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막 9:37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시 96:10
가끔은 아주 가끔은 평범하게 어울려 대화하고 성경공부하고 교제를 나누고 싶다. 어쩌면 다들 이처럼 어디가 아프거나 힘들거나 황당하여서 말로조차 표현하기 힘들까? 대체 왜 이런 대화로 몇 시간째 제자리걸음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 때면 이게 뭐지? 이러고 있는 게 맞나? 하는 회의와 갈등이 인다. 그러한 때에 오늘 말씀이 나를 흔드는 것 같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7).” 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도로 마무리하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다, 야단도 치다,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주께 아뢴다.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시 96:10).
세상 모든 만사가 그런 것이라 해도,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1).” 하심을 묵상한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그의 신분과 사역을 영적으로 드러내신 사실을 기록하고, 곧바로 ‘귀신 들린 아이’를 두고 논쟁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이를 전제로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신다. 이는 영광과 고난의 역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을 알린다. 앞서 베드로의 고백에 의해 드러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영광’을 산 위에서 보여주신다(2-8). 반면,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구체적으로 십자가의 길이 남았음을 재차 예고하고 있다(9-13).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영광스러운 권능이 소개된다(14-29). 그리고 다시 그 하나님의 아들이 감당해야 할 고난이 예고된다(30-32). 그렇게 해서 제자들에게 집중적인 교육과 훈련을 시행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33-50).
예수의 변화된 모습에 모두가 두려움으로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5).” 그런데 이와 같은 상상은 그가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한다.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6).” 일련의 행동들을 통해 우리가 기대해왔던 시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나이 서른의 적잖은 이가 아이로 멈춘 것 같다. 무엇을 이르고 가르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도 나란히 앉아 성경을 읽고 설명하고 덧붙여 우리의 생활을 이야기한다. 주어진 텍스트 같이 성경말씀으로만 하면 30분이어도 족하다. 일상적인 대화가 길어지면 그때부터 ‘말의 해석’이 필요하다.
사느라 다들 사는 게 고생스럽다. 아흔 살이 넘은 장모를 데리고 좀 더 큰 병원으로 가서 어깨와 무릎을 검사하고 진통주사를 맞았다. 마약성파스도 두 장 받아왔다. 같이 식사를 할 때면 사는 데 진심인 생의 한복판에서 나는 경이롭다. 상대적으로 입이 짧은 나로서는 먹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서, 그야말로 ‘먹고 사는 문제’가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 가운데 덧붙는 게 더 나은 ‘높은 자리’를 구하는 것이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33-34).” 도대체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변화산상에서 내려와 귀신 들린 아이를 마주하고 서로가 나눌 대화가 과연 그런 것이었을까? 그들의 관심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보다 세상의 권세에 집중되었다. 십자가의 고통 없이 면류관만 바라고 있다. 변화산상의 경험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그리스도와 우리들이 누리게 될 영광을 예시한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비록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이를 경험한 제자들은 황홀경에 빠져 그곳에 머물고자, 고작 초막 셋을 짓고 싶어 한다. 물론 이 증거는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8:29)”에 따른 확증이다. 이 현장은 제자 훈련의 자리다. 향후 예수의 메시지는 고난과 희생이라는 주제로 집중될 것이다. 여러 생각을 하다, 아이 앞에서 문득 드는 생각이 내게 맡기신 한 영혼이라! 나의 영적 무지를 탄식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것은 이렇듯 동문서답으로 시달리는 순간에서다. 오히려 말 잘하는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이러한 경험이 없다.
영광스럽게 변화된 모습을 보이심으로 제자들의 불안과 동요를 가라앉힐 뿐 아니라, 장차 임할 영광의 나라를 증거 한다. 예수를 거시안적으로 믿지 못하며 사는 세상에서 당장의 자리 다툼으로 논쟁하는 제자들을 이해한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앞에 베드로를 위시하여 제자들은 곤경과 궁핍에 허덕이는 산 아래의 무리들을 외면하고 그 영광에 집착한다. 그때 산 아래에서는,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14).” 왁자지껄 한바탕 난리가 났다. 이는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17-18).”
