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막 10:51-52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시 97:1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고 묻는다(2). 이는 예수를 시험하고자함이다.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장의 말씀을 근거로 물은 것이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1).” 이 해석에는 오늘도 그렇지만 당대에도 대립되는 논쟁이 있었다. 엄격파인 샴마이파는 위의 수치되는 일을 간음으로 보고 간음한 이유 외에는 이혼을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금은 자유적인 힐레파는 무슨 조건이든, 가령 아내가 밥을 태웠을 때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런 가운데 바리새인의 시험할 목적으로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다. 우선은 예수께서 모세의 율법주의자보다 차원 높은 도덕을 가르쳤으므로(마 5:27-32),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알고 싶어했다. 또한 이와 같은 논쟁에 예수를 끌어들여 어느 편에 가담하는지 보려 했다. 정치적으로는 당시 헤롯이 이혼하였고 세례요한이 이를 반대하다 죽었으므로 예수를 같은 운명에 빠뜨리기 위한 악의적인 의도도 숨겨져 있다. 어떠하든지 예수님은 그들의 속내를 아시고, 이르시되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5-9).”
이는 뒤이어 나오는 말씀 가운데 서로가 섬김으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이기며,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거였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4-45).” 하물며 서로가 짝을 이뤄 가정을 꾸렸을 때는 이에 따른 의미는 더욱 깊어진다. 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서로가 사랑하는 목적이 드러난다. 곧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여 섬기려하고’ 하심으로 우리는 섬기는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과연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철저히 섬기는 생애였다. 이는 사랑의 기본 원리로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곧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그렇다면 주가 내 안에 거하심의 증거는 주의 사랑으로 서로를 대함이겠다. 이혼이 너무 흔해진 시대에 이와 같은 말씀이 더러는 상처가 될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조부모 때만 해도 서로들 참고 살았다. 이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도 일치하면서 그 생명까지도 바쳐 인류를 섬기시고 구속하신 주의 사랑을 묵상하게 한다.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최고의 본이 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감정에 의한 것이다. 실제 사랑은 관념의 언어이지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가 아니다.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것은 그때마다 숱한 감정들의 변화를 겪는 일일 텐데, 자기목숨을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하시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생각하면 우리의 사랑이 순간의 감정으로 정의될 수는 없는 일이겠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근거로 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가장 중요한 구절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5).” 곧 이를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으로 설명하고 계신 것이다. 대속물이란 구약의 짐승들을 잡아 죄를 대신하여 제물로 드렸던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곧 인자의 온 것은, 하고 그리스도의 생애가 어떻게 이어져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는가를 살피게 하신다. 그러므로 ‘대속물’이란 개념은 한참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바울서신에서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딤전 2:6).” 하고 증거한 바 있다.
이 낱말의 동사형으로 ‘대속함’은 3회 정도 표현되었다. 먼저는 ‘속량할 자’로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눅 24:21).” 다음은 ‘우리를 대신하여, 속량하시고’ 하는 표현으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또한 베드로는 정확하게 대속물로,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라 설교하였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그렇듯 대속물을 주고 성취된 사실인 ‘대속’이 역시 또 ‘속량하심’으로,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눅 1:68, 2:38).” 이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하심으로 그 의미를 더욱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곧 이 대속물의 뜻으로 서로 한 몸을 이뤄 부부가 된 자들의 삶이란 그렇듯 서로에게 섬김과 희생으로 주의 뜻을 삼아야겠다.
좀 더 살펴보면 이 낱말의 어근은 ‘푼다’는 뜻으로 구약의 제사법전에서 출발하였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받쳤던 반 세겔의 생명의 속전과 같이,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들을 계수할 때에 자기의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것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출 30:12).” 하신 것이나, 소가 사람을 죽였을때 지불한 은 30세겔의 속전과 같이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부과하면 무릇 그 명령한 것을 생명의 대가로 낼 것이요(1:30).” 하심과 같이 구약의 배경 아래 이 낱말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설명하는 소중한 언어’이다. 그가 죄와 죽음의 노예상태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하신 보혈의 값이다. 이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1-2).”
그렇게 살았던 나의 날들을 나는 확실히 구별할 수 있다. 그땐 그렇듯 감정의 소동에 휘말리며 살았다. 사람을 희구하고 사랑을 갈구하느라 그런 것이라지만 더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죄악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4-5).” 하시는 에베소교회를 향한 바울의 간곡한 설교에서 나는 늘 나의 나 된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 나를 돌이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것도 감격스러운데,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6-7).” 그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야말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대속물 예수는 그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만족을 주었다. 더하여 마귀에게 인간의 죄 값을 지불하셨다. 단지 인간에게 도덕적 감화를 주는 것 이상의 값어치로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살리셨다.’ 그리스도께서 죄 값을 지불하신 대상은 ‘범죄 한 인간은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 스스로 정하신 법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이와 같은 공의를 지불하시는 데 있어,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대속물, 속량하심이 되었던 것이다. 하여,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딤전 2:6).”
