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4-35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시 95:1-2
우리는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 나서서 했던 말을 장담할 수 없다. 저마다 각오를 하고 살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곧 하나님이 내 안에 주신 고백-신앙과 나의 신념은 다르다. 베드로의 아름다운 고백은 금세 자신의 추한 열심으로 덮였다. 오늘 본문의 두 구절 사이에는 우리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29).” 이 귀한 신앙고백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뒤이어 주의 사역을 듣고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막 8:32).” 그러자 곧이어 주님은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33).” 이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어쩌면 가장 완벽한 신앙고백을 한 입으로 항변하는 것은 오히려 아이러니하다. 이 고백에는 예수의 인성과 신성이 그대로 담겨졌다. 곧 그리스도라 함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은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신분이 그대로 담겨 있는 고백이었다. 물론 베드로의 이 고백은 전혀 새롭고 획기적인 내용이 아니라, 일전에 몇몇 제자들(요 1:41, 49)과 가버나움에서 무리가 예수를 떠나갈 때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어진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68-69).”
곧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단순히 정치적 측면에서 받아들이려 했던 대중들의 기대를 회피하시기 위해 그러한 신앙 고백을 크게 부각시키지는 않으셨다. 하지만 메시야의 신분과 사역의 특성 및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오류들에 대해서는 엄연히 다루셨다.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막 8:27-28).” 하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어서 제자들에게 따로 물으셨고, 그런 가운데 베드로의 바른 신앙 고백이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시며 ‘하나님의 종’이시라는 뜻이다. 이는 그분의 인성(人性)을 대변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제사장, 왕, 선지자’들이다.
‘그리스도’라는 말과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 앞에 관사가 붙어 있는데 이는 예수께서 단지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을 능가하는, 오랫동안 대망해 오던 구원자로서의 메시야가 되심을 힘주어 강조하는 표현이다. 동시에 절대 유일성과 초월성을 강조해 주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살아계신’이란 표현을 덧붙였는데 이는 ‘내재적 생명이 충만하신’, ‘영원히 생존하시는’ 등의 뜻을 함축한다. 곧 ‘오직 영원하고 자존적 존재이신 하나님께만 사용될 수 있는 표현’으로,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요 5:26-27).” 하고 예수께서 자신을 두고 말씀하신 바도 있다. 바울은 이를 두고 후일에 설교할 때에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9-10).”
곧 과거와 더불어 현재와 미래에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탁월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그분의 신성을 강조하는 말로서 그분은 단지 종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 그리스도 이상의 존재이심을 베드로는 고백하였던 것이다. 저는 자신이 무슨 의미로 고백한 것인지를 알기는 한 것일까? 이에 예수님은 복되다 하실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여기서 ‘바요나 시몬아’ 하심은 일부러 그의 부친 요나의 아들이라 함을 주지하게 하심이다. ‘바’는 ‘아들’을 뜻하고, ‘요나’는 시몬베드로의 아버지로 히브리어 ‘요하나’, 신약의 ‘요한’으로 부른 것을 뜻한다. 요한의 뜻은 ‘비둘기’다. ‘시몬’은 본명으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베드로의 원래 이름을 부르시며 새 이름인 ‘베드로’라 부르지 않으셨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 1:42).”
그렇게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신 것은 뒤의 말씀과 연관시켜 볼 때 매우 의미가 크다. 실로 갈릴리 호수의 어부로서의 시몬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참다운 신앙고백을 한 것은 자신의 지혜, 신분, 지식으로 한 게 아님을 알게 한다. 그의 탁월했던 답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하기 위해 그의 옛 이름을 그의 아비의 이름과 더불어 일부러 붙여 사용하셨다. 그런 뒤 ‘네가 복이 있도다.’ 하심으로 우리의 오늘 이 신앙이, 그 고백이, 이와 같은 행함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내가 내 의지로 이 시간마다 주 앞에 나아오는 게 아닌 것이다. 이를 두고 더러는 훌륭하다고 하는데 실제 이 일은 은총이다. 오늘 베드로의 고백과 우리의 신앙고백이 하나 되는 것도, 그리하여 우리도 복되다 하실 것을 안다. 또한 말씀 앞에 앉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를 생각함으로, 교회를 위하고 우리 곁의 한 영혼을 위하는 마음, 이 모든 게 다 하늘 아버지에게서 나온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저마다 자기 살기 바쁜 세상에서, 요즘은 자신을 드러내어 유튜브니 개인방송 따위로 널리 알려 스스로들 높임을 받으려는 세상에서 베드로의 이 같은 고백이 내 것이라 다짐한다. 이 유일회적(唯一回的)인 고백이 탁월한 하나님의 축복의 선언인 것을 우리도 이제 안다. 이를 질투하기도 하고 내 것으로 삼고 싶은 마음이 강한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곧 베드로가 받은 축복의 종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 국한되지 않는다.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받은 특별한 계시의 은총을 누린 것이다. 감히 바라면서 또한 확신하는 것은 나의 일생이 그러하였음을 안다. 강원도 산골에서 자수성가하여 나름 사업을 확장하던 때의 부친은 기고만장하였다. 당시 자개장에 붙이는 조개껍질을 수공업하고, 휴지가 없던 시절에 가재손수건 공장까지 두 개를 운영하며 일가를 이룬 줄 알았다.
