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일어나라

하현. 2026. 7. 5. 05:49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막 5:40-41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시 92:4-5

 

 

예수님의 사역이 확대됨과 함께 두려움과 경계가 곧 핍박으로 이어지며 기세를 더하고 있다. 이에 비해 예수의 사역은 아랑곳없이 확대되어갔다. 이에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의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곧 나의 이야기로 들린다. 우린 저마다 ‘거라사인의 귀신 들린 자’ 같이 산다. 그 속에 있는 집단적인 항체가 한 군대를 이룬 듯 힘이 세다. 남을 해할 뿐 아니라 자신을 해치기도 한다. 저는 결국 돼지 떼에 들어가 바다에 몰살당한 후에야 그 사람은 온전하여졌다. 이에 그는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함께 가기를 구하였다. 배에 오르심은 더 넓게 확장해가는 예수의 사역을 알게 한다.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 이르시길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19-20).” 곧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개별적인 게 아니었다. 이를 가족들에게 나타내고 ‘데가볼리’에 전파하였다. 즉 자신의 생활반경 안의 모든 영혼들에게 증거하고 증명하는 삶이 필요하다.

 

이어서 마주하게 되는 사건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 살아나는 이야기 속에 ‘열두 혈루증 앓는 여인’의 이야기가 중첩되어 있는 것을 본다(21절 이하 25절). 곧 우리 영혼은 다들 죽어가는 소녀의 것과 같고 죽지 못해 살아온 혈루증 앓는 여인의 경우와도 같다. 이에 두 이야기는 각각의 개별적인 이야기 같으나 서로가 그렇듯 각자의 사연을 안고 중첩되어 살아간다. 결국은 믿음에 관한 것이다. 내 이야기 가운데 너의 이야기가 있고 너의 이야기 중에 나의 사연도 있다. 서로는 이를 가지고 예수께로 온다. 회당장이 주 앞에 나온 것처럼, 혈루증 않는 여인이 예수 곁으로 온 것처럼, 때로는 서로 모르는 듯 하나 이미 하나의 이야기다.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에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저들은 구경꾼들이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안개 같은 존재들이다. 그 가운데 한 여인이 예수 곁으로 왔다. 나서서 자신의 처지를 고하기도 부끄러워 그저 예수의 옷자락이나마 만지면 나을 것이라 여겼다. 다소 미신적이고 해괴한 일이나 진짜 그와 같은 역사가 이루어졌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27-29).”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당사자들만 아는 이야기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30).” 당연히 모두가 의아해한다. 그야말로 인산이해로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언제 어떻게 만지고 스쳤을 일을 두고 말씀하심인가?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31).” 그러자 당사자인 여인이 고한다.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33)” 결국은 믿음의 일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

 

이러한 사실에 대해 당사자만 아는 일이라 하겠으나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은 모두가 자기 이야기와 중복되는 지점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더욱 은혜가 크고, 어떤 이는 이에 따른 찔림과 두려움으로 경계한다. 종종 듣는 말이 설교 후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아니라 할 수 없고 그렇다 할 수도 없다. 분명한 사실은 내가 나 들으라고 한 소리인 것은 맞다. 말씀이 먼저 내게 말씀하지 않으시면 나는 그저 전달자일 뿐이다. 말씀에 포함되지 않는 영혼은 귀신 같이 알아듣고 바다로 뛰어드는 돼지 떼 같다. 정작 자신들의 한 일을 돌아볼 겨를 이 없다. 본능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당장을 모면하려 내달릴 뿐이다. 심지어 집단으로 무리 지으면 살 줄 안다.

 

죽어 있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이야기도 같다.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38-39).” 분명 우리의 현상은 죽은 것 같다. 사람들은 그러므로 슬픔에 젖어 있는데, 잔다고 하시니 더 황당해하며 비웃는다. “그들이 비웃더라.” 이와 같은 반응은 가장 보편적인 현상이다. 모두는 현실을 보고 예수는 앞을 보신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40-41).”