그러니 그런 산 아래 세상을 도외시한 채 변화산의 영광에 집착하고 그저 가만히 거기 머물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겠다. 만사가 귀찮고 누구의 어떤 사연이 부담스럽다. 저와는 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그 전후사정을 추측해야 한다. 믿음으로 아이엄마나 누구와 함께 (정상적으로) 대화하고 이러한 상태를 말씀으로 나누기를 바라지만 온전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체면도 차려야 하고 새로운 관계도 불편해하여서 그저 서로가 각자의 길로 가는 셈이다. 그러니 내가 뭐라 한들, 나서서 어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어서… 덧붙여 아이의 병적인 소비 욕구에 환멸이 인다. 그런 와중에 몇 만 원짜리 반팔 티 한 장을 아무렇지 않게 소비하고, 느닷없이 10년 뒤에 카페 하나 정도 차릴 수 있는 돈을 모을 수 있지 않겠냐고 하는, 널뛰듯 하는 저와의 대화가 힘겹다. 사느라 사는 게 그렇게들 힘들다. 아이 서넛을 낳고 쉰 살이 지났는데도 신랑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이나, 늘 혼자여서 외로운데 극심한 장애로 몸을 가누기 힘든 처지에서 서러워하는 이나, 우울과 불안으로 힘든 이나, 아이 일로 억장이 무너지는 이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5).”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나는 어쩌면 이 시간 이 교회 안으로 숨어들듯 혼자만이 주 앞에 엎드릴 때가 좋다. 오늘은 서울로 가서 어머니를 보고 와야 겠다 해서, 아들이 운전해주고 갔다 오기로 했는데 내심 걱정이, 불안이 여러 각도로 나를 휘젓고 있다. 나 하나 이렇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정이라, 산 아래의 저 왁자한 시장터 같은 혼잡함에 몸서리친다. 하여 시인의 고백이었을까?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시 55:5-7).
하나,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39:9-10).
그렇게 다들 사는 게 일이라, 그 몸 하나 건사하며 주어진 생을 다하는 게 눈물겨운 사명이다. 아흔을 넘기면서 안 아픈 데가 없는 몸으로 매일 진통제로 버티며, 일주일이 멀다하고 병원을 찾아야 하는 몸으로 살면서도 꾸역꾸역 먹을 것을 입에 물고 틀니를 굴려가며 음식을 꼭꼭 씹어 삼킨다. 어제는 설렁탕이 드시고 싶다하여 마침 병원 옆에 있는 설렁탕을 사드렸다. 마주보고 앉아 나는 노인이 오물거리며 혼자서 그 한 그릇을 다 비우고 국물까지 남김이 없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사는 게 사역이지 싶었다. 당시 제자들의 영적 상태는 보잘 것 없었듯, 오늘의 나의 심정도 다를 게 없지만 이 모든 체험이 더욱 더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게 한다. 결국 예수께서 귀신 들린 아이를 치유하시고,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29).” 곧 우리로는 어쩔 수 없는 일에 있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처럼 주 앞에 엎드려 고하고 아뢰며 생각을 더할 때, 권능과 불신이 싸우고, 교만과 경건이 다툴 일이다. 죽기까지 우리 안에 이 둘은 서로가 싸우는 터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이것이 오죽하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렇듯 나는 나와 싸운다. 내 앞의 아무개가 아니라, 내 안의 내가 문제다. 이에 기도로밖에는 상대할 수 없음인데,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그 크신 권능을 나타낼 수 있다. 이를 약속으로 받았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2).”
그러므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하신 것을 붙든다. 불신은 은혜의 권능을 상실하게 한다. 은혜를 빼앗기면 사탄은 역경이나 달콤한 유혹 등으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그것은 우리로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지 않게 하려 한다. 그러므로 기도한다. 말씀과 성령으로 이 마음도 가능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그리하여 오늘도 주시는 상황으로 산다. 눈물겨운 사투라, 아이도 자신을 병적이라 인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을 놓고 주께 구한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오늘 이 모든 상황 속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8).” 이에,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 3:11-12).”
하여 오늘도,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시 96:1-2).
우리가 주로만 만족할 때,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3-5).
이에,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6, 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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