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막 13:36-37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시 100:3
신앙을 온전히 지키며 주어진 삶을 산다는 데는 인내가 필요하다. 돈에 대한 유혹에서부터 진리에 따른 갈급함에 이르기까지, 저마다의 사정과 그 고통에 대하여는 어찌 이루 말하기 어렵다. 그런 가운데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신앙으로 삶을 지킨다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를 아심으로 주님은 깨어 있으라 하신다. 이 교훈은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말씀이다. 말세는 예수가 오신 날부터 시작되었다. 무릇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핍박이 따르며, 이 핍박은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더욱 심해진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더욱이 안 믿는 가정에서 홀로 신앙을 지키는 아이나 아내들이 그 어려움을 더 많이 겪는다. 요즘은 대놓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마다하고 거부한다. 다들 적당한 선에서 적당한 타협과 안주를 선호한다. 모든 종교에 열린 마음을 후히 쳐준다. 이를 수용하고 허용하는 종파나 종교에 사람들이 몰린다. 이에 따른 묵시적 성격의 이 말씀은 다니엘, 요엘, 아모스, 스가랴, 말라기, 요한 계시록 등 마태복음 24장에서도 감람산에서의 말씀을 주목하게 된다.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하여,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따라서 세상이 아무리 우릴 노엽게 한다 해도 우리의 이 노여움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시고 그 남은 노여움은 허락하지 아니하신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이에 본문은 종말에 나타날 징조에 관해 말씀하신다(1-8). 이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5-6).” 먼저는 우리를 미혹하는 것들에 대한 경고다. 다음은 핍박에 직면할 것을 알리시고 인내하라 하신다(9-13).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11).” 현실은 종종 우리로 궁지에 몰리게 한다.
누가 연거푸 어떤 일을 두고 기도를 부탁하였다. 나는 기도를 약속하고 주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주로 강조한다. 그런데 아무런 성과도 없고 점점 더 어려움이 가중될 때 저에게 나는 뭐라 할 위로를 찾지 못하고 속상해한다. 단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주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부디 주의 영이 저의 속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게 된다. 나의 어려움과 그 사정에 대해서도 누구에게 일일이 말하기가 어렵다. 그것으로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주의 영이 나로 무엇을 알게 하시는지 주목하게 될 따름이다. 가령 늘 나는 내 몸으로 힘에 겹다. 일주일 이상 간다는 마약성진통효과 패치를 붙이고도 힘들다. 몸통이 돌아간 듯 서로 어긋나 있는 것 같아서 병원을 찾으면 기형적인 몸의 구조 때문이라는데 달리 저들도 방법이 없다. 거기에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고’ 벌써부터 이러니 남은 날들이 덜컥, 겁이 날 때도 있다.
하여 나는 누구에게도 무슨 말로 위로를 할까, 하고 핸드폰을 들고 한참을 생각하다 그만둔다. 뭐라 문자를 쓰다가도 도로 지우기를 여러 번이다. 고통 중에 있을 때는 어떤 위로의 말도 하나마나한 소리로 들려서 더 괴로울 수 있다. 인생에서의 핍박이 단지 외부에서뿐이겠나? 자기 안의 갈등과 연민으로 직면할 때, 굳센 믿음으로 인내하라는 오늘 이 교훈의 말씀이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환난의 때에 주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기를 명령하신다(14-27). 사실 이 재림 신앙은 늘 우리를 희망고문 하는 것 같다. 주가 오시길, 그 날이 하루 속히 임하기를, 기다리며 소망하는 자들은 어려움 속에 있는 자들이다. 적당히 살만하고 세상이 좋은 이들은 주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허상으로 빈다. 속된 말처럼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은 세상을 사랑하고 소유하며 사는 자들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가 없거나 별로 크게 바라지 않는다. 오래 오래 잘 먹고 잘 살다, 평안히 죽길 바라고, 좋은 곳으로 가는 것으로 이 땅의 복을 삼는다. 한데 시인의 관찰자적 시점의 진술과 같이,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시 73:3-9).
우리 곁에 이런 자들이 잘 되고 잘 풀려서 만사형통한 것을 보면 가히 시인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 그뿐인가? 상대적으로,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2-14).
그러니 이 땅에서는 상대적으로 느끼는 박탈감으로 신앙을 지키기가 더욱 어렵다. 안 믿는 자들이 더욱 잘 되고 평안한 것과 돈이면 더욱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에서 무엇을 바라고 살아야 할지가 확실히 우리의 믿음을 시험한다. 하여 오늘 본문은 이 종말의 때에 보다 구체적인 상황들을 예언하며, 그런 가운데서도 긴장하고 경성하기를 교훈한다(28-37).