 

이를 바울은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1-2).” 곧 우리는 예수를 온전히 바라고 믿기 전에는 죽은 상태로 산다.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기세에 눌려, 사느라 사는 일에 죽을 맛이다. 이를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 때문이라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롯도 그러했다고 하니,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벧후 2:7).” 곁에서 멸망하는 것들을 보면서도 우리의 완고함이라니, 어쩌면 우린 결국 당하기 전까지도 모르고 사는 “무법한 자들의” 삶과 같이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숙명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음란이란 그 의미보다 더하여 하나님을 뒤로 하거나 잠시 거두어두는 모든 의식의 흐름이다. “의로운 롯”이 그러했다. 성경 여기서만 롯을 의롭다고 하나 아, 의로운가보다 하지? 그럼에도 하나님은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8).”

 

내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믿는 자들이다. 어떤 이는 누구보다 주를 사랑한다며 원통해한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안중에 없고 주일을 지키는 일이나 예배를 권하여도 시큰둥하다. 심지어는 ‘이런 시대에’ 교회라는 가시적인 건물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을 외면하며 스스로는 그런 가운데서도 누구보다 주를 사랑하고 의지한다며 자부한다. 나는 저에게 우리의 연약함을 몸의 일부로 놓고 설명하였다.

 

손이 손의 구실을 하고 발이 발의 역할을 하려면 몸에 붙어야 하고 머리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아주 작은 듯 신체의 일부라도 고통당하면 머리가 이를 알고 모든 지체로 하나 되어 이를 돕게 한다. 가령 내가 또 내성발톱이라 조금만 자라면 살을 파고 들어간다. 이와 같은 고통이 머리로 전달되어 손이 나서고, 허리는 굽혀, 눈으로 보고, 밝은 오그리고, 신경은 집중하여 파 들어간 발톱을 파내고 잘라내느라 진땀을 뺀다. 고작 이 하찮은 발톱 따위에도 온 몸이 나서는데, 교회란 이런 것이고, 건물이 아니라는 둥 우리 자신이 교회라는 둥 하는 허상의 주장에 다소 의문이 든다. 우리 각자는 그리 대단하게 강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온전할 수 없다. 씻고 돌아서기 무섭게 더러운 게 몸이다.

 

이에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42-43).” 죽음과 일상의 경계가 모호한 듯 한 뼘 차이일 뿐 정작은 예수의 이야기다. 즉 거라사인의 귀신 들린 자의 이야기도 아니고, 회당장이나 그의 딸 야이로의 이야기도 아니다. 열두 해 혈루증 않는 여인의 이야기도 결국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즉 말씀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어서라도, 가까이 조금만 더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하는 믿음의 일이다(27).

 

물론 예수님은 치유 권능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 나라의 설립으로부터 완성까지’ 전 과정을 주관하시는 분은 예수이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4:41).” 우린 더러 두려울 따름이다. 이처럼 자연계를 지배하시는 창조주로서 예수의 권세는 ‘위대한 의사’로서 그 권능을 나타내신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이 날로 확대되고 놀라운 권능을 목격한 무리의 환호가 높아져간다. 상대적으로 대적들의 핍박과 악의적이고 고의적인 적의는 한층 교묘해지고 악랄해져 갔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 장 6장에서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먼저 언급하신 것도 그 때문이다(6:1-6). 세례 요한의 순교(14-29)도 같이 언급될 것인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과정은 이처럼 박해와 죽음이 그 일을 열어낸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는 ‘봉사하시는 종의 모습’을 보여 준다. 본문은 이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놀라운 권능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질병과 죄악으로 신음하는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을 ‘사랑의 손’으로 어루만지시는 종의 사명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소유하셨지만, 이 권세로 군림하거나 자신의 명성을 떨치는 데 사용하지 않으셨다.