그러한 부친의 길을 돌이키는 데 있어 나의 출생은 생후 6개월에 소아마비라는 엄청난 결정타를 맞은 셈이다. 어머니는 물론 조모까지 나서 용하다하는 의원이나 점쟁이를 찾아다녔다. 심지어 나의 조모는 나를 데리고 절에 들어가 불공을 드리며 낫기를 청하였다. 그 시절이 제법 길었던 기억도 있다. 결국은 대홍수로 천호동일대가 물에 잠기는 파란을 겪고 모든 공장이 홍수에 쓸려가고, 죽을 각오로 나의 부친은 기도원으로 갔던 것이다. 그렇게 주의 부르심에 항복하고 저의 생은 180도로 바뀌어서 죽고 살기로, 전투적인 목회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그 열악한 교육환경에서도 다들 나를 특수학교로 보내려 할 때 나의 부모는 하나님께 맡김으로 그냥 일반학교에 보냈고, 뒤이은 학교생활에서의 수모와 수치와 온갖 서러움에 대해서는 말하기도 어렵다.
한동안 그 모든 시절의 노여움이 나로 하여금 더욱 완고하고 단단하게 하였고, 하나님께 항변하고 저항하듯 세상을 바라면서 살았다. 기억이 닿는 곳부터 모든 기억을 들출 때마다 이제는 확신하는 것이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b).” 하는 것 같이 또한,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하심이 오늘 나로 주 앞에 서는 복을 더하였다. 이러기까지 지나온 시절의 서러움과 노여움에 대하여는 더 이상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가지고 글을 쓰고, 누구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나의 상처가 고백이 되고 위로가 된다. 오죽하니 ‘아픈 아이’의 엄마는 나의 나 된 것으로 위로를 얻음으로 자신의 이혼과 재혼과 아이 둘의 힘겨운 일에 대하여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선생님은 아시겠지만, 하고 시작하는 그의 서러움에 대하여 나는 말씀으로 다가가기를 기도한다. 저이도 전에는 예수를 믿었다고 하고 교회를 다녔다고도 하는데, 하여 돌이키려 하심인데 여전히 망설이게 되는 것은 ‘세상 일’을 생각해서이다. 나이 서른이 다 돼 가는 전남편의 아들은 두문불출 방구석에서 나오지 않고 게임에 중독되어 산다. 살은 쪄서 거구가 된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인데 당할 수가 없다. 뒤늦게 본 지금의 아이는 중학생이 되면서 더욱 더 통제 불능상태이다. 그런 가운데 나는 때를 기다린다.
하여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 하심 같이 나는 이제 주의 때를 기다리며, 그러는 동안 이와 같이 베드로의 고백,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를 바랄 수 있어,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하는 의미가 새롭다. 곧 이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 예전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지나간 나의 노여웠던 날들도 모두가 찬송이 된다. 어렸을 때는 어려서 더 서러웠고 나이 들고는 나이 들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려 기를 쓰고 잘하려 했던 수고에 대해 이제는 자유롭다. 곧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한들 누가 알아줄까? 알 수 없는 이와 같은 눈과 귀로 주의 말씀을 본다는 일은 복된 것이다. 하여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 그렇게 나는 확신하기를 나로 이 이른 시간마다 깨우시고 교회로 나오게 하심으로 이미 증명되는 복이었다. 그러므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 오늘도 오늘의 처신으로 족한 것이다. 무엇으로 어떤 결과를 또는 성과를 위해 내가 노력하지는 않는다. 주가 주실 때, 그의 더하시는 시간을 따라서 이러한 영적 분별력이 주어진다는 바울의 설교나 베드로가 받은 복의 핵심은 하나다. 하여 오늘도 주님은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막 8:18).” 하실 때,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며, 무엇을 기억하고 살고 있는지… 말씀 앞에 나를 세우심이 복되다.
오늘 이 본문의 한 고백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하나의 결산이기도 하다. 특히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이은 예수의 수난에 따른 예고는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 정점을 알리는 신호다. 수난 받는 종으로 사명을 완수할 절정의 순간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베드로의 항변은 그리하여 사탄의 계책이었다.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32-33).” 이를 통해 오늘도 되새기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의 간격이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는 것은 단순한 반대의사 아니다. 의역하면, ‘주여 이 일이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는 말로 ‘주여,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하는 좋은 말이었다. 어떤 의도에서든지 좋은 뜻이었는데, 예수님은 단호하셨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33).”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실 정도로 격하게 노여워하신 까닭은 앞서도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곧 시험 받으실 때에 사탄을 물리치실 때에도 그리하셨다. 즉 우리는 종종 좋은 말, 위로가 되는 언사로 사탄이 된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죄가 아니야.’ 하는 따위의 말은 그래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잘못을 직시하고 죄를 직면할 때 승부를 봐야 한다. 대부분은 말씀으로 다가가면 ‘다음에, 나중에, 천천히’ 하는 말로 사양하는데 이는 그 일의 뒷면에는 사탄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엄마도 필요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교회로, 예배로, 주 앞으로 부르면 영락없이 다음에요, 하고 뒤로 피한다. 다들 안다고 하지만 실은 붙들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만 좋은 말을 원한다. ‘잘 될 거예요, 애들 다 그렇지요, 곧 나아질 거예요.’ 하는 말처럼 회피를 권면할 수는 없다. 그럴 바엔 침묵하는 게 낫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늘의 이적만 바라고 온 이들로 인해,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막 8:13).” 그렇듯 낫기만을 바라며 세상적으로 어찌 좀 잘 되길 바라며 오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실컷 푸념만 하다 가거나 들으려는 답이 아니면 더는 외면하는 게 다반사다. 오늘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과 노하심은 하나님이 추구하시는 길에 있어 제거해야 할 것은 가차 없이 물려야 한다. 제자된 자는 ‘따르는 존재’이지 주의 뜻을 거스르고, ‘이끄는 자가 아니다.’ 하여 이르시길,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4-35).”
과연 오늘의 나는 어떠한지? 여기서 바울의 고백을 내 것으로 삼아,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심에 새삼 감격하고 감사하며,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시 95:1-3).
하는 찬송이 되어,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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