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막 4:33-34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시 91:1-3
말씀은 모두의 것이나 아무나 들을 것은 아니다. 분명 오늘 말씀에서 ‘들을 귀 있는 자가 들으라’고 하셨다. 설마 우리 신체의 귀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겠나? 오늘 본문은 유난히 마가의 현장감 넘치는 문장이 돋보인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1).” ‘다시’ 가르치신다고 시작한다. 그 행위를 반복한다는 뜻이다. 이어서 나오는 ‘바닷가’는 처음 설교하시는 곳은 아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2:23).” 또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3:7).” 하고 소개하였다.
바다로, 산으로 가르침은 이어져 ‘다시’ 가르치신다. 그때마다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곧 셀 수 없이 많은 숫자의 무리들이라는 표현이다. 당시 혼잡했을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이에 혼잡을 피하려고 예수께서는 밀려드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고 배에 오르셨다. 이러한 묘사는 예수의 말씀의 권위와 영적 영향력이 대단했음을 암시한다. 생명과 진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흡입력이 있다.
그렇게 예수님은 ‘바다에 떠 앉으시고’ 말씀을 전하셨다.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신 것으로, 조그마한 배다.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3:9).” 이 위에 올라 거기에 앉으시고 해변가에 모인 무리들을 보시면서 강론하셨다. 그렇게 ‘예수께서 가르치시니’ 이는 여러 비유로 말씀하시었다. 여기서 ‘비유’를 통해 가르쳤음을 분명히 강조한다. 즉 이 가르침은 주로 직설적인 표현이 아니라 우회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진리를 제시하는 비유적 방법을 사용하셨다. 마태복음 13장에서 7개의 비유가 사용되었지만 본장에서는 ‘등불의 비유’ (21, 눅 8:16)와 ‘자라는 씨앗의 비유’(26- 29)가 더 설명되어 9개의 비유가 담겨 있다.
마가는 본문 후반부에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하며 이 비유로 말씀하신 뜻을 주목하게 한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34).” 앞서 ‘비유로,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설명하셨다.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33).” 왜 이러한 많은 비유로 하셨을까? 비유들은 예수께서 무리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치실 때, 예수께서 자신의 인격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실 때 주로 사용하신 방법이다. 가장 탁월한 교수법이었다. 비유란 그 의미를 보다 명확히 전달하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을 확장한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비유로 말씀하심으로 무리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그 비유로 감추어진 의미를 따로 제자들에게만 설명하셨다.
즉 비유란 일상의 단면을 예로 들어 ‘전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를 쉽게 납득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을 듣는 자들의 사고를 자극하고 영적인 각성과 지각을 일깨워주는 은혜로운 전달 수단이다. 진리를 알고자 할 때 그 시야가 확장돼야 한다. 의미 없는 일상은 없다. 모든 사람의 이야기 안에 하나님의 뜻이 감추어져 있다. 나는 이를 자주 목격하고 그리 설명한다. 내 이야기가 단지 내 이야기가 아닌 것도 그 이야기 속에 우리의 이야기가 있고, 우리 이야기가 곧 내 이야기와 함께 하나님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때 비유는 듣는 이의 입장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이해해야 하는 차등이 있다. 곧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경우는 그저 애매한 이야기일 뿐이다. 즉 듣는 이의 영적 감지력과 진리에 대한 이해력 여부에 따라 누구는 쉽고 더 넓게 확장하고 누구에게는 어렵게 여겨지고 난해할 뿐이다.
