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막 7:18-19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시 94:11
예수님의 전도 사역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그런 가운데 여러 사건이 거듭된다. 갈릴리를 떠나기 전 수개월간에 걸쳐 두로와 시돈을 거쳐 다시 남동쪽으로 내려가 갈릴리 호수 동쪽 데가볼리 지역에 이르기까지의 사역으로 알 수 있는 세 가지 일이 있다. 먼저는 핍박과 복음 사역의 공존이다. 마가는 종의 신분으로 오신 예수에 대한 핍박을 언급하며, 종의 일관된 복음 사역을 교차하게 한다. 앞서 예수께서는 게네사렛 땅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 이어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내용이다(1-5). 예수에 대한 소문이 유대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것에 위협을 느낀 까닭이다.
저들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하다,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2).” 이를 가지고 문제를 삼는다. 저들 바리새인들, 종교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왔다. 중앙에서 예수의 소문을 확인하고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중 몇 사람이 예수를 찾아 갈릴리의 가버나옴지방으로 온 것이다. 예수님은 주로 이곳에서 활동하셨다. 저들이 중앙에서까지 온 것은 당시 열성적인 활동과 민중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높아가는 관심과 예수에 열광하는 대중을 의식해서였다. 예수님의 활동은 사회, 정치, 종교 모든 분야에서 굉장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기적의 행하시는 것은 물론이고 죄 사함을 선언하는 행위는 특히 종교적 전통에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사실 전통적 유대주의와 예수님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이 전개되고 있었다. 본문의 ‘조사 단원’들은 편견과 적의로 가득 찬 눈으로, 제자들이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 것부터 트집 잡았다. 곧 ‘부정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예수와 제자들의 활동을 주시하다 문제가 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를 포착한 것이다. 이 문제의 초점은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는 행위’에 대한 거였다. 여기서 ‘부정한 손’ 과 ‘씻지 않은 손’이 동등한 의미로 표현되는데, 이는 이방인(로마)을 위해 복음서를 기록했던 마가의 의도적인 설명인 것 같다.
‘부정하다’는 말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의식적 부정을 말하는 것이고, ‘씻지 않은 손’은 그 부정한 이유를 말하는 것으로 덧붙인 설명이다. 그들 조상이 정한 ‘결례 의식’을 거치지 않아 성결에 이르지 못한 ‘부정함’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당시 근동 지역의 식사 예법은 주로 손사용하며 음식을 먹었다. 식사 전에는 손을 씻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에서는 이 ‘손 씻는 일’이 단지 위생적 측면에서 보다 오히려 ‘의식적 측면’에서 더 강조되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유난히 의식하고 문제시하는 경우가 우리 생활에도 여럿 있다. 예배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의식적이고 그에 따른 의미부여로 행동 하나하나에서 경건함을 찾으려고 한다. 이에 따른 예수님의 반론은 간단하다. 우선은 성경으로 반박하셨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6-7).”
이는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단지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책잡기 위해 전통적 유전을 내세웠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응대하셨다. 이러한 응대는 하나님의 법을 도외시하는 그들 유대 지도자들에 대한 정죄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외식(外食)하는 자들’이라 하셨다. 외식한다는 말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지칭하여 부르는 말로 집중된다. 그 뜻은 ‘자신의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무대에 서는 연극’ 같다는 것이다. 속과 겉이 다른, 이중인격자 또는 위선자란 의미다. 이것은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주장과 현실적 행동 사이에 불일치를 비판하시는 것이다.
