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막 12:17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시 99:9
우리는 모든 경계에 선다. 선과 악의 경계, 불안과 만족의 경계, 고통과 평안의 경계… 등 이 모두는 언제든 어느 쪽으로든지 기울어질 수 있다. 이에 오늘 말씀을 그리 읽는다. 세상과 하나님의 경계에서 누구의 것인가? 하기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17).” 이 둘을 한 데 잡고 살려니까 인생은 갈대 같이 오락가락 한다. 사는 게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은 죽음을 같이 딛고 살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오라, 하시면 가는 게 인생이다. 거기까지, 하고 선을 그으시면 거기까지이다.
어떤 속상한 일을 두고 나는 연거푸 하나님께 묻는다. 기도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인정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얼마든지, 내 생각과 이해와 합리와 타당을 무너뜨리는 게 하나님의 일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인정하는가 보시려고, 이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비록 그에게 일어난 일이 참으로 비참하여 원망과 서러움뿐이라 해도,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는 주를 의뢰하는 것으로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20-22).”
이와 같이 우리가 어떠하든지, 주를 인정하고 의뢰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찬송을 받으신다. 이처럼 우리로 찬송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찬송이 되게 하신다.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시려고 납득이 안 가고 도대체 왜 이러시는가? 하는 마음으로 고단하여 죽을 것 같더라도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 이와 같은 욥의 고백이 찬송이 되는 일이다. 한 아이는 한 달에 두 번 주말에만 집으로 온다.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다 나오는 아이는 집 대신 엄마의 가게 안쪽 쪽방에서 주말을 같이 보내고 들어간다. 아이는 강하게 집을 거부하고 아버지를 부정한다. 병원에 있을 때가 오히려 안정적이고 활동적이라고 한다. 나이 서른, 언제든 원하면 스스로 나올 수 있다고 하는데도 아이는 스스로 그리 결정하고 지낸다.
누구의 탓이 아니라 모두의 부르심이다. 이를 알게 하고 싶은데 저마다의 생각으로 거부한다. 각자의 판단과 기준으로 그리 결정하고 산다. 부모의 나이도 곧 일흔이라, 아이엄마는 자신이 죽고 난 뒤를 생각하다 혼자서 자주 운다. 마치 보리새우 등껍질 같이 각자의 집을 이고 살며, 가시 돋친 방어기제로 뭐라 권면하는 말을 외면한다. 아흔이 넘은 나의 장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이며 신발, 가방 따위를 찾는다. 듣다보면 수십 년 전에 쓰던 것인데 버렸냐며 다그친다. 어제도 아내와 그런 일로 옥신각신 하는 데서 평소처럼 못 들은 척하다, 그 시간을 어디에 두고 왔는지 물었다. 나의 물음에 장모는 무슨 말인가? 하다가 자신의 성기고 허연 백발을 쓸어 넘기며, 그러게 어느새 이렇게… 하며 잠잠해졌다.
우리는 저마다 그 나이를 사는 것 같지만 모두가 생(生)과 사(死)의 경계일 뿐, 그야말로 어느새 여기에서 비로소 주를 바랄 것인지, 여전히 자신의 의를 구하며 살 것인지. 아이엄마도 한때는 예수를 믿는 청년시절이 있었다. 나름은 신앙이 좋아서 새벽예배도 나가고 그러한 신앙으로 공부도 열심히 해서 학벌도 좋다. 모 은행 지점장까지 하다 아이가 명문대에 들어가 좋았던 것은 잠깐이고, 어느 순간에 조현이 오고 급기야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돌아오라는 부르심인데, 사실 저들은 돈이 너무 많다. 남편이 다소 폭력적이기는 하나 사업이 늘 번창하여 서로가 여기저기 집과 땅을 가지고, 가장 좋은 병원에 아이를 입원시키는 것으로 팔자타령으로 돌린다. 뜬금없이 내게 어쩌면 좋을까? 하고 묻는 것은 자신들이 내린 결정을 고수하기 위한 핑계다.