이를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리하셨다. 본문에서 이 또한 밝히고 있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10-11).” 일부러 그러신다는 것인데,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12).” 여기에 그 의도가 있었다. 보면 이와 같은 설명을 ‘홀로 계실 때’ 제자들이 물었고, 이에 설명하신다. 이 표현은 마태와 누가도 설명하지 않은 대목이다. 즉 마가는 본절의 상황을 설명하는 의도가 있었다. 즉 비유를 가르치기 시작할 때는 사람이 너무 많아 배 위로 올라가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께서 ‘홀로 있음’을 주목하게 한다. 바로 이때가 핵심이다. 비유를 통한 설교를 마친 후 군중들이 자리를 떠난 뒤 장소는 같은, 배 위가 틀림없다.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36).” 곧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들로 더불어 비유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그런데 미태와 누가는 ‘제자들’이라 언급하여(마 13:10, 눅 8:9) 다소 의미가 차이가 있다. 곧 이 진리를 탐구하는 데 대한 제자들의 열의를 은연중에 나타내주는 동시에 제자들이 자신들의 영적 무지를 타인에게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소극적 일면도 느껴진다. 이와 달리 마가는 제자들의 수가 12명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그 외에 비유를 들었던 ‘다른 사람들’도 함께 남아 있었다고 한다! 저들이 이 비유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이 편협하게 12제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해 주고,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진리가 무슨 ‘밀의 종교’에서 볼 수 있는 폐쇄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넌지시 드러내기도 한다. 어쨌든 제자들이 아닌 다른 누군가, 다른 사람들 중에 이 뜻을 물었다. 여기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끝난 후에 이 질문을 하고 있지만 ‘비유들’이라 하는 것으로 보아 다른 여러 비유를 동시에 묻고 있는 것이라 짐작이 된다. 곧 이 질문의 내용에 있어 마태복음에서는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 묻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는 ‘비유의 뜻’을 묻고 있다는 차이도 알 수 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0).” 여기서 ‘어찌하여’ 하는 것은 그 이유를 묻는 것이다. 그러자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11).” 예수께서 그냥 그렇게 하신 게 아니라, 허락된 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인 것을 밝히셨다. 누가는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눅 8:9).” 분명 뜻을 물었고,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0).” 하고 대답하셨다. 그런 가운데 오늘 마가복음에서 마가는 이 둘을 합하여 묻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막 4:10).”
이 미묘한 차이에서 서로의 시점과 관심이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여하튼 이것은 제자뿐만 아니라 다른 청중까지 모두 비유를 통한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 한 가지는 마태의 기록에서 보듯이 ‘제자들이’ 비유로 가르친 것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본격적으로 비유만을 통한 진리 교육이 예수께서 이제까지 가르쳐왔던 방법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설교였기 때문에 생소하게 다가왔음을 알게 한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의 의도가 있었다는 것도 말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하고 따로 구별하심을 강조한다. 이 ‘비밀’은 복음서에서 바로 여기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구에서만 사용된 말이다(마 13:11, 눅 8:10). 이에 비해 바울서신에서는 무려 21번이나 나타나며, 계시록에도 4번 쓰였다(계 1:20, 10:7, 17:5, 7). 이 말은 ‘전수받은 자’란 뜻을 가진 헬라어에서 유래하는 의미로 ‘폐쇄시키다’라는 뜻을 가진다.
곧 ‘알려지고 전수되는 것이 폐쇄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말씀은 모두가 들을 수 있으나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안다고 해도 누구나 이를 이해하고, 감동하고, 참회하고, 돌아서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마치 사이비나 이단 같은 ‘밀의 종교’의 은밀한 진리라는 게 아니다. 저들은 스스로를 노출되지 않게 하고, 어떤 의식을 통해 그들만의 비밀한 가르침을 전수하려는 게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이는 엄연히 성경의 의도와 뜻은 아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이 ‘비밀’은 단지 허락된 몇몇 사람만을 위한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이 비밀을 더 완전하게 하여 모든 사람들로 알게 하려는 의도가 숨겨 있다. 곧 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일을 보다 더 명징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려는 하나님의 계시에 강조되고 있다. 즉 이 비밀은 모든 사람들을 향해 선포이다. 비밀을 궁극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앙을 가진 자들이다. 은혜로만 가능하다. 성령의 감동으로 말이다.
특히 마가복음에 나타난 이 ‘비밀’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더불어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려는 것이다. 이 비밀은 다니엘서에 이미 예언된 것이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 즉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12:12-13).”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내 세상에 도래하여 사람들 가운데 활동하는 바, 숨겨진 형태로 진보해 나가는 것이다.