이어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하심도 인용하신 이사야의 성경(사 29:13)을 인용한 것으로 전달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의도에 따라 선별한 인용이다. 그들은 각종 유전들과 전통들을 철저히 고수하지만 실은 진실과 경건의 내적 능력이 결여된 자들이었다. 바울도 설교 중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하였다. 그만큼 우리의 외적 경건주의가 거짓되고 위선적인 것을 돌아보게 한다. 즉 경건의 진정한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하여 삶 진체를 온전히 바치는 일은 사실 남을 비판할 여력이 없다. 즉 누구도 그와 같은 완전한 경건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주전 7세기경 이사야에게서 책망 받았던 그들 조상처럼 입술만의 신앙 고백을 하고 삶은 위선적인 생활을 하면서 참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거듭거듭 이와 같은 사실은 현실에서도 나타나고 형식 위주의 예배와 서로에 대한 친절과 섬김은 하나님의 뜻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은 아닐까? 서로는 언제부터 ‘거기까지’ 하고 선을 긋고 그만큼의 친절과 섬김으로 교회 구성원이 된다. 자주 느끼지만 저마다 어떤 문제를 안고 살지만 성도 간에 서로 중보를 부탁하는 일이 줄어간다. 그저 당면한 문제들로 포장하면서도 그 내면의 깊은 상처나 위로는 거부하고 숨긴다. 알리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 분위기가 전혀 모르는 제 3자를 찾게 한다. 서로 안 봐도 그만인 사람을 찾아 토로하고 어떤 대책을 요구한다. 혹은 정신과를 찾아 세상적으로 해결하려 든다. 심지어는 철학관이나 무당을 찾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내과의였던 제네바의 폴 투르니에는 모든 병의 원인이 마음에 있음을 간파하고 상담사로 활동하며 신앙적으로 저들의 문제를 접근하였다. 오늘 예수님은 이사야가 마치 그 글을 주후 1C에 존재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전제로 전하였던 것 같이 가져와 그대로 인용하신 것이다. 곧 당시나 지금이나 이사야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행태가 예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이 오늘 우리의 교회도 다를 바 없다. 이에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마 15:7).” 하심도 그러한 이유다. 즉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비판하는 것에 대하여, 여기서 예수님은 소위 구전 율법이라는 ‘장로들의 유전’을 ‘사람이 만든 계명’이라 규정하셨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막 7:7).”
‘사람의 계명’이라 하심은 8절에서도 ‘하나님의 계명’과 대조를 이루어 강조되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다시 말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장로들의 유전은 사람이 작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 권위에 절대성이 없다. 사실 장로들의 유전이 생겨난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율법만으로는 방대하고 복잡한 인생사에 구체적 지침을 마련하기 어렵다고 판단해서였다. 곧 점점 더 세분화되고 개별적 소수의 권익을 운운하는 법들이 생겨나는 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다. 특히 조상의 권위와 민족적 우월감에 도취되었던 유대인들의 상태로 이러한 세밀함이 도리어 서로를 비판하는 구실을 하였다. 그렇듯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결국 저들의 정결 의식이 하나님 앞에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는 헛된 것이 되었다.
그것을 지키며 자랑하거나 그것을 지킴으로써 거룩하다는 그들의 그릇된 자만심만 높아졌다. 일련의 사태도 그러하듯 선관위의 독립성이 법관들로 구성된 권위주의적인 논리로 투표용지가 부족했다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이 말씀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보이는 사람의 규범에 의해 무시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위선적인 형태를 찬양하는 지도자에 대한 폐단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었다. 이에 별 거 아닐 수 있는 이 사건으로 예수님은 준엄한 심판을 경고하시며 긴 지면을 할애하여 마가는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유대교 지도자들의 핍박과 계획적이고 노골적인 문제 제기를 소개한 후 이어지는 사건이 다소 생뚱맞은 느낌도 든다. 곧 이방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치유 받은 사건이다(24-30). 무려 오늘 본문은 1-23절까지 저들 장로들의 유전(遺傳) 논쟁을 뒤로 하면서, 유대인들의 그토록 사소한 상황에 대한 의도적인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를 바울의 시선으로 먼저 보면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롬 2:9-10).” 곧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신령한 특권을 곡해하여 독선적 배타주의로 일관하였다. 이방인들과 교제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불결한 일이 되었다.
본문은 의도적으로 1-23절과 24-37절의 내용을 대비하면서 유대인의 자의적 복음 거부와 그에 따른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전달되는 과정을 시사하고 있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5-27).”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하필 그런 때,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 앞에 나타났다. 예수를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방인 여인에 불과한 이 사건이 확대 조명 된다. 그녀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분의 탁월한 신유의 은사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녀는 예수의 소문을 따라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렸다.’
엎드림은 겸손과 신뢰의 자세다. 그 여인의 딸은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 귀신은 늘 ‘흉악’한 ‘악령’과 ‘마귀’로 표현된다. 이 병은 육체적 압박과 두려움을 동반한 심한 정신적 질환이다. 따라서 그러한 딸을 두고 있던 여인의 한숨과 눈물을 짐작하게 된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다. 나는 그 당사자로 부모의 심정과 본인의 처지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내 곁의 여러 가정이 그러한 현실을 산다.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부모들이 눈물지으며 어떻게 해야 할지 힘들어한다. 가령 누구는 결국 자식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차라리 자신들의 생활을 이어간다. 그 아이는 최고의 유명대학을 다니다 강박에 시달리면서 급기야 그리 되었다. 상대적으로 날 때부터 기형적인 몸으로 극심한 장애를 안고 사는 아이도 있다. 그 부모는 뒤늦게 이를 알면서도 아이를 낳았고, 주신 이의 뜻을 받들어서 십 수 년째 아이를 수발하며 키운다. 그로 인해 매일 교회로 올라와 기도하고, 어느새 저들 나이도 쉰이 넘었다.
