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막 6:4-6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시 93:3-4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흐르는 시간 속으로 우리의 편협한 생각과 판단이 따라 흐른다. 그땐 그랬던 것이 지금은 어떠한지? 더러는 생각하는 일조차 낯설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두 가지 국면을 맞는 것을 본다. 먼저는 고향인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신 내용이다. 이후로 다수의 군중들과 함께 하시지만 열 두 제자에게 집중되는 훈련을 보게 된다. 차츰 공생애의 마감이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전환점을 갈릴리 전도의 절정으로 장식하는 것 같다. 마가는 여기서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을 다루고 있다.
그 흐름에 따라 ‘종에 대한 배척’과 ‘고난당하는 종’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는 먼저 저들의 선입견 곧 편견으로 인한 것이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2-3).” 누구보다 예수를 잘 아는 사람들의 판단이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4-6).”
그에 따른 결과는 불행하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이는 저들이 예수를 배척함으로 어쩔 수 없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곧 우리의 본질이 그러해서 먼저 앞서는 인상, 판단, 혹은 미리 아는 어떤 정보에 의해 선입견이 생겨난다. 예수께서는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그나마 듣고자 하는 자들을 따라 움직이셨다. 인간적인 친분, 관계, 그로 인한 마음의 어떤 상태가 상대를 대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더한다. 나아가 진리를 거스르는 걸림돌이 된다. 외면만 보고 진리의 실상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게 우리의 한계다. 해서 누가 첫 눈에 알아본다느니, 조금만 들어봐도 알겠다느니 하는 말을 할 때면 다소 경계하게 된다.
본문은 이러한 편견은 고집으로, 아집은 영적 무지로 여실히 드러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때 예수님의 심정을 짐작하게 하는데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6).” 이를 보고 문득 드는 생각이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하는 것이다. 설마 이런 감정을 알지 못하는 존재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도 우리 같은 성정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하셨다. 이어지는 세례 요한의 처형 기사는 더욱 더 슬프고도 답답하였을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로마 제국의 승인 하에 헤롯이 유대를 다스리고, 저들을 핍박하고 있었다(14-29). 이는 장차 예수를 갈보리 산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 뿐 아니라 정치 지도자들 또한 깊이 연루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시켜 둘씩 짝 지어 파송하신다. 오병이어의 이적과 물 위를 걸으신 이적으로 갈릴리 사역에서 예수의 권능은 절정에 달한다. 오병이어는 쉴 틈 없이 분주한 가운데서도 무리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가운데 저들의 영육간의 주림을 채우시는 역사였다. 그런 가운데 또한 제자훈련은 공생애 중반에 들면서 예수는 여러 무리들 중에 열 두 제자들에게 집중적인 훈련과 교육을 시행하심이다. 이는 장차 저들로 초대 교회의 기둥으로 세우고자 하심이다. 뿐만 아니라 군중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의 확대를 위해 제자훈련이 절실했다. 이들을 파견하실 때 당부하시는 말씀은 늘 우리 안에 어떤 청빈한 삶의 기준을 보인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8-9).” 또한 말씀을 배척하는 데 있어 대처하는 방식으로는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10-11).”
먼저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심을 묵상하게 된다. 지팡이는 여행자의 필수라 할 정도로 자신을 보호하는 목적으로 지닌다. 보행에 도움을 주고 적으로부터 방어를 하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경계하신다. 그 의도는 계속 이어지는 명령들에 나타난다. 앞으로의 끼니를 위해 ‘양식’도, 여러 짐이나 두 벌 옷도 신발도 준비하지 않게 하신다. ‘두 벌 옷’은 곧 여벌의 옷으로 여행을 위한 여분을 스스로 챙길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지형으로 보아 여행자는 노숙을 대비하는 게 마땅하였다.
그렇듯 우리도 살면서 당장의 일뿐 아니라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아는 이들 가운데 야심차게 목회를 시작했다가 생활이 여의치 않고, 자녀까지 생기면서 그만두거나 다른 일을 겸하는 일이 여럿이다. 가장 안타까운 일은 아무개의 경우 딸 둘을 낳고 아이들이 청소년 시절 도저히 목회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서 친구 정육점에서 같이 일하다 잠깐 사역을 접은 뒤 직장암에 걸리는 경우가 있었다. 서로의 인과관계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이 더러는 야속할 따름이다.
자기 신변에 대한 염려는 일체 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다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 신뢰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나는 그리 확신하는 것은 오늘에도 나의 목회는 그러하다. 함께 예배드리는 인원으로는 고작 열 명도 안 돼 교회를 이처럼 유지하는 일도 어렵다. 그러나 후원의 손길과 기도로 나는 이 목회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는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대부분 상담으로 오거나 아이를 맡겨 같이 수업을 한다 할 때 따로 수입이 없다. 더러는 끼니를 위해 식사를 대접하거나 커피라도 사야 할 때도 있다. 돈을 받고 이 일을 할 수는 없다.
드려지는 모든 것은 교회 수입으로 우선은 이 교회를 유지하는 데 긴요하다. 월 백 만원도 못 버는 아픈 아이의 십일조는 항상 이 교회의 마중물이 된다. 누가 뭐라든지 아이는 얼마 전 스승의 날이라고 감사헌금을 얼마 드렸고, 모 동호회에서 우승을 했다며 또한 감사헌금으로 만 원을 드렸다. 저마다 돈에 있어서는 셈이 바른데 나이 서른의 이 아이는 그 마음이 순수하다. 그런 식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직접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기를 위해 여행을 위한 모든 것을 일체 준비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한 자세가 제일 필요하다. 다들 부유하고 크고 많은 신도들의 교회를 선호하는 이유를 안다.
