한들 싸움만 나고 오히려 적대감이 커질 뿐이다. 저들에 대하여는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막 6:11).” 미련을 둔다고 해결될 게 아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눅 9:5).” 여기서 성령의 역할이 거부당한 것을 알 게 된다. 그럼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10:11).” 곧 그들 스스로가 마음의 완악함과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그분의 은혜를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는 달리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누가 이를 빙자하여 보이스피싱 같이 전화로 사정을 구한다. 안타까운 마음이라, 우리의 형편도 설명하려 들면 대뜸 전화를 끊어버린다. 어제도 자신이 무슨 사고로 더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교회도 못 간다는 말에 우리 교회 사정을 알리고 다른 좀 큰 교회를 연결하고자 했더니 듣지도 않고 끊어버렸다. 그야말로 별의 별 사람들이 다 같이 살아간다.
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가 분명 있다.’ 하는 의미는 오히려 위로가 된다. 죄로 인해 마음의 가책을 받는 자들은 결코 그 같은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 안의 뉘우침과 용서를 구하며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마음이 같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같은 죄를 범해도 완악한 심령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굳이 용서받을 생각이 없다. 스스로를 죄인이라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으로 합리화하며, 다들 또 그러고 사는 것이라며 안이하고 대수롭지 않게 치부한다. 이 모두가 성령을 모독하는 사실이다. 그 안에 양심을 두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라도 그 양심은 작동하게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그것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20).”
그러므로 찔림이 없다는 말은 용서의 여지가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더러는 예수를 두고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하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막 3:26).” 하여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하여 진술하시고,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30).” 여기 서기관들의 말 자체가 위에 언급한 영영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성경은 어떤 범죄라 할지라도 회개가 있고, 돌이킴이 있을 때 분명 하나님의 용서가 따를 것임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의 교훈과 사탄의 왕국이 같다고 하는 이해다. 더러 우리의 신앙이나 무속, 토속적인 미신과 우상숭배를 하나로 보는 이들에 대해 그 인식의 중대한 오류를 판단하게 한다.
즉 말씀을 듣고 오히려 고의적이고 악의적으로 성령의 능력에 대해 모독(冒瀆)하는 것이 곧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예수는 편견 없는 사람으로 누구나 선한 일이라 인정할 수 있는 일들을 행하셨다. 그래서 안 믿는 자들도 예수의 삶에 대하여는 의롭다, 선하다, 하고 그 행위로만 평가한다. 여기에 성령의 역사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의 성품으로 접근하는 것에 대하여는 극도로 경계하는 ‘무교주의’라 하는 사람들의 불행이 여기에 있다. 심지어는 ‘유대주의 자’들도 예수의 신성을 모독하였고, 거부하였다. 하나님의 아들로, 성자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를 거절하였다. 분명 예수님은 사람들을 악의 세력과 속박에서 자유롭게 해주셨다. 예수께서는 그 일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신 것을 분명히 하셨다.
이때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를 부르려고 왔다. 저가 귀신 들렸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마가는 앞의 내용과 연결하여 예수님의 가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까지 오는데 시간이 걸렸다. 가족들이 예수께 도착하였으나 그들은 그가 계신 곳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 대신에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들을 시켜 그를 찾았다. 특히 형제들과 그 모친이 언급되어 있으나, 아버지 요셉은 언급되지 않은 점이 이채롭다. 아마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에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또는 형제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3-35).”
예수님은 비록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시한 가족들이 당신을 혈연으로 찾았으나, 하늘의 영적 관계성으로 대답하셨다. 이를 문맥적으로 보면 반인륜적인 처사로 여겨지지만 사실 초인륜적(超人倫的)인 처사라 하겠다. 곧 예수님은 우리 성도의 가족관을 새로 정립하셨다. “둘러보시며,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하심은 예수께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을 내밀한 감격의 음성으로 ‘내 모친과 동생들’로 삼으셨다. 이들을 지칭한 것은 ‘예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들로’ 예수와 함께 있는 자가 형제요, 가족이다. 즉 공개적으로 육친적관계(肉親的關係) 이상의 결속을 영적 가족으로 규정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모두가 예수와 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륜적인 어머니나 형제들을 저버린 게 아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 그것으로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 하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이는 상대적으로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과 대비하는 상대로, 예수와 함께 있는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눅 8:21).” 하시는 것이다. 오늘도 이와 같은 말씀을 되새김질하면서,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 90:1-2).
하는 고백이 나의 것이 되는 것으로 감사한다. 그리하여,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4).
이 빠른 광음 같은 세월에서 잠시 또 멈추어 서서,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9-10).
이와 같은 인생무상 가운데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2).
곧,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14, 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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