더불어 당사자인 나름 양호한 아이들을 대한다.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학교 공부도 가르친다. 십여 년 된 아이는 이제 확실히 좋아져서 대인관계는 물론 자신의 일에 성실하다. 다만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갈등, 가령 소비욕구나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는 스스로도 괴로움을 토로한다. 이제 중학생이 된 아이는 이제 시작이라, 어제도 학교 선생의 호출로 다시 학교로 불려가고 주의를 듣고… 그러는 현실을 아이는 이해하기 어렵고 그러는 아이를 학교나 사회는 용인하기가 어렵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불만이 많다. 아내는 아이를 더는 힘들어하며 글방을 이유로 교회로 보낼 생각이다. 곧 내가 아이를 맡아야 하는데, 앞서 기도 중이다. 아이라서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도 같다. 홀로 살아온 중년의 누구는 대화가 어렵고 조심스럽다. 조금만 뭐라 권하면 이를 이유로 어려워한다. 웃기는 말이지만 벌써 몇 번을 절교하였다가 다시 연결되길 되풀이 한다. 다신 안 볼 것처럼 굴다 슬그머니 도로 이어진다.
이럴 때면 하나님이 왜 나를… 하는 모든 의문이 풀린다. 목회는 남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나를 위한 것이다. 오늘 여기 이 이방 여인은 헬라인이면서 수로보니게 족속임을 밝히고 있다. 당시 역사적으로 그녀의 국적이 분명 헬라 곧 그리스가 아닌 점을 생각할 때 여기서 헬라인은 유대인과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이방인에 해당하는 말이다. 오늘 이 일은 초대교회의 큰 사명이 되었다. 선민의식과 유대인 중심의 복음이 이방으로 넘쳐나는 계기가 되었다. 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 예수님의 이 의도적인 말씀은 심오하고 계획적이다.
이후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 18:4).” 초대교회의 역사가 되었고,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다 같은 복음의 대상이 되었으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10:12).” 하는 선언에 이르러 오늘 우리로도 자유하게 한다. 오늘 이 여자는 ‘수로보니게’ 출신이다. 여기서 ‘수로’ 지방의 ‘보니게’라는 뜻으로 지금의 시리아에 있는 뵈니게 지방을 말한다. 당시 뵈니게는 행정상 시리아에 복속되어 있었다.
이에 저들을 의도적으로 ‘개들’로 하대하였으나 이는 예수께서 쓰신 은유적인 표현이다. 유대민족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당시의 시선으로 일부러 그리 대하셨다. 복음이나 하나님이 구원의 시혜(施惠)는 유대인 우선권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배타적인 선민의식을 타파하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리 표현하신다. 이러한 특수적인 유대주의 선민의식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여행 지침에서도 간접적으로 언급하신 적이 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마 10:5).” 이를 사도 바울 역시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고,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롬 2:9-10).”
곧 오늘 이 일을 통하여 점점 더 확산되고 넓혀지는 의식은 본래 모든 인류의 처음이었던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신 것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오늘의 유전 논쟁이나(1-23),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시는 일이나(24-30),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귀먹고 어눌한 자’로 이를 고치심으로 모든 상황은 정리가 된다(31-37). 결국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6).” 그리하여 이 ‘에바다의 영적 의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막 7:34).” 이에 ‘에바다’는 ‘열리라’는 뜻으로 ‘달리다굼’(5:41)과 ‘아바’ (14:36)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15:34)로 이어지면서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을 알게 한다.
오늘도 이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듣지 못하는 심령을 위해 저의 귀먹은 것과 의와 진실을 말해야 함을 우리에게 맡기신 사역으로 감당하게 하신다. 우리의 안일한 침묵이 곧 죄인 까닭은 이 놀라운 사실을 전하고 증거하여 저들로, 영적으로 귀먹고 어눌한 자를 치유하라 하신다. 예수는 지금도 살아 계시사, 영적으로 닫힌 우리의 귀와 입을 여시기 위해 ‘에바다’를 명하신다. 하여,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나이다
(시 94:1-4).
하는 우리의 자발적인 기도와 참여가 필요하였다. 그럴 때,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9, 11).
그리하여 오늘도 주 앞에 엎드리며,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18-19).
이는,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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