 

시쳇말로 사람들이 집중하고 모이면 그게 곧 돈이 되고 권력이 되어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게 이 땅의 원리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으로서(더욱이 마가는 이를 중심으로 다루며)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가는 곳마다 죄인들을 위해 섬기며 봉사하는 데 주력하셨다. 장차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었지만, 이 또한 권세와 권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직 간절한 사랑으로 스스로 택한 고난과 죽음의 길이시다. 오늘 본문의 세 이야기에서 저들을 치유하시는 내용은 각각의 공통점이 있다. 거라사인의 귀신 들린 사람(1-20), 열두 해 혈루증 앓는 여인(21-34), 회당장 야이로의 딸(35-43), 이 세 이야기의 공통점은, 우선 이들 세 치유 기사는 공히 유대 의식법상 불결하게 여겨지던 것이다. 귀신들린 사람이 그 사이에 거했던 ‘무덤’(3), 혈루증 걸린 여인의 ‘피’(25절), 야이로의 딸의 ‘시신’(35). 모두는 유대 의식법상 불결하다. 간접적으로 형식주의자들에게는 부당하였을 것이고(3:4), 병들고 상한 당사자들에게는 크신 긍휼과 사랑이다.

 

다음, 이 세 이야기는 한결같이 치유함 받은 과정이 극적이다. 주님의 이적과 권능의 탁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아무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광폭하게 날뛰던 광인이 온전해진 것, 열 두 해나 속수무책으로 앓으면서 온갖 약을 다 써도 소용이 없던 혈루병 여인이 다만 ‘예수의 옷에 손만 대고자 했을 때’ 씻은 듯 나은 사실, 이미 야이로의 딸이 죽어 장사 지낼 준비를 하던 것을 ‘달리다굼’ 이 한 마디 말씀으로 소생시키신 것 등….

 

나는 종종 나의 극적인 경험을 말하기 좋아한다. 이처럼 묵상글을 쓰면서도 자주 언급하는 어릴 적 학창시절의 이야기나 경험, 대학을 졸업하고 이미 두 아이를 두고 살면서 부채로 쓰러져 가는 교회로 전전긍긍하는 부친의 사역에 환멸 하던 때의 신학부로의 편입과 그에 따른 일체 모든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하던 손길, 이후 죽을 뻔한 일을 일일이 거론하기도 어렵고 급기야 죽으려고 작정했을 때 주의 강권하심으로 붙들려 결국은 다시 십 수 년이 지나서야 신대원을 마저 하면서 또한 그때마다 매학기 등록금을 책임지셨던 일이나, 목사가 되는 과정도 되고 난 오늘까지의 이 교회가 유지되는 이상한 저력에 대하여….

 

누가 와서 자신도 겪었을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생생한 경험과 고백을 들을 때면, 서로가 눈물 짓곤 하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하여…. 우린 여기서 공통점을 발견한다. 모두는 ‘귀신 들리 광인’으로 살았다! 것도 그 속에 ‘군대’가 있어 저마다의 완고함이란 군대를 동원하여 국회를 점령하기까지 할 정도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이라서, 누가 뭐라 한들? 어지간한 일로는 어림없는, 회심이 묘연한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저마다 예수를 따른다. 인생에 풍랑이 일고, 저마다 ‘무덤’ 사이에서 밤낮 소리 지르며 돌로 자해를 일삼듯 술에 취하고 원망과 저주로 몸살을 앓는 모습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파괴하며 살았다. 그런 가운데 사탄은 열심히 불순종의 아들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한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들마저 미혹케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그렇지 않으면 저마다 혈루증 앓는 여인처럼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그것 때문에도 큰 교회로만 전전긍긍하면서 누가 자신에 대해 알까 조심하며, 위선적으로 주를 섬긴다고 섬기는 이들도 수두룩하다. 일어나야 한다. 예수 곁으로 가까이 가야 한다.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야 한다(21-34). 더는 가망이 없는, 야이로의 딸을 시신을 손 잡고 달리다굼 하시는 이가 계시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41).” 일어나, 가까이 가, 손을 대고,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시 92:1-3).

 

이는 우리의 사명이다. 주의 영광이 되는 일은 어떤 성공이 아니다. 대단한 공로로 이루는 게 아니다. 처한 현실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 앞에 나올 때,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4-5).

 

우리 믿는 자들은 이 같은 간증으로 산다.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6-7).

 

저들의 결말을 앎으로,

 

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11-13).

 

그리하여 오늘도,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