하시는 말씀 앞에 한참을 머물게 된다. ‘그가’ 곧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즉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속전으로 주셨으니’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속전되심을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들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전부는 아니어서 ‘들을 귀 있는 자’ 곧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가능하였다. 속전의 헬라어 뜻은 노예나 죄수의 몸값을 나타낸다. 저들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값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지만, 그의 속전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죄의 멍에로부터 풀려나게 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0-13).”
아, 이 놀랍고도 가장 쉬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심이 누구에게는 죽어도 그럴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일을 위하여 ‘기약이 이르면 증거 할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대속은 기회가 있는 대로 우리가 증거해야 하는 사실이 되었다. 내가 경험한 구속의 변화된 생활을 자주 상기하고 묵상하게 되는 이유다.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르러 일어났다. 즉 ‘기약이 이르면’ 곧 ‘때가 차매’, ‘그 날이 오면’ 하는 표현도 모두 같은 의미에서 이해된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뜻은 ‘그 자신의 때에’를 가리킨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 지혜자가 일컬었던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중략)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1-8).”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다.’ 모든 사람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사 53:11).” 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증거도 있다. 곧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때 지시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지만 함축적으로는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을 반영한다.
이를 드러내는 한 사건이 액자처럼 끼어 있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46-48).” 오늘 여기 이 소경은 익명으로가 아니라 실제 그 출생과 본명이 모두 밝혀진다.
때는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이다.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동편 베뢰아 지방을 우회하시고,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강서편의 도시로 예루살렘의 관문인 여리고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당시 북방 갈릴리인의 일반적인 순례의 길이기도 하였다. 여리고는 지중해면에서 2500미터나 낮은 곳이며 따라서 해발 762미터의 고지인 예루살렘에서는 내림길이었다. 사해 북쪽 요단강 하류의 서편에 위치한 비옥한 곳이다. 거기서 ‘디메오의 아들인 거지 소경 바디메오’가 예수에 대해 듣고 외쳤다. 이처럼 그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본서 뿐이라, 바디메오 역시 디메오의 아들을 뜻함으로 결국 겹말이 된 셈이다. 히브리어를 알지 못한 이방인 수신자를 위해 일부러 그리 밝힌 이유도 있겠다. 그의 부친 디메오는 당시 여리고에 알려진 인물 같다. 어쨌든 저는 현실적으로도 절박했으나 예수를 들었고 알고 믿었다.
곧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47).” 이는 참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저가 외친 소리는 ‘다윗의자손 예수여’ 하는 것이다. 흔하지 않은 부름이다. 주의 인성을 가리키고, 동시에 메시야의 별명을 덧붙였다. 유대인은 메시야를 다윗 왕의 재현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나타나심으로 사방의 적들을 정복하여 다윗 왕국을 재건하는 것이라 믿었다. 일반 군중이 그에게 ‘나사렛 예수’라고 가르쳐 줄 때에 즉각 그는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한 신앙’이 엿보인다. 아마 그는 일찍부터 예수에 관해 들었고, 이 예수가 바로 메시야이신 것도 믿었고, 그를 만나기를 소원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고 멸시하는 중에 저는 더욱 크게 외쳤다.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이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준다. 우리 신앙에는 언제나 장애물이 있다. 현실적인 문제로든지 다른 이유로든지, 대부분은 결정적인 권함을 회피하거나 피한다. 이곳으로 와서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어떤 문제를 안고 오는데 대체로 상담이나 자기 이야기를 하고자 오는 것이지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자들은 없다. 여기서 군중이 저를 제지한 것은 그만큼 다양하고, 우선하는, 저마다의 별의 별 이유와 사연이 존재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예수님은 멈추셨다. ‘머물러서서 저를 부르라.’ 하셨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49).” 저는 자신의 걸친 옷도 팽개치고 나아갔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51).” 서로의 대화에 군더더기가 없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52).” 이는 그 믿음이 저로 절제된 말로 정제된 간구를 하게 하였고, 믿음으로 저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심을 들었다. 오늘도 내게 필요한 말씀이다.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다 해도 ‘가라, 네 믿음으로’ 하시는 것이다. 하여,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시 97:1-2).
오늘도 주가 나를 다스리심으로 내 앞의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그 땅은 늘 땀을 흘리게 하는 어려움의 연속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는 섬이 있다는데, 이것으로 즐거워하고 이것으로 기뻐하게 하심이다. 뿐만 아니라, ‘구름과 흑암’이 나를 두른 듯 어디가 아프고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그렇게 나를 두른 것 상이로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
…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6, 10-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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