본문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하심으로 이미 숨길 것도 없는 사실로 드러내신 바 있다. 곧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그 이유는 분명하였다. 여기서 외인은 ‘너희들’과 다른 사람들로, 불신앙으로 완악한 마음을 지닌 자들을 가리킨다. 즉 저들은 앞서 말씀하신 것 같이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들이다. 악의적으로 적대시하고 의도적으로 외면하면서 거절하고 한사코 부정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모든 것은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의미를, 이 비유라는 말로 재해석한 것이다.
수수께끼같이 ‘풀리지 않는 의문점’으로 남겨두려는 게 아니다.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나는 아이들과 수업할 때 이 비유로 말하는 것에 대해 그 의미가 확장하는 놀라운 효과에 대해 자주 설명하고 그에 따른 감동을 느끼게 해주려 애썼던 것 같다. 이 말은 비밀을 알게 했을 때 감동과 여운은 그 파장이 상상을 초월한다. 이 천국에 대한 비밀이 풀리지 않는 의문점으로 계속 남아 있게 했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께서 앞에 계심으로 이미 천국은 풀렸다. 더는 비밀도 아니다. 하여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하심으로 오늘 마가는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12).” 하는 주님의 설명을 덧붙였다. ‘이는 저희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니!
이에 대해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사 6:9-10).” 이렇게 설교하였고, 예수님은 이를 인용하셨다. 마가가 여기에 인용한 구절과 이사야의 글은 다소 차이가 있다. 마가는 본문에서 ‘보고 아는 것’을 먼저 그리고 ‘듣고 깨닫는 것’을 나중에 배치시키지만, 이사야는 ‘듣고 깨닫지 못하리라’는 사실이 먼저 언급되었다. 또한 이사야는 6장 10절의 첫 부분과 같은 강한 표현 곧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는 것은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라는 문구를 변형시켜 단순히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을 하는데 있어 마가는 예수의 이 말씀이 의도하는 비유의 목적이 믿지 않는 자들은 진리를 받을 수도 없고, 회개할 수도 없게 하기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태는 본문 초두에 사용된 접속사 ‘이는’ 대신에 ‘그 결과’로 하였고, 누가는 ‘하지 않도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접속사 하나로도 본 구절의 해석은 다양해진다. 접속사 ‘이는’은 그 뒤에 이어 ‘~하기 위하여’라는 뜻을 갖는다. 이는 마가가 나름대로 목적어 용법으로 예수의 말씀을 해석해 놓았을 때의 경우다. 이에 따르면 이 비유의 목적이 ‘외인들을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마가가 원래의 ‘이는 ~하기 위하여’를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 ‘~하는 자’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묵상할 수도 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너희에게는 주어졌으나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였다’라고 해석하게 한다.
곧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이 분명히 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11-12).” 이 때문에 묵상은 지극히 요구되고, 지극히 개별적이며,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음미(吟味)가 요구된다. 음미는 참 재밌는 한자어이다. 둘 다 입 구(口)자가 쓰여, 시를 읊거나 깊이 읽는 것, 곧 성경을 소리 내어 읽으라고 하는 이유도 그것이겠다. 읽는 맛이 맛 미(味)자에 담겨진다. 보통 나는 아이들과 수업할 때부터 저들 원고든 같이 읽는 책이든 혼자 읽는 원고나 책이든지 간에 소리 내어 읽기를 강조했었다. 곧 이러한 읽기와 묵상은 누구의 설명이나 어떤 해설보다 자신의 감동, 성령이 내 안에 역사하시는 움직임을 살필 필요가 있다.
이유는 오늘 시편에 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시 91:1-3).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때 관심도 가고, 관심이 있을 때 마음도 생겨나는 법이다. 마음이 있어야 사랑도 가능해진다. 내가 걸렸던 ‘올무’나 ‘전염병’에서 풀려나고 건짐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는 성도들이 남다른 은혜로 사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여,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4-6).
이는,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0-11).
이 놀라운 은혜를 알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14-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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