슈바이처는 ‘예수는 세상의 임박한 천재지변적 종국과 묵시적인 하나님 나라의 급작스런 도래를 선포하는 묵시주의자였다.’고 한다. 곧 예수는 세상의 마지막이 도래하리라고 믿고 설교하였으나 결국 그러한 확신은 잘못된 환상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말론적 천국은 철저히 미래적인 소망으로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이에 대한 회의와 갈등으로 회심을 저버리고 교회를 등지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오늘 말씀에서처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26).” 이를 그대로 믿었고, 자신이 이 땅에서 죽기 전에 주의 재림이 임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박해로 죽어가고, 병들어 죽고, 그렇듯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에 갈등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다를 게 없어서 ‘믿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실상은 헛된 일 같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물론 믿음으로 생기는 더 큰 회의로도 힘에 겹다. 누가 말하길, 너 믿고 사는 걸 보면 안 믿고 사는 게 더 나은 것 같다고 했다. 저는 건물이 두 채로 어디에 땅들도 여럿이라, 세를 받으며 유유자적 사는 한량이다. 지역 유지로 적당히 정관 인사들과 어울리며 골프나 치고 고급 음식점과 여행지를 오가며 사는 게, 뭘 해도 형통하여서 때가 가까움을 알리는 말에 헛웃음만 짓고 만다. 이에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28-29).”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르시다 무성하였던 무화과나무에서 아무 결실도 없는 것을 보시고 저주하심으로 말라 죽은 사건이 있었다. 이와 같은 겉은 멀쩡하고 풍성하여, 모든 게 다 흡족하고 풍요로운 듯 복을 처벌처벌 받는 것 같아도 실은 그 결과가 아직 남은 것이어서,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7-8).” 여러 들리는 소리는 흉흉하여 믿음으로 살려는 자들만 손해이고 골탕을 먹는 것 같기도 하다. 다들 이런저런 일로 돈을 모으고 그에 대한 관심으로 온통 마음이 기울어 있을 때에, 한술 더 떠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때가 악하다는 말,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주님은 우리에게 당부하신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2-13).” 이 땅에 살면서 가족이 붕괴되고 서로의 사이가 멀어져서 몇 달에 한 번, 혹은 몇 년에 한 번, 혹은 누가 죽은 뒤에나 볼까말까 하는 시대가 점점 더 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윤리적인 갈등도 가중되나 엄밀하게는 육신의 가족이 영적인 가족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가감없이 드러내셨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5-36).” 이는 역설적인 진실이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데 있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곧 가족이라는 단위로 이루어지는 구원이 아니었다. 다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하여 저마다 그 자식이나 사랑하는 이로 기도하며 마음을 다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교회를 떠나고 주를 등지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다. 누구의 경우 저는 당시 사랑하는 남편과 어린 두 자녀를 위하여 교회를 떠났다. 그때 한 말이 사랑하는 가족들은 모두 안 믿어서 지옥에 가는데 나만 천국에 간들 무엇이 행복하겠나? 하는 것이 변명 아닌 변명이었다. 그리고 십 수 년이 흐른 뒤 우연한 소식으로 어찌 지내는가? 물었을 때, 이혼해서 신랑은 새로 가정을 꾸렸고 큰 애는 남편을 따라갔고, 작은 애는 혼자 유럽 어디로 유학을 갔고, 자신은 운신이 어려운 친정엄마와 산다고 했다. 교회는 다니는가? 물었을 때 친정엄마 모시고 자신만 다닌다고 했다.
그때 젊은 때에 저가 겪었던 어려움을 안다. 안 믿는 남편이 일요일이면 교회 문제로 시비였고, 그것만 아니면 싸울 일이 없다고 했다. 아이들도 주일학교에 같이 가는 것을 싫어하다 아빠와 같이 늦잠 자고 외식하고 마트 가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런 그에게 인내로 그 상황을 이겨내기를 바랐으나…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이러한 말씀 앞에서 저마다 생각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젊은 내외가 결혼 전에 약속하기를 서로의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혼자만 믿는 아이에게 나는 늘 용기를 더한다고 하지만 쉽지가 않다. 더욱이 시댁 전체가 안 믿거나 타 종교일 때는 그 어려움은 가중된다.
이에 성경은,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결국은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일 텐데, 나 같은 경우처럼 온 가족이 믿고 주의 사역자로 사는 터라 저들의 고충에 대하여 감히 뭐라 왈가왈부하기가 면구스럽다. 안 믿는 가족의 박해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갈등하게 한다. 이에 우리가 붙들 것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6-17).” 하여 오늘의 말씀은 우리로 인내할 것을 강조하신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35-36).” 하여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37).” 이러한 주의 말씀을 몸으로 견디며 삶으로 짓눌려 사는 이들에게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저마다의 어려움이 없는 이는 없겠으나,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3-4).” 이와 같이 인내를 위하여는 깨어 있어야 한다. 포기하듯 타협하고 돌아서서는 안 된다. 이를 감내하면서도 주를 바랄 수 있는 길은, 찬송이다. 찬송이란 어떤 어려운 지경에서도 주를 바라며 주를 의뢰하고 주의 선하심을 고백하는 일이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시 100:1-2).
그럴 수 없는 처지에서 더욱,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3).
할 때에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것을 고하는 것이다. 내가 비록 허투루 사는 세월에도 하나님은 나의 자녀들을 지키셨고 주 안에서 보호하셨다. 죽어 마땅하였을 때에도 주는 나를 돌이키셨고 심지어는 나 같은 자에게 주의 일을 하게 하셨다. 이에,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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