나는 자주 묵상일기쓰기를 권한다. 성경을 읽고 풀이를 하라는 게 아니라, ‘내 이야기’로 그 말씀이 건네는 말에 답하기를 권한다. 다음은 그러한 자신을 드러내기를 권한다. 열에 아홉은 쉬쉬하고 혼자 들어앉아 서로의 관심 밖의 인물로 자처한다. 예수 앞에 낫고자 하여 찾아왔던 수많은 병자의 특징은 남들이 뭐라 하든지 필사적으로 예수께로 왔다. 악악거리며 소리를 질러 예수를 불러 세우기도 하였고,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아뢰었고, 심지어는 지붕을 뚫고 들어가거나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옷자락이나마 만지려는, 간절함은 스스로 들어앉을 수 없게 한다. 대체로 내 곁의 어려움은 보라새우 등껍질을 하고 가시를 세워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다, 자신의 등껍질에 갇혀 죽는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후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을 모함하고 죽이려 결정했다. 오늘은 고난주간 셋째 날(화요일)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이다. 예수를 올무에 빠뜨려 그 빌미로 잡으려 하나,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11:28).” 묻거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고 그 의도가 빤한 질문을 던진다(12:14). 그러나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15-17).”
어쩌면 우리로도 그리 답하신다. 오늘의 그 생(生)이 누구의 것이냐? 그 배움과 이룸과 꿈과 나름의 열심이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시는 것 같다. 종종 나 역시 아무런 성과도 없는 것 같은 공허한 말과 말, 사연과 사연 사이에서 이 길이 맞나? 도대체 하나님은 왜 내게 이런 소모적인 입장을 맡기신 것일까? 하고 내 곁의 성공하는 목회자들(?)을 돌아보게 한다. 같이 시작한 동기 목사는 개척을 시작하여 어느새 100여 명의 성도가 모이는 나름의 자립교회가 되었다. 누구는 어디 신학교 교수로 겸임하며 교단 총회에서 서기도 한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성공을 보며 나는 주눅이 들기도 한다. 누가 말하길 ‘이 글’을 써서 뭐하나? 하며 뭔가 다른, 가령 누구처럼 ‘유튜브 목사’나 그러한 상담을 권하기도 한다. 누군 어디 요양원이고 고아원 같은 곳으로의 봉사 목회도 권한다.
나의 이 되도 않는 소리겠으나 묵상일기, 묵상글쓰기를 권하는 것은 말보다 글이 힘이 있다. 생각을 모으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현미경 같기도 하다. 말씀으로 하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내 안의 수치, 부끄러움, 후회, 갈등, 원망 등 부정적이었던 노여움이 찬송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말씀의 힘을 믿는다. 거기에 묵상글쓰기는 손으로 하는 기도다. 글을 전개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벗어낼 수 있다. 자신의 등껍질을 까지 않는 한 스스로 이를 지고 살아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보기에는 똑같은 것 같은데, 두 집사 내외는 늦은 결혼으로 낳은 아이가 극심한 선천적장애로 말도 못하고, 몸도 못 가누고, 지능도 낮은 가운데 날마다 아이를 안고 교회로 와서 엎드린다. 섬기는 교회가 4층이라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자신들이 사는 빌라도 4층이라 말이 쉽지 그게 쉬운 일이겠나? 아이가 아픈 날은 두 부부가 돌아가며, 혹은 혼자만 올라와 주 앞에 엎드린다. 아이로 인해 온 교회가 하나 되었다.
우리의 간절함은 더러 회의와 갈등으로 주께 묻게 한다. 주님은 기꺼이 그 어떤 질문도 받아주신다. 시편은 그 종합편으로 할 말 못할 말없이 다 주 앞에 아뢰는, 찬송이다. 곧 원망과 좌절도 주 앞에 아뢰면 찬송이 된다. 이를 말씀으로 묵상하다 글로 쓰면 치유의 손길이 된다. 여전히 나는 하루 네 번 세 종류의 안정제를 먹는다. 그것도 여섯 번에서 다섯 번으로, 요즘은 네 번으로 줄인 셈이다. 가령 딸애 내외가 와서 어제는 같이 교회가 든 건물에서 식사를 했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고, 나는 슬그머니 약을 털어 먹었다. 서로가 이제 다들 그러려니 한다! 나 역시 밥 먹다 말고 대수롭지 않은 듯 약을 먹고 잠깐 멈추고 가만히 두었다.
나는 나의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것이다. 동전 하나가 가이사의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것인 것처럼, 아픈 아이가 자신의 아이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것이다. 가이사인가? 하나님인가? 세상인가? 성령인가? 그러면서 저들은 관념놀이를 하듯 천국에서 죽은 이의 아내가 누구의 처인가? 하는 따위로 묻기도 한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24-25).” 우리의 천국은 막연하지 않고, 우리의 오늘은 구체적이다. 이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27).” 하긴 우리의 이 어리석은 논박도, 생각도, 갈등도 아직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26).” 앞서 간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여전히 살아있다. 우리가 살아서 사는 날 동안의 일로 꾸역꾸역 사느라 여념이 없다는 게 원망과 갈등이다. 욥은 그리하여 그 끔찍한 현실에서, 산 자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2).” 어찌 그럴 수 있는가? 하고 물으면 우리는 할 수 없지만 믿음 안에서 성령이 하신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어, 오늘의 이 모든 형편으로 주가 이루시는 영생이 있는 것이다.