어제 오후 우리 앞 길 건너 큰 교회에서는 모 강사를 초청하여 강연과 공개상담을 진행했다. 저는 지금도 방송으로 높은 인지도를 가진 사람이라, 몇 주 전부터 길거리마다 대대적인 홍보가 있었다. 우린 교회 앞에 세울 배너광고판 하나도 값이 예상보다 비싸서 미뤘는데 몇 미터 간격으로 줄지어 펄럭이며 꽂힌 광고와 전단지에 홍보물품을 받아들으며 묘한 이질감도 느껴졌다. 워낙에 유명하고 현재도 TV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강연자라 그렇기는 하겠으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이 무모하게까지 생각된다.
결국 신앙의 청빈이란 모든 소유를 버림으로 하나님께 절대 의존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춘다. 지금도 나는 종종 강한 유혹을 받는다. 아이도 어른도 어디 문예창착과나 문예상에 도전하는 이들을 지도하여 좋은 결과를 낼 자신이 있다. 단지 예전에 잘 나갔다는 말로 대신하려는 게 아니라, 우선은 소재 싸움이라 남다르고 유별난 경험이 당락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또 이 문제로들 그 심령이 상하고 마음이 어그러진 일들이라, 가끔은 누구의 사연을 듣다 이를 글로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자주한다. 대체로 글쓰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가로막기도 하지만 열에 아홉은 드러내기를 바랄 수 없다. 안고 있음으로 곪는 것인데 이를 알게 하고 실제 글로 쓰게 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그때까지 관계가 이어지는 게 또 대체로 어렵다. 열에 아홉은 자신의 고백에서 스스로가 부끄러워 숨어버리듯 더는 자취를 감추기 일쑤니까 말이다.
돈벌이를 내려놓고 법벌이로도 삼지 않으며 하는 일이란, 오늘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바,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눅 9:3).” 이와 같이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막 6:8-9).” 하시는 오늘 말씀도 같은 의미로 들린다. 주가 하신다. 누구보다 나는 이를 그 현장에서 살았다. 신학도 목회도 앞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던 시절에도 그런 가운데서 은인들로 내 곁을 두어 저들의 호의로 살았던 것을 인정한다. 이어서 예수님은 우리가 가질 미련에 대하여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9-10).”
이렇게 거처할 집을 정하면 떠날 때까지 옮기지 말고 한 집에 머물라는 이유는 제자들의 행동이 주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했을 것이다. 최초 그곳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편한 안식처를 찾아 여러 집으로 옮겨 다니면 주민들 간에 불화를 조성할 수 있겠다. 또는 좋지 않은 소문을 낳을 수도 있겠다. 보면 늘 내 인생은 10년 주기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던 것 같다. 평촌에서 10년을 넘기고 글방에서 교회로 바뀐 후에 인천으로 왔다. 인천 논현동에서도 얼추 10년을 넘기면서 이곳 주안으로 옮겼다. 이제 10년 남짓 나의 목회현장은 이어지고 끝날 텐데, 누가 모처럼 어찌 지내시는가? 하고 물어와 안부를 물을 때 나의 운신의 폭은 한정되어 그때마다 설명하기도 어렵다. 다만 그때마다 있는 자리에서 선한 영향력은 그리스도의 향기로 나타난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싫든 좋든 그러하여서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16).”
그런 가운데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17).” 하는 바울 사도의 설교에서도 다시 한 번 확신을 얻는다. 여러 방법과 나름의 뜻에 따른 것이겠으나 소위 유명 연예인 한 명으로 수 십 명의 전도효과가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때도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면 마치 이적과 이벤트를 바라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라.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55-56).”
모두가 나음을 입고 병고침을 받았다고 해서 영적으로도 나음을 입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에 예수님은 이르시길 ‘영접지 아니하고, 듣지도 아니하거든’ 곧 그나마 배척하여 더는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증거를 삼으라고 하셨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 이방 땅을 밟거나 여행을 하고 돌아올 때는 발과 옷에 묻은 이방 땅의 먼지를 모두 떨어내는 관례가 있었다. 곧 부정한 것으로 여겨 제자들에게 이를 단호하게 행동으로 보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고향에서는 배척을 당하시고, 오히려 제자훈련을 주력하시며, 군중들의 환호에 마음을 두지 않게끔 하셨다. 스스로 살 궁리로 염려하지도 않게 하셨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오류, 선입견과 편견이 갖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성경은 여러 곳에서 주의를 주셨다. 먼저는 말씀의 의도를 바로 알고자 묵상하여야 한다. 기도가 필요하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이에 지혜는 이르시길,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잠 6:20-22).” 그리하여,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시 119:105, 111).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 결론은 말씀으로, 말씀 가운데, 말씀에 의지하여 나 자신의 편협하고 그릇된 지식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한계와 부족을 솔직히 마주하고 고백하며, 이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참 지혜를 간구해야 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시 93:1-2).
오늘이 어떠하다 해도,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3-4).
주가 더 강하시고 빠르시며 인자하심으로,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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