하여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이 무슨 종교가 이 모양의 말씀으로 위협할 수 있나싶다. 경건하게 의롭게 열심을 다해 성심으로 주를 섬길 때 복에 복을 더해야 맞는 것 아니겠나? 그런데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아하! 우리는 살아서도 주의 것이지만 죽는다고 해도 주의 것이다. 곧 우리의 죽음이란 단지 어제 저녁과 오늘 새벽의 간격이 ‘잔다’ 하시는 말씀이 그 말씀이었다. 자고 깨면 또 하루인 오늘에서 나는 얼마나 주 앞에서 살고 있는지? 거지 나사로로 하는 일도 평생을 부자의 집 앞에서 걸식하다 죽었다 한들, ‘나사로라 이름하는’ 그 이름과 같이 저는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아무 일도 안 한 것 같은 열심을 다해 살아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뭘 꼭 굳이 얼마나 대단한 일로 인생을 값지게 살았다는 이유로 천국이 보장되고 구원이 약속된다고 하는 이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하여 오늘을 살면서 아프든지, 분하고 억울하든지, 원망스럽든지, 고통 가운데 죽을 맛이든지…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를 붙든다면 어느 두 집사 내외의 인생이 그 어떤 사역보다 값지고 소중하였다. 모 사관학교 장교로 복무하다 해외 파견을 구상하던 이가 들어앉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라.’ 하는 이 신앙으로 전신마비의 아이를 돌보았다. 간호사 아내 집사는 평생을 밥벌이를 위해 일하며, 퇴근하면서 교회에 올라와 기도하다 간다.
나는 오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저들을 생각하였다. 누구에게는 돈이거나, 자신의 꿈이거나, 어떤 보람과 나름의 열정이나… 우리는 저마다 경계 위에 선다. 욥을 찾아간 사탄 같이 오늘 우리에게도 현실은 묻는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 계속 이 길을 갈래? 하나님을 원망하고 차라리 내가 돌을 떡으로, 세상 모든 영광을, 권세를 줄 테니 그것으로 선을 이루며 살면 되잖나?’ 하는 다양한 말처럼 현실이 늘 우리로 경계에 세우는 것이다. 자, 이제 어쩔래? 이래도 계속 교회를 유지할래? 목사 그만 두고 다른 일 안 할래? 하고 묻는 것 같은 현실이다. 그래서도 나는 묵상글쓰기를 죽어라 하고 한다. 내게 선포하지 않으면 내 안의 갈등과 번민이 내 영혼을 흔들어댄다. 자꾸 어디가 아픈데, 아픈 것도 미안한 일이라, 이를 혼자 앓으니까 외로움이 끼어든다. 외로움은 슬그머니 불안으로 둔갑하고, 더러는 호흡이 가빠져서 죽을 것처럼 힘들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우리가 산다는 일, 참 별 거 없다. 다들 뭔가 엄청난 의미부여를 하며 하나님을 대신할만한 또는 곁들여 하나님의 뜻인 양 자신의 신념을 믿음으로 둔갑시켜 학벌로나 성경에 대한 것으로나, 지적허영으로 오늘의 여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같이…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38-39).” 이는 오늘도 교회마다 돈과 건물과 학벌과 사람이 모여, 그야말로 교회 양극화는 극에 달했다. 그럴 때면 또한 세상은 속삭이길,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것 같다. 현실이, 처한 상황이 ‘그래서 이제 어쩔래?’ 하고 물을 때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17).” 이에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전부를 드릴 것인지, 일부를 드릴 것인지? 삶이란 그렇듯 단순한 것을 심히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그 잘난 자존심 때문이다.
자존심(自尊心)은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인데, 말씀 앞에서 이건 아니지 않나? 하고 자신이 판단하는 것으로 더욱 두껍고 뾰족한 등껍질에 갇혀 살다 죽는 보리새우 같다. 하여 오늘도 말씀 앞에 우선적으로 나를 앉히고 글을 쓴다. 나를 들여다보며 말씀으로 선포한다. 나는 하나님의 것인가? 세상의 것인가? 이에,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시 99:1-3).
오늘의 나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